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真修)
【정견망】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근본적으로 믿고 진정하게 깨달아 끝까지 견정(堅定)하게 수련할 수 있는지 여부는 수련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고험이다. 이는 우리 대법 수련 특유의 것이 아니라 모든 법문(法門)에서 사람마다 수련하면서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다. 근본적인 고험은 수련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 과정을 관통하기에, 만약 근본적으로 견정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내가 깨달은 것은 장차 미래 신우주(新宇宙)의 왕이 될 대법제자들은 심성 요구가 아주 엄격하고 특히 신사신법(信師信法)은 반드시 절대적으로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 정법(正法) 중에서 사부님께서는 사람 몸과 사람의 행동을 지니시고 제자를 고험하신다. 구세력 역시 수시로 각종 어지러운 현상을 만들어 모래를 인다. 조종당한 나쁜 사람은 진상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이 더 어지러울수록 구세력의 최후 광기가 도래할 때가 되었음을 설명한다.
1. 역사적인 증거
수련에 대한 견정함을 서방에서는 ‘믿음(信)’이라 하고 동방에서는 ‘깨달음(悟)’이라 한다.
예수가 도(道)를 얻기 전에 사탄은 성전 꼭대기에 서서 예수에게 말했다.
“네가 만약 신(神)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으리니, 경에 이르길 주께서 사자들에게 명해 너를 보호해 그들이 손으로 너를 붙잡아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탄에게 말했다.
“경에서 말씀하시길 네 주를 시험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사탄이 예수를 떠났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법을 전할 때, 그의 사촌 형인 데바닷다는 학문이 넓고 신통력이 뛰어나며 용모가 단정해서 스스로 대사(大師)라 칭하고, 한때 제자 오백 명을 이끌고 승단을 이탈한 적이 있다. 또한 석가모니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승려들이 있어서 낮에는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해서 법을 듣다 밤이면 의심이 들어 스스로 가사를 벗고 도망가곤 했다.
노자가 도를 전할 때에도 백가쟁명이 있었기에 그는 《도덕경》에 “도는 도로되, 일반 도가 아니로다(道可
道, 非常道)”, “웃지 않으면 도라 하기에 부족하다”, “끝을 처음처럼 신중히 하면 실패할 일이 없다”고 했다.
2. 정법은 전례가 없는 은사(恩賜)
정법 속의 구도는 역사상 신(神)이 사람을 구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구우주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천체 중생들은 성주괴멸(成住壞滅) 말후(末候)에 모두 마땅히 멸(滅)을 향해 가야 한다. 중생에게 한 차례 남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바로 정법이다. 만약 대법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원래 1999년에 인류 종말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우주 밖 창세주(創世主)께서는 중생이 구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개창하셨다. 정법 중에서 모든 것은 다 창세주의 은사(恩賜)이며, 여기에는 ‘받을 자격’이나 ‘흥정’이란 개념조차 없다. 일체 경계(境界)를 초월한 전례 없는 창세주의 자비와 호탕한 홍은(洪恩) 앞에서 중생은 오직 은혜에 무한히 감사하고 동화를 소중히 여길 몫 밖에는 없다.
3. 진금(真金)과 모래
대법제자들은 속인에서 시작해 수련 중에서 심성과 과위·층차를 제고해 끊임없이 법에 동화해 최후에 공성원만(功成圓滿)하는데 비유하자면 대법이 모래를 금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대법이 모래를 금으로 바꾸는 데 무슨 어려움은 없지만, 어려움은 대법을 배우는 사람이 법에 대조해 진정으로 착실히 수련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각종 난관(難關)에 직면해 근본적으로 믿고 깨닫고 견정할 수 있는 지에 있다. 견정하게 수련하고 안으로 찾을 때면 대법은 곧 그 생명의 본질을 개변해 견정하게 조금씩 개변시켜 최후 원만할 때는 순금(純金)·진금(真金)으로 바뀐다. ‘진금’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사부님께서 만들어 은사(恩賜 은혜로 주신)하신 것이다.
