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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되 다툼이 없다”에 대한 작은 이해

육원(陸遠)

【정견망】

노자(老子)는 “성인의 도란 하되 다툼이 없다.[聖人之道,爲而不爭]”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노자는 세상을 피한 사람으로 인간 세상의 옳고 그름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유명한 구절의 배후에는 오히려 다른 이해가 있다.

하되 다툼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옳다고 여기는 많은 일은 곧 해야 하며 득실(得失 얻음과 잃음)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되 다툼이 없음”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조조와 유비는 모두 중원을 통일하려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둘 다 진정으로 완수하지 못했다. 오히려 천하를 차지한 것은 결국 사마(司馬)씨 가족이었다. 그렇다면 조조와 유비가 한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삼국연의》에서 진정으로 풀어낸 것은 바로 한 글자 ‘의(義)’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왜 유비 진영을 주선(主線)으로 삼는가 하는 원인이다.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는 물론 조운(趙雲 자룡) 모두 의박운천(義薄雲天 의리가 하늘에 닿을 듯 드높다)의 인물들이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의 역사에 진정으로 신전문화(神傳文化 신이 전한 문화)를 개창해 주었다. 즉, 이들의 이런 연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것이다.

또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는 단지 유방의 조역에 불과했다. 그가 만약 최후 결과를 알았다면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역사상 모든 문화는 다 오늘날 정법(正法)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최종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문화를 세운 것이다. 때문에 많은 경우 우리는 가급적 득실을 생각하지 말고 해야 한다. 최종 결과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법 사부님은 《홍음》〈도 중에서〉에서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 늘 도(道) 중에 있도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흔히 다 집착이 있는 것으로 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늘 결과를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3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