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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라는 강력한 저애에 대한 깨달음

문정(文定)

【정견망】

수많은 집착심들의 근원은 다 자아(自我)에 집착해 자신이 상처받지 않고 고생을 겪지 않으려고 보호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때로 어느 동수의 행동이 생각나면 이 문제의 표면 층차는 비록 이미 여러 번 청리(淸理) 했음에도 여전히 마음속에 부면(負面) 정서가 남아있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자아를 강력하게 보호하려고 동수를 관용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비록 표면적으로 나는 많은 쟁투심이나 분노 등을 제거했지만, 진정으로 깊이 파보면 나는 여전히 자아 보호란 외각(外殼 겉껍질) 아래에 있기에 이런 집착을 철저히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자아를 보호하는 기제, 즉 침범당하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는 것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위사(爲私)하고 위기(爲己)적인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다행히 지금 나는 이 문제를 중시하기 시작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물질이 계속 쌓이기만 할 것이다.

수련에서 어려운 점은 집착심인데 왜 제거하기 어려운가? 때로는 마치 부추를 자르는 것처럼 뿌리는 늘 거기에 있다. 이는 무의식적인 도피 및 자아 보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은 늘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고통은 바로 그런 마음이 폭로되어 나올 때이다.

한번은 동수가 나를 아주 심하게 비판했고 나는 자신에게 쟁투심과 분노가 있음을 알았지만 이것은 단지 표면뿐이다. 나중에야 나는 명백해졌는데 사실 자아가 비판받지 않으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넘길 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더는 그와 충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고 이것은 바로 자아 보호에서 나온 염두다. 이런 염두는 ‘내(我)’가 아니지만 과거의 나는 비록 일부 집착심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이렇게 강대한 자아를 의식하지 못했다.

이 자아는 줄곧 진정한 근원을 감추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통제하고 있었다. 내가 주의식을 청성(淸醒)하게 유지해 자신을 연공인(煉功人)으로 간주하지 못할 대면 그것은 나를 안일하게 하고, 스스로 세 가지 일을 다 했다고 여기게 만든다. 하지만 만약 안으로 깊이 찾지 못한다면 곧 출발점이 여전히 위사(爲私)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령 위덕(威德)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등. 이것이 바로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실증으로 변한 것으로, 위사(爲私)한 것이지 위공(爲公)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주의식이 청성해질 수 있는가? 다른 공간에서는 일체가 다 생명이 있다. 간단히 말해, 당신이 집착심에 통제당하지 않을 때가 바로 당신의 주의식이 청성한 것이다. 관건은 통제당할 때 어떻게 그것을 벗어날 것인가다. 자신에게 여러 번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잘하려고 하는가? 나는 수련하려고 하는가? 나는 진수(真修)제자인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함으로써 그 진아(真我)를 끌어내고, 수련하려 하고 일을 잘하려 하는 자신을 끌어내야 한다. 일체는 다 생명이기 때문에 통제당할 때면 우리는 벗어나기가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생명들을 이미 자신으로 간주하고 자신이 바로 그렇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두 달간 어떤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고 후속 영향이 아주 컸다. 당시 정말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압력이 대단히 커서, 마치 진짜 칼과 총을 들고 전투하는 것처럼 퇴로가 없었고 언제든 수시로 머리로 칼이 날아들 것 같았다. 나는 종종 두려웠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집착심 또는 두려운 마음을 단호하게 제거하면서 안으로 찾으려 노력할 수 있었다. 그러자 주의식이 상대적으로 더 청성해졌고 집착심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나타나 제거하자면 쉽게 제거할 수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살면서 그렇게 큰 충격은 그리 많지 않으며 아무도 당신더러 조심하라며 날마다 당신을 일깨워주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정신과 의사가 되어 “전기봉”으로 스스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그때 그의 主元神(주왠선)이 정신을 차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서 나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집착심이 우리 앞에 올 때 때로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오직 진정으로 당신의 심령(心靈)을 건드릴 때만 비로소 진감(震撼 떨림)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그러나 흔히 모순이 생길 때, 사람의 심령(心靈)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쓸모없으며 제고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왜 멀게 느껴지는가? 나는 일종 상황을 회피하려는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에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고달프게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사람은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고난에 대항하는데, 목적은 좀 행복하게 살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중에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피해(傷害)를 받지 않고 어떻게 잘 살며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공명을 성취하며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얻고 어떻게 강자가 되겠는가 하는 등등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려 한다. 모순에 직면했을 때, 그 고통은 직접 마음을 때리지는 않는다. 마치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팔을 휘두르기 시작하여 피를 모두 거꾸로 흐르게 하는데, 팔ㆍ손이 부풀어 오른다. 실제로는 부어오른 것이다. 그런 다음 그가 돌에 대고 치면 뼈가 감싸져서 직접 돌에 부딪치지 않으므로 그래도 그렇게 아프지 않다.”

그 강대한 자아는 아주 큰 하나의 집착심인데, 그것이 줄곧 당신더러 팔을 휘두르게 해서 당신이 아프지 않게 하고 당신 자신이 아주 노력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는 여전히 통제된 것으로, 집착이란 생명에게 통제당해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부추를 자르는 것처럼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고 그저 표면 집착심만 제거하고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북미 제1기 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당신 자신의 그 가장 본질적인 이익을 다른 사람이 해치지 못하도록 고수하고 있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바 그것은 가짜 수련이다! 당신 자신의 내심을 움직이지 않으면 당신은 한 발자국도 제고할 수 없는바,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수련[真修]인지 가짜 수련[假修]인지 자신이 구분해야 하며, 주의식이 청성한가 여부도 자신이 구분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미국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수련은 필연적으로 이 진진가가(真真假假) 중에서 당신을 검증하며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본다. 당신이 당신을 수련하는 사람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자신을 평범하고도 평범한 속인으로 여기는지. 이는 이 사람이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내가 깊이 체험한 것은 과거의 수련은 단지 표면만 닦았을 뿐 저 강대한 자아는 줄곧 누락되어 있었다. 비록 나는 늘 주의식이 청성해야 한다고 중시했지만 그러나 관(關)을 넘길 때 일단 큰 고통을 느끼면 여전히 자아(自我)에 가로막혔다. 작은 고통은 참을 수 있었지만 큰 고통은 바로 피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수많은 기회를 놓쳐버렸고, 잠시 좀 완화되면 다시 관을 넘었지만 집착심을 더욱 멀리 밀어 버렸다. 힘껏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여 맞아도 아프지 않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아프지 않으면 어떻게 아픈 곳(痛點)을 찾아내고, 어떻게 집착심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가장 회피하려 하는 것은 고통인바 이것이 바로 자아를 보호하는 강대한 기제다. 이 점을 돌파하려면 오직 청성하게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주의식과 분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 하나의 사유(思惟)와 염두(念頭)를 주의해야만 비로소 집착이나 사람의 관념 및 다른 공간 요소의 교란을 피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