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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구조”에 대한 작은 깨달음

심청(心清)

【정견망】

동수 B는 다년간 수련해온 노동수(老同修)임에도 다년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너무 괴로워서 동수 A에게 이 일을 말했다.

A: “당신 자신을 법(法)에 용해시켜 보세요.”

B: “안 돼요, 나는 법에 용해할 수 없어요.”

A: “그럼 사부님께서 쓰신 시 중 어느 한편을 외워 보세요.”

B: “질풍 일고 번개 치듯 하늘 끝까지 오르나니
막을 수 없는 거대한 기세 하늘보다 높구나
거대한 우주를 휩쓸어 닿지 않는 곳 없나니
부패한 자와 귀신을 한꺼번에 제거하네”(《홍음 4》〈정념〉)

A: “당신 자신을 이 법(法) 속에 용해시켜 보세요.”

B: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동수 A가 한 구절 한 구절 법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말했다.

“무엇이 ‘질풍 일고 번개 치듯’일까요? 사전에서 표면적 의미를 찾아서 한번 이해해 보세요. 당신은 ‘하늘 끝까지 올라(上九霄)’가 본 적이 있나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기세’는 정념의 위력이 이렇게 강하다는 것인데 당신은 시도해 본 적이 있나요? ‘거대한 우주를 휩쓸어’에서 당신은 거대한 우주(穹宇)를 휩쓸어 본 적이 있나요? 이렇게 강력한 정념이라면 ‘부패한 자와 귀신’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요? 나쁜 것들이 당신의 공간장에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동수 B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은 지금껏 감히 이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며, 진정으로 법에 용해된 적이 없고, 대법의 내함(內涵)을 진정으로 이해한 적도 없음을 느꼈다.

동수 A는 동수 B에게 다른 시를 한번 외워보라고 했다. B가 외우지 못하자 동수 A가 직접 한 수를 외웠다.

“대법이 몸을 떠나지 않으니
마음에 真善忍(쩐싼런) 있네
세간의 대나한(大羅漢)
신도 귀신도 몹시 두려워하네”(《홍음》〈위덕〉)

A: “대법이 몸을 떠나지 않으니”라고 하셨는데 당신은 머릿속에서 늘 대법을 생각하나요?

B: 밤에 잠자리에 들면 머리가 텅 비어 아무 법도 생각나지 않아요. 이것도 아주 괜찮다고 생각해요. 공(空)이잖아요! 무(無)가 아닌가요!

A: “우리 대법 수련은 이런 식의 공이나 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법(法)이 있어야 하고 법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법이 없어선 안 되며 대법마저 없다면 그럼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는 과거 수련의 것이 아닙니까? 이는 선종(禪宗)의 이치가 아닙니까?”

B는 이 말을 듣고 〈위덕〉이란 이 시의 법리로 가늠해 보니 자신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았고 대법에 부합하지 않았다.

B는 동수 A가 어떻게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지 듣고 나서 자신의 부족을 찾았고 동수 A의 교류가 자신이 귀감으로 삼을 가치가 있으며, 자신이 마땅히 어떻게 법과 연계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동수 B는 잠들기 전에 어떻게 자신을 법에 용해시킬지 생각했다.

“〈정념〉이란 이 시와 비교하면 나는 하늘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 나는 반드시 하늘 끝까지 올라갈 것이다! 나는 하늘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나도 거대한 우주를 휩쓸어야 한다!’

그녀는 계속 이런 생각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우리 자신이 법속에 용해되자 법의 신기(神奇)가 펼쳐진 것이다.

동수 B는 자신이 수련 중에서 겪은 마난을 동수 A와 교류하고 자신의 부족을 찾아냈고, A가 법을 실증한 심득을 거울로 삼아 법과 연계시켜 대법을 실증하는 가운데 겁난을 지나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법제자 상호간의 교류는 아주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제자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이런 수련 방법을 남겨주신 이유는 우리가 법에서 법에 대한 상호 인식을 교류함으로써 법에 대한 이해를 깊어지게 하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원용하면서, “서로 구조”(《험악을 멀리하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정체제고 정체승화”(《전법륜》)를 더 잘할 수 있다.