내가 명혜망 1999년 문장에서 보니 당시 사부님께서 계시지 않고 신경문도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법난(法難)이 닥쳤을 때 많은 동수들이 다 아주 잘 깨닫고 해냈으며 걸어 나와 법을 수호하는 동시에 자신을 잘 수련했다. 또 지난 2년 간의 역병 기간에도 어떤 동수는 가족을 차례로 잃었지만 여전히 “대법을 수련해서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또 어떤 이는 사악한 당의 “이름을 지워주겠다”는 유혹에 맞서 “설령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나는 전화(轉化)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모두 진정으로 수련하고 착실히 수련한 표현으로, 법을 많이 배워 법이 마음속에 들어가서 대법이 일체 집착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믿지 않고, 법에서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이런저런 인식이 옳다고 여기고 수련하지 않는 이가 바로 모래다. 예를 들어 무한 폐렴으로 중국에서 4억 명이 사망했는데 어떤 수련생은 이 한 구절 말에서 사부님을 믿지 않았는데 근본적으로 그 속에 고험이 있음을 몰랐다. 또 어떤 이들은 SNS에 “이 몇 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은 봤지만 원만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라는 말을 퍼뜨렸다. 어떤 이는 사부님께서 마땅히 어떻게 하셨어야 한다고 망상하면서 자신이 보고 아는 자그마한 것을 정법의 전체 진상이라 여겼는데 이는 정말로 하늘 높고 땅 두터운지 모르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정법이 결속될 시간을 연장한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수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법 자체도 정법 중의 실제 상황에 따라 결정되며 정법의 안배와 과정은 모두 고정 불변된 것이 아님을 망각했다.
4. 법을 떠난 사람들의 주장은 수련과 전혀 관련이 없다
수련의 각도에서 볼 때, 최근 SNS와 인터넷을 통해 불만을 터뜨리고 사부님과 법을 비방한 사람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그(그녀)들은 진정으로 착실히 수련한 것이 아니라 속인의 기점에 서서 대법 수련 중에서 나타난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말해도 아무 쓸모가 없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나와도 소용이 없는데 단지 가련하고 가소로운 것으로 무지하게 죄를 짓고 훼멸을 선택한 것일 뿐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법정인간 시기가 되면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낼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한때 진수(真修)했지만 중간에 진수가 아니고 불신(不信)으로 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진법(真法)이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도태되거나 다른 번거로운 일에 부딪힐 것이다. 애석하지만 이 역시 자신의 책임이다. 온몸이 업력에 포위되어 우주 특성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더욱 깨달을 수 없는데 도리어 이 1억 명의 사람들이 다 바보라 생각하고, 사악의 교란하에 각종 기괴한 사상과 주장이 다 나와 심지어 속인만도 못하다. 대법을 ‘이념’으로 여기고 사람 마음으로 법을 대했기 때문인데 그럼 법이 그에게 현현되고 감수하는 것 역시 단지 사람 이 층의 이념에 불과할 뿐이다.
이에 휩쓸린 예전 동수들 중 만약 아직 수련의 기회가 있다면, 법을 많이 배워 자신의 본성을 찾아 불만과 인터넷에서 본 것들을 제거하고 사실을 명확히 해서 대법 수련 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정념이 충족하면 구세력을 부정할 수 있고 진수(真修)하고 착실히 수련하면 무엇이든 다 명백해질 것이다.
5. 보거나 받아들이면 사악의 교란을 초래할 수 있어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의 몸에 정말로 어떤 것이 있으면 매우 나쁘므로 가장 좋기는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한 수련생이 기공서를 펼치자마자 그 속에서 한 마리 큰 뱀이 뛰쳐나왔다.”
사부님께서는 또 신경문 《대법수련은 엄숙한 것이다》에서 마귀가 부체(附體)된 그런 사람을 명확히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보거나 받아들인 수련생은 사령이 부체된 것이 아닌가?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신(神)을 청하기는 쉽지만 보내기란 어렵다. 구세력이 구실을 잡으면 내려놓지 않고 전력을 다해 밖으로 밀고 아래로 끌어내릴 텐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얼마나 큰 결심과 얼마나 많은 간고한 수련을 거쳐야만 모든 패물(敗物)을 배출할 수 있고 집착을 깨끗이 제거하고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매우 불필요하다.
이외에 보고 들을 때 당신은 이미 그들을 믿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왜 보는가? 자신이 법에서 다진 기초가 인위적으로 커진 마난을 지나갈 수 있단 말인가? 법과 중생 구도를 파괴한 일체 직간접적인 후과(後果)는 장차 다 책임져야 한다! 대법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 여전히 대법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수련할 기연이 있는지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한번 잃으면 영원히 잃는 것이다.
6. 안으로 찾아 집착을 제거
대법제자로서 당신은 마땅히 가장 먼저 법을 수호해야 하며, 이러한 것들을 보거나 전하지 말아, 구세력이 파괴를 가중시킬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단계에 이런 혼란한 상황이 나타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며, 구세력이 정법의 최후에 그것을 이용해 진수하지 않는 수련생들을 찾아내 걸러내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사람 마음을 겨냥한 것인가?
내가 발견한 것은, 예전에 내가 보고 싶었던 원인을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동수에게 불만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불만은 법에 부합하지 않는다! 심지어 또 사부님을 믿지 못하는 요소가 있었는데 이는 이전에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 마음을 닦아버린 후 나의 내심은 평온해졌고 더는 호기심이 생기거나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사부님과 대법을 더욱 믿게 되었다. 나는 이런 혼란한 상황이 갈수록 내게서 멀어졌고 더는 나를 교란할 수 없음을 느꼈다.
