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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서는 왜 ‘병’이란 글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실까

소원(蘇元)

【정견망】

나는 1996년 초에 법을 얻은 제자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직접 학습반을 꾸리는 것을 중단하셨다. 나는 처음 《전법륜》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는 나를 찾아 병을 치료해 달라고 하지 말라. 나는 역시 병을 치료하지 않으며, 당신이 ‘병’이란 이 글자를 꺼내기만 해도 나는 듣고 싶지 않다.”는 법을 보았다.

나는 “사부님께서는 왜 우리가 ’병‘이란 이 글자를 꺼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실까? ’병‘이란 신체에 비정상적인 상태가 나타났을 때 속인이 사용하는 언어 표현이니 우리 수련인들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소업(消業)’이란 이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이 ‘병’에 대한 무서운 기억은 우리의 사유 속에 깊이 각인되어 설령 단어를 바꿀지라도 그 소업 과정은 ​​자신도 모르게 여전히 ‘병’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사람의 사유를 사용해 무슨 병이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생각하면서, 또 사람의 방법을 사용해서 추나, 부항, 채혈 및 심지어 각종 약을 복용하는 등 사람의 방법으로 병을 치료한다.

나중에야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그저 글자를 다른 단어로 바꾸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며, 이 두 개념이 모두 우리 신체의 부정확한 상태를 가리키긴 하지만, 그 안에 포함된 전반적인 사유 체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안에서 밖까지 모두 철저히 전환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인이 생각하는 ‘병’이란 단지 육신(肉身)을 겨냥한 것으로 어느 부분이 불편한지, 어느 기관에 문제가 있는지, 어느 계통이 균형을 잃고 통제되지 않는지 등인데 그저 신체에 나타난 다양한 증상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수련 중의 ‘소업(消業)’은 이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신과 원신 등 생명체로 조합되는데, 원신은 또 주원신과 부원신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만약 주원신을 ‘나’라고 한다면 육신은 그저 ‘나’의 옷에 불과할 뿐이다. 속인은 흔히 옷(육신)을 ‘나’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속인이 “내가 병에 걸렸다”는 생각은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단지 “내 옷이 더럽거나 낡거나 나빠지거나 찢어진 등등”으로 빨래와 수선이 필요할 뿐이다.

또한 속인의 병 치료는 단지 자신의 병이 있는 부분만 겨냥할 뿐이다. 수련인은 육신은 ‘나’와 실질적인 관계가 없다고 본다. 신체적인 질병 역시 신체 자체에서 조성된 것이 아니라, 대뇌 사유 속에 존재하는 우주 법칙과 어긋난 병인(病因) 때문이니, 이야말로 철저히 청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신체적인 불편함은 ‘내’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며, 이 ‘병’은 또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이는 사람 육신의 욕망이 이기적인 관념을 형성한 후, 신체에 대한 주원신의 주재권을 탈취해 조성된 것이다. 때문에 관념(觀念)이야말로 이 병의 근본 원인이다.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자기 신체의 불편함, 그것은 모종의 잘못된 관념의 주도하에 자신이 도덕에 어긋나는 나쁜일을 저질러 생긴 흑색물질 즉 업력 때문임을 일깨워주는데, 시간이 오래되어, 업력이 많이 쌓이면, 그것이 곧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 그러면 곧 우리 신체에 이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 신체에 문제가 나타났을 때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안으로 찾고, 업력을 조성한 그 근원을 찾아내며, 자신의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집착심을 찾으라고 하셨다. 우리의 주원신이 제자리로 돌아와, 강대한 정념을 발해 그런 집착심을 깨끗이 제거하고 잘못된 관념을 전변해 우주 특성에 동화하면, 우리 신체의 증상이 사라지는 것으로 반영된다. 그러므로 ‘병’과 소업은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다.

소업에는 또 우리가 여러 번의 생과 세에 걸쳐 쌓아온 원망, 미움, 정(情), 원한도 포함되는데, 이들도 선해(善解)하거나 청산할 필요가 있다. 신체적인 불편함이나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순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 신체를 청리하신 후 우리가 반드시 감당하도록 남겨놓으신 그 부분이다. 우리가 만약 심성을 제고해서 그 층차에서 마땅히 내려놓아야 할 집착심을 내려놓으면, 모두 사부님의 가지와 보호 속에서 재앙과 은원(恩怨)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속인으로서는 이해할 방법이 없는 깊은 함의가 있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法輪大法(파룬따파)를 연마(煉)하는 사람은, 당신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현재부터 시작하여 모두 반응이 있다. 내려놓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그가 입으로는 내려놓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전혀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해주기가 아주 어렵다.”(《전법륜》)

이런 이치를 우리는 다 똑똑히 알고 있는데 왜 관건적인 순간에 여전히 해내지 못하는가? 그것은 바로 마땅히 내려놓아야 할 것을 여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듣기 싫어하시는 ‘병(病)’이란 글자를 비록 입에 올리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여전히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병업(病業)문제에서 백분의 백 신사신법(信師信法)하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

작은 인식이니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3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