대법제자의 이런 수련방법은 과거 그 어떤 수련방법과도 다 다르다. 과거의 수련인들은 교류를 말하지 않았고 자신이 깨달아야 했다. 깨달을 수 있으면 깨닫고, 깨달을 수 없으면 방법이 없었다. 만약 남이 깨달은 이치를 알고 싶다면 (뭔가) 교환해야 했다. 과거의 수련방법은 오직 개인수련으로, 다만 자기 수련만 책임지고, 다만 자신의 원만여부만 책임지며, 남을 상관하지 않았다. 이는 위사(爲私)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필연코 높이 수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법제자들은 이렇게 수련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셨다.

“당신들은 동문제자(同門弟子)이며, 여러분은 모두 우주의 정법을 위해 온갖 마음과 힘을 쏟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잘 협력해야 하고, 도를 넘는 속인의 마음으로 문제를 보지 말아야 하며, 서로 간에 속인의 마음을 지니고 일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모순과 논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일은 모두 반드시 대법제자로서 관용(寬容)ㆍ선량(善良)ㆍ상화(祥和)한 표현이 있어야 하고, 그의 일이 바로 당신의 일이며, 당신의 일이 바로 그의 일이다.”(《각지 설법 2》〈2002년 워싱턴 DC 법회 설법〉)

우리 대법제자는 정체이고 우리는 서로 간에 늘 아무런 대가 없이 감당하고 교환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며 대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법을 실증하는지, 어떻게 서로 협력해 중생을 구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지 서로 토론하고 함께 법에서 인식해야 한다.

어떤 개별적인 수련생은 다른 동수의 교류를 듣고 그를 따라갈까 걱정하는데, 이는 모두 과거 수련의 이치다. 우리의 상호 교류는 법에서 말하는 것으로,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며, 모두 다 대법에 동화하는 것이다. 대법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며 누가 증오(證悟)했다고 해서 그의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아닌데, 대법은 우주대법(宇宙大法)이고 매 대법제자는 모두 동화해야 하며 누가 동화하면 누가 얻는다.

또 어떤 동수들은 교류란 불가능하며 스스로 깨닫거나 또는 사부님의 점화(點化)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소조 법공부에서 모두 함께 한 강의 법을 읽고, 아무것도 교류하지 않고 그냥 법만 읽고 끝낸다. 이것은 선종의 수련을 좀 닮았다. 이런 법 공부는 아마 법에 대해 깊은 이해를 말하거나 대법을 실증하지 못하고 그저 표면으로만 법을 읽을 뿐이다. 사부님께서 선종 등 다른 법문의 수련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은 우리더러 대법수련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감별해 기로(岐路 갈림길)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 대법제자들은 서로 법에서 교류하고, 어떻게 법을 인식하고, 어떻게 대법을 실증하며, 어떻게 중생을 구도하는지 교류하면서, 교류 중에서 동수가 법을 실증한 기적을 통해 우리는 대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법과 연계해 법과 함께 할 수 있으며, 대법의 내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법에서 제고할 수 있다. 동수가 진정으로 제고되는 것은 스스로 법의 내함을 이해하고 법리를 똑똑히 안 것으로 이는 법의 작용이지 교류 자체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좌담회라는 이런 형식으로, 여러분이 서로 연구 토론하고, 서로 담론하며, 서로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할 것을 요구한다.”(《전법륜》)

우리는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수련의 길을 잘 걷고 바르게 걸어야 한다.

대법제자의 수련은 반드시 우주 정법을 마주해야 하고, 전 우주에 눌려 내려온 사악(邪惡)을 마주해야 하기에, 단지 한 사람의 힘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교류하고 서로 구조하며, 무너뜨릴 수 없는 정체를 형성해 중생 구도를 더 잘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3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