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생
【정견망】
법 공부는 형식에 흘러선 안 되며 반드시 법의 내함(內涵 안에 담긴 함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법을 공부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마음 닦음[修心]이 따라가야 한다. 마음 닦음이 따라가지 못하면 승화해 올라갈 수 없으니 여전히 법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왕에 법을 공부했다면 또 마음을 닦아야 하고 마음 닦음을 법 공부 속에 녹여내야만 비로소 진정하게 법을 공부했다 할 수 있다.
수련이란 안으로 마음을 닦음이 관건이다. 내함을 보았다면 법에 따라서 해야 한다. 해냈다면 곧 제고이고 심성이 일단 제고되면 반대로 법을 배울 수 있다. 법을 공부하고 또 법에 따라서 하면 변화가 곧 크고 제고도 빠르다. 배움 속에 닦음이 있고 닦음 속에 배움이 있어 법에서 혼연일체(渾然一體)를 형성한다. 자신이 시종 이런 양성 순환에 있을 수 있다면 바로 끊임없는 정진(精進) 속에 있는 것이다. 동시에 또 사람 구하는 일을 잘해야 하는데 그럼 장시간 한 층차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수하신 이 한 세트의 공법(功法)은 속인 사회 환경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므로 최대한도로 속인 사회 상태에 부합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는 속인 중에서 표현이 비정상적이어선 안 된다. 속인 상태에 부합하는 관건은 바로 수련을 위한 부합(符合)이라, 속인은 보아낼 수 없다. 왜냐하면 속인은 사람의 기점에 서 있고 미혹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합을 혼동해선 안 되는데, 단지 마음만 다른 게 아니라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다 다른 것으로 모두 법의 함의를 부여해야 한다. 단지 마음만이 아니다. 속인의 업무와 학습은 위사위아(爲私爲我)한 것이지만 우리의 업무는 완전히 속인 속에서 수련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속인이 밥을 먹는 것은 집착이지만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수련을 위해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속인 중에서 수련하는 것을 표면에서 보면 속인과 무슨 구별이 없지만 실질은 속인의 모든 것과는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정념(正念)에 의지해 속인 중에서 유지하고, 정념을 사용해 속인의 이 층 법(法)을 원용(圓容)하고 있다. 부합의 진정한 함의는 바로 정념이다. 이는 곧 우리더러 시시각각 혼동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데 혼동하면 곧 속인이다! 그러면 수련이 아니고 부합의 진정한 의미를 잃는다.
정으로 법을 이해하는 것과 절반만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바로 진정으로 법을 이해하는 것은 다시 속인과 혼동하기 아주 어렵지만 절반만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말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는 이미 속인과 혼동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법에 있다고 말하며, 속인 이 층의 법을 원용한다고 말하는데 수련하려면 곧 반드시 어려워진다.
법 공부는 기왕 표면적인 이치를 똑똑히 이해해야 하며 더욱이 배후의 내함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양자 모두 없어선 안 된다) 이렇게 하자면 우리는 반드시 순정(純淨)한 심태로 법을 공부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법이 순정하기 때문이다. 오직 순정한 마음이 있어야만 법이 비로소 펼쳐질 수 있고, 비로소 진정으로 도(道)를 깨달을 수 있다. 동시에 수련도 따라갈 수 있다. 법 공부는 사실 어떤 형식을 채용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법을 공부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형식을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다.
온갖 어지러운 현상이 난무하는 지금 세상에서 법을 잘 공부하는 것은 가장 관건이고 가장 관건적이다. 이치를 완전히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도(道)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주차(主次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를 똑똑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정법(正法)과 법(法)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순정한 심태로 여유 있게 십악독세(十惡毒世)한 오늘날을 마주할 수 있다.
특히 지금 바닥이라곤 없는 사악한 당의 잔혹한 박해로 도처에 다 부면(負面) 요소로 가득 차 있고, 도처에 다 유혹이 가득 차 있다. 여기에 파란을 부추기는 배후의 사악한 요소가 더해져 많은 세인들이 이미 더는 나빠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수련하면서 이끌리지 않기란 아주 어렵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늘 일종 강대한 정념을 유지하며 이 일체를 대해야만 가능할 뿐이다! 동시에 우리는 또 이런 엄혹한 환경 속에서, 미혹 속에서, 완전히 사람에서 걸어 나와야 하며 또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 등등. 대법제자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고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것은 대법이란 이 길뿐이다.
사부님께서는 《다시 방할하노라》에서 “당신들의 매 순간은 모두 수련의 길 위에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매 순간[每一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 순간 늘 법에 있어야 한다. 단지 모순이 나타나거나 문제가 발생해야만 관을 넘는 것이 아니다. 평소의 매 일 분 매 일 초도 늘 관(關)을 돌파하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모두 닦는 문제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마음이 법에 있다면 어디를 가든 수련이 아닌 곳이 없다. 우리는 오직 노력해서 꾸준히 법을 공부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착실한 수련이다! 이렇게 해야만 사람에서 완전히 걸어 나와 신(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