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금련(金蓮)
【정견망】
펜을 들고 글을 쓰려니 눈물이 저절로 앞을 가린다 ……
당시 1999년 우리 마을에서만 100명 넘게 파룬궁을 수련했다. 자원 봉사 보도원의 도움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동수들은 모두 그녀의 집에 가서 아침 연공을 했고 저녁에는 소조별로 법을 공부했으며 주말에는 다른 마을에거 가서 홍법했다. 당시 동수들은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홍법했는데, 그 행렬이 장관을 이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되었다.
대법을 수련하던 사람들은 위로는 90대 노인부터 7~8세 어린이까지 다양했다. 대법을 얻은 후 우리는 인생관마저 근본적으로 변했고, 모두 “비학비수(比學比修)”하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마을 과수원에서 일하던 한 수련생은 연말에 임금을 받았는데 경리의 실수로 2,000위안 이상을 더 받았다. 그는 집에 가서 돈을 확인한 후 즉시 경리에게 돌려 보냈고 이 이야기는 마을 전체를 진동시켰다.
또 외지에서 부단장(副團長)까지 승진한 주민이 있었는데, 그의 며느리가 구강암에 걸려 한약과 양약을 많이 먹었지만 낫지 않았다. 하지만 파룬궁을 수련해 치료되었고 이 사건은 온 마을을 진동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파룬따파의 아름다움과 신기를 목격했고 앞다퉈 대법을 수련했다.
또 한 70대 할머니는 매일 복통으로 고생했다. 의사는 담석이라고 하면서 수술하라고 했지만 그녀의 며느리가 말했다.
“무슨 수술을 받아요,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수술대에서 못 내려오면 죽어야 하는데 돈만 낭비할 뿐이죠.”
결국 그녀는 날마다 병의 고통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보도원 동수가 이웃이라 이런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 권했다.
“이모, 우리랑 같이 한번 연공해 보세요.”
“나도 시도는 해보겠지만 자네들이 인내심이 좀 있어야 할걸.”
할머니는 의지가 강했고 보도원의 사심 없는 도움하에 단번에 5가지 공법을 다 배웠다. 연공을 시작한 후로 복통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한 달 후, 배가 전혀 아프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는 너무 기뻐서 만나는 사람마다 파룬따파가 자신을 구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대법의 초상성을 칭찬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대법을 수련했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강택민(江澤民)이 소인배의 질투심으로 중공 사당과 결탁해 파룬궁을 비방하고 국가 권력을 총동원해 파룬궁을 탄압했으며,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수련생들을 감옥, 세뇌 교실, 정신 병원에 불법으로 납치했다. 당시 우리 마을 보도원도 불법으로 노동교양을 받았다. 그녀는 노교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고 사악한 당 교도관들이 추운 겨울에 속옷만 입히고 연비[燕飛 역주: 제비 날기라고 하며 두 손을 뒤로 돌린 후 끈으로 손목을 묶은 후 각각 대들보나 창문 난간 위에 높이 매달고 머리가 아래를 향해 거꾸로 서게 하는데 아주 고통스럽다.] 묶어 놓는 고문을 했다. 무더운 6월에는 신발과 양말을 신지 못하게 하고 오전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광장에서 맨발로 뛰게 했다. 또 다른 수감자들을 시켜 화장실에서 사용하던 천으로 재갈을 물리게 했다. 하지만 이런 잔혹한 박해도 그녀의 수련 의지를 꺾진 못했다.
2003년 보도원 동수는 중공 “610”요원들에게 불법으로 납치되어 우리 지역 세뇌반에서 박해를 받았다. 어느 날 오전, 젊고 건장한 수감자 4명이 그녀에게 강제로 크고 흰 알약 6알을 먹인 후 오후에 풀어주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 날부터 이상하게 웃기 시작했고, 책을 읽으면 글자를 하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불안해하면서 울었고, 그 후 정신이 또렷하지 않아져서 혼자서는 살 수 없었다. 마을의 다른 동수들이 그녀를 돌봐주었다.
그녀는 2017년 초,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굳건한 수련 의지와 동수들에 대한 사심없는 희생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사부님 말씀을 따르고 역사의 관건 순간에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고 잘 걸어서 많은 사람을 구해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
개인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법에 없는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