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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이 정체된 상태를 타파

일명(佚名 이름을 밝히지 않음)

【정견망】

최근 수련하며 든 생각을 교류해 동수들과 나누며 서로 돕고 서로 닦고자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 동수들을 보면, 많은 때 늘 일종 정체 상태에 빠져 있는데, 대개 수련을 잘해서 사부님이나 동수 또는 속인의 칭찬을 받고 신체의 변화를 느낄 때 등이다. 이때 환희심이 나와 자신을 이 한 층차에 고정시킨다. 이 단계에서 사는 게 아주 바쁘고 또 아주 기쁘다 보니 아마 작은 심성관은 넘길 수 있고 늘 안으로 찾아 넘길 수 있지만 진정한 진보는 마치 더 이상 안으로 찾아내기 어려운 것 같다.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많은 동수들이 마치 사부님께서 전하신 법(法)을 수련하는 게 아니라 유교를 수련하는 것 같다. 유교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일종 정의롭고, 고상하고, 정직하며, 헌신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런 것들이 비록 다 옳고 또 필요하지만 도(道)를 닦고 부처를 수련하는 이치와 비교하면 때로는 차이가 대단히 크다. 전자는 일종 자신을 과시하는 그런 느낌이 있고, 후자는 반대로 세간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활달함이 있다. 내 생각에 공자가 노자에게 도를 물은 내용은 수련인들이 고려할 가치가 있다.

내 느낌에 일부 동수들은 사람이 되는 것을 첫째로 여기고,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두 번째로 여기며, 진정한 수련인이 마땅히 포기해야 할 것은 세 번째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면서 뭔가 나는 아주 정직하다거나 사랑이 크다거나 두려움이 없다거나 아주 선량하다거나 아주 정진한다는 등으로 자처하길 좋아한다. 물론 꼭 단일한 것은 아닌데 사람의 개성은 복잡한 것으로 늘 자신을 모종의 광환(光環) 속에 놓으려는 것 같다.

나는 진정한 자아, 후천적 관념이 없는 자아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러한 관념이나 혹은 사악(邪惡)이 사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A: 아, 그 동수는 왜 이런가.

B: 관두자, 수련인은 안으로 찾아야 한다.

C: 음, 다들 그래도 좋은 동수니까… 등등.

나는 관념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꼭 반드시 진정한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수련은 늘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쉽사리 미혹에 빠져 진정한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1강에서 말씀하셨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신이 꼭 정말로 나쁜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다고 해서 당신이 꼭 정말로 좋은 것도 아니다. 수련자로서, 이 특성에 동화하면 당신은 곧 도(道)를 얻은 사람인데, 바로 이렇게 간단한 이치다.”

내 생각에 머릿속에서 자신이 아닌 대화를 간파하고 배제하는 것은 마치 일종 무위(無爲), 즉 도(道) 속에 있는 것과 유사한 상태다.

머릿속에서는 비록 배제해야 하지만,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여전히 선(善)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자선(慈善)이 나오기만 하면 그의 힘은 끝없으며, 어떤 좋지 않은 요소도 모두 해체할 수 있다. 慈悲(츠뻬이)가 클수록 그 힘은 더욱 크다. 과거 인류사회는 올바른 이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은 선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며, 사람은 여태껏 모두 징벌이라는 수단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사람의 이치가 되었다. 사람이 신(神)이 되고자 한다면 사람의 상태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럼 이런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며, 慈悲(츠뻬이)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각지설법 9》〈2009년 워싱턴DC 법회 설법〉)

나는 자신 및 내가 본 많은 동수들의 선 수련[修善]이 아직 충분하지 못함을 발견했다. 내 생각에 만약 줄곧 내가 아닌 것[非我]을 배제할 수 있고 또 선 수련[修善]을 중시할 수 있다면 다른 공간에서 악을 제거하는 힘도 마땅히 훨씬 커질 것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어떻게 선을 닦았는지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성격이 소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선(善)을 권할 용기는 닦아내지 못했고 늘 집에서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닦은 것이 비교적 많은데 최후에 깨달은 이치는 강한 것을 믿고 약자를 괴롭혀선 안 된다.

자녀가 어릴 때 부모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데, 권력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부패시킬 수 있다. 처음에 나는 별생각 없이 아이를 가르쳤는데, 사실 내가 어렸을 때 받았던 기억에 따라 가르쳤다. 하지만 우리는 마땅히 부모님의 방식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정말로 승화하고 업을 없애는 과정이다.

비록 나 역시 각종 성격적인 약점을 갖고 있지만, 사부님께서는 이 기간에 계속 일깨우고 점화해 주셨다. 아이와의 모순 속에서는 오직 자신을 찾고 자신을 개변해야 한다. 우리와 비하면 아이는 마땅히 우주 특성에 더 가깝기 때문에, 모순이 있을 때 나는 자신이 아이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고쳐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무엇이 불필요한지 똑똑해야 하고 또한 말투도 고치고 방식도 고쳐야 한다.

현재 많은 동수들이 기본적으로 다 세 가지 일에서 진보하고 성취가 있으며, 빛을 내는 상태에 있다. 이때 우리는 환희심이 초래하는 심성이 정체된 상태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내 생각에 만약 신체가 개공개오(開功開悟)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안으로 찾음은 언제든 느슨히 할 수 없다.

동수들과 격려하고자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3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