중국 대법제자 신생(新生)
【정견망】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두 가지가 있다. 육체적 고통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우리 수련인(修煉人)에 대해 말하자면 모두 좋은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갑자기 닥쳤을 때 그것이 좋은 일임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수련인이 얼마나 될까? 흔히 고통 속에 빠져 고통의 원인을 고심해서 찾으며 고통에서 즉시 벗어나려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내게는 절실한 체험이 있다. 이를 글로 써내어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처음 수련을 시작했을 때 자신을 닦을 줄 몰랐기 때문에 매번 심성의 고통이 나타날 때면 나는 내게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원망했다. 아울러 나중에도 이를 마음에 담아두었고 매번 이 일이 생각날 때마다 기분이 나빴고 마음이 아주 혼란스러웠다.
내 기억에 한번은 딸이 아빠에게 수입 보온병을 준 적이 있는데 내가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딸이 말했다.
“뭘 그리 멍하게 보세요, 쳐다본다고 엄마 게 되진 않잖아요.”
당시 나는 자신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속으로 너무 힘들었다! 정말로 심하게 불평하면서 딸이 내게 너무 불경하고 불효막심하다고 여겼다. 또 이 일을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다. 최근 몇 년에야 비로소 딸이 내 심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비로소 그렇게 한 것임을 진정으로 알았다. 이는 딸에 대한 정(情)을 제거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고 딸에 대한 정을 줄곧 없애지 못했다.
딸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엄마,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엄마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 다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말이 옳든 그르든 엄마 말은 다 듣기 싫어요.”
사실 이미 설명했다시피 이는 딸에 대한 나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준다.
한번은 내가 남편과 이틀 동안 차를 몰고 딸 집을 방문하러 갔는데(딸이 임신 중이었다) 마침 양력설이라 딸은 손녀와 영화관에 갔고 사위만 집에 있었다. 그러면서 전화로 사위도 영화를 보러 나와야 하니 우리더러 길에서 음식을 사 먹으라고 했다.
당시 나는 마음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딸이 멀리서 친정 부모가 보러 왔는데 이렇게 박해한단 말인가?’
그후 몇 년 동안 딸 집에 가지 않았다. 나는 결국 딸이 못마땅했고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여겼을 뿐이었지 이 일을 내 수련과 연계해 보지 않았다. 만약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 본다면 딸의 이런 행동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좋은 자식이 아니고 효성스럽고 순종하는 자식이 아닌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작년에 우리 집에 일이 좀 생겨서 딸 집에 가서 머물렀다. 처음에는 여전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했고, 그럴 때면 정말로 딸 집에서 하루를 머무는 것이 마치 몇 년처럼 느껴졌고 더는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법을 외고 자신을 찾으며 이유를 찾아보았다.
‘도대체 딸은 왜 이러는 걸까? 왜 나를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는가?’
계속 법을 공부하고 안으로 찾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명백해졌다.
‘이것은 딸이 나의 제고를 돕는 것이 아닌가? 모순이 없이 어떻게 제고할 수 있는가? 심령(心靈)의 고통이 없이 어떻게 나의 심령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는가?’
나는 마땅히 매 한 차례 심령의 충격을 소중히 여기고, 매 한 차례 모순이 닥친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모두 자신을 순정(純淨)하게 하고 자신을 제고할 가장 좋은 기회다. 매 한 차례 고통을 소중히 여기고 매 하나의 고생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자 모두 지고무상한 영광이다! 나는 마땅히 딸에게 감사해야 한다. 내가 어찌 자신의 수련 제고를 돕는 좋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수련인 답지 않고 좋고 나쁨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한 후 나는 어느 날 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엄마에 대해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엄마는 너에게 감사해야 한다. 영혼을 위한 이런 닭고기 수프가 없었다면 내 수련이 이렇게 빨리 제고할 수 없었고 심성도 제고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집에 가고 싶지 않고 여기서 계속 심성을 제고해 이런 사람 마음의 집착을 닦아버리고 싶다. 앞으로도 엄마가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계속 지적해 주면 좋겠다. 괜찮지?”
딸이 듣고는 기쁘게 웃었다.
육체적인 고통, 특히 병업가상(病業假象)을 없앨 때의 고통 속에서 나는 이렇게 대했는데 고통을 성장을 위한 좋은 일로 간주했다. 그런 다음 즉시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으로 찾아 내게 존재하는 집착심을 찾은 다음 발정념으로 그것을 소멸시켰다. 때로는 아주 빨리 지나갈 수 있었지만 때로는 병업가상이 지속된 시간이 길어지거나 때로는 또 반복해서 존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육체에 주는 상처가 아주 큰 것이다.
예를 들어, 내게는 장기간 제거할 수 없는 병업가상이 있었는데, 바로 수련 전 출산 직후 산후풍으로 발뒤꿈치를 땅에 닿을 수 없었고 땅에 닿기만 하면 아팠다. 수련 후 좋아졌다. 그러나 10년 수련 후 이 병의 뿌리가 다시 나타났는데 특히 제2장 공법을 연마할 때 통증이 특히 심했다. 때로는 정말 이를 악물어야 참을 수 있었다. 사실 이런 병업가상에 대해 나는 또 안으로 찾았는데 딸에 대한 정을 내려놓지 못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딸에 대한 정을 철저히 닦아버리지 않으면 이런 병업가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날마다 안으로 찾아 자신을 닦으며 또한 그 생명과 소통했고, 또 딸에 대한 정을 가급적 빨리 닦아버려 이런 육체적 고통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현상은 내 심성이 제고되는 가운데 사라질 것이라 여겼다. 나는 자신을 믿고 대법의 위력을 믿었으며, 마음을 고요히 해 법을 공부하고 자신을 찾고 자신을 닦으며 이 생명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그것이 내 발뒤꿈치에서 감당한 고통은 나보다 더 오래되었을지 모른다. 최근 십 년간 그것이 확실히 생겨났고 내 심성을 제고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나는 이 생명에게 몹시 고맙고 서로 빚진 것이 없다면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오직 만나기만 했다면 그럼 바로 연분이니 만약 내가 그것에게 빚이 없다면 그것도 내 발바닥에서 삼십여 년을 머물며 떠나길 거부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 생명에게 경건하게 말했다.
“너는 그동안 고생이 많았고 네게 고맙다.”
나는 그것이 언젠가 대법제자의 자비에 감동해 내 공간장을 떠날 것이라 믿는다. 그것에게도 분명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작은 깨달음이니 법에 없는 곳이 있다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4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