사실 자신의 심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 어떤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달려 있다. 많은 동수들이 검은 소굴에서나, 유리실소(流離失所)하거나, 온갖 박해 속에서도 늘 허허 웃을 수 있지만, 때로는 자신이 무슨 큰 고통을 받은 것도 아닌데 오히려 화를 내며 불평한다. 이는 모두 자신의 속인 마음이 시킨 것이 아닌가? 수련 중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으면 다 좋은 일이 아닌가? 이는 법(法)에 대해 견정한지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또 있는데 자신이 다년간 법을 실증하면서 위덕(威德)을 수립했기 때문에 이에 “탄탄하다”고 느낀 것이다. 이는 이전의 자신과 우주 중에서 일반적인 생명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일체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사부님과 대법 앞에서는 영원히 늘 아득히 작은 생명에 불과할 뿐이다. “대법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법이 만든 중생”일 뿐이며 “오만방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이성적이고 겸허해야 한다.” 장차 정말 원만하더라도 아마 법을 전부 알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과 사부님 및 대법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면 수많은 교란 요소들이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대법제자들이 법을 얻은 초기를 되돌아보면, 사부님께서는 이 체계적인 우주 대법을 우리에게 전해주셨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많은 업(業)을 없애주셨으며, 우리에게 명(命)을 돌려주셨고, 일세(一世)에 수련 성취할 수 있게 해주셨으며, 소중하고 비할 수 없는 파룬(法輪)과 완전한 수련 계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우리가 직접 고층차에서 수련할 수 있게 해주셨다……. 이후 수련 과정에서도 늘 우리를 보호해 주셨고, 잘하면 우리를 격려하셨고 잘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점화해 주셨다. 큰 죄를 저질러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여전히 한 가닥 희망의 기회를 주셨으며 온갖 방법을 생각해 우리더러 깨닫게 하셨다.
우주가 개벽(開闢)된 이래 이렇게 사람을 구한 적은 없었다! 사실 사부님의 많은 일이 다 파격적인 것인데 그럼에도 잘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의 책임이 아닌가? 쟁투심, 안일심, 의심을 품고 어찌 이렇게 신성(神性)한 구도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한번은 어떤 일을 이해하지 못해 원망심이 올라왔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이날 비몽사몽간에 입으로 반복해서 한마디 말을 했다.
“나 때문에 사부님께 걱정을 끼쳐 드려선 안 된다, 사부님께 걱정을 끼쳐 드려선 안 된다.”
그러다 곧 깨어났다. 그렇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시며 오직 우리가 구도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니 창세주의 사랑을 받음은 얼마나 행복한가! 늘 쇠뿔을 파고들며 자신을 느슨히 하고 사부님께서 나 대신 감당하시게 한다면 이는 죄가 아닌가? 마땅히 자신을 잘 수련해 사부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이 제자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7. 처음처럼 수련하기 어려워
속인들은 흔히 “매사에 처음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련의 이치는 반대이기에 “매사에 처음은 쉽지만”, 처음처럼 수련하고 끝까지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 과거에 위로 수련하면서 매 층차마다 한 무리 사람들이 떨어져 내려갔고 최후에는 소수만이 원만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나한으로 수련 성취한 사람이 최후 시각에 집착심이 생겨 두 차례나 떨어져 내려가 수련이 헛되이 된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 대법 수련은 더욱 간고하고 엄숙한 것으로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걷지 않으면 일정한 시기에 아마 장애에 부딪혀 지나가지 못할 수 있으며 이전까지 견정하고 흔들리지 않던 정념(正念)도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때 아무리 여러 해 수련했어도 모두 떨어져 내려가 이전까지의 공이 수포로 될 수 있는데 심지어 자심생마(自心生魔)해서 반면으로 나아가 법을 파괴해 철저히 소각될 수도 있다.
구세력의 광풍과 큰 파도의 도태 및 어디든 파고 들어가는 험악함 속에서 진수(真修)하지 않는 모래는 조만간 다 각종 형식으로 걸러질 것이며 광풍과 큰 파도에 휩쓸려가는 것은 풍랑이 거세기 때문이 아니고, 함정에 빠지는 자체는 함정이 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을 고수해 자신이 믿고 깨닫고 견정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흔히 다 어느 방면에서 장기간 수련하지 않고 마음이 바르지 않아 조성된 것이다. 확실한 것은 위험과 교훈은 우리가 마땅히 아주 청성해져 안으로 찾을 수 있게 한다. 진수하고 착실히 수련하는 이는 단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작은 깨달음으로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