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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에 아침노을을 따라 떠난 남편을 그리며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생전에 남편은 명문 대학 교수이자 박사 지도교수로 정부에서 특별 보조금을 받는 전문가였고 2021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선명한 꿈을 꿨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남편이 나무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길(약 2차선 도로)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나는 약 축구장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남편 뒤에 있었는데, 1985년 방문학자로 해외에 나갔던 40대 초반의 모습이었고, 그때 맞춘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으며 매우 활기차게 보였다.

청명절(4월 4일)이 다가오자 나는 다시 이 꿈이 떠올랐다. 이 꿈에서 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다른 공간에서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편의 결말이 이렇게 좋은 이유는 그가 나의 대법 수련을 지지했고, 대법을 인정했으며, 마지막에 또 대법을 배워 대법 사부님의 구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1. 내 몸에서 대법의 신기와 수승을 목격

나는 1960년대에 6년제 모(某) 대학 의대 본과를 졸업하고 고위직을 역임한 의사다.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기 전에는 50대 초반에 류마티스 관절염, 갑상선 기능 항진증, 대사증후군, 경동맥염, 허혈성 뇌막염, 위궤양, 부정맥, 메니에르 증후군 등 다양한 질병을 앓았다.

특히 ‘류마티스’는 만성 암으로 불리는데 세계보건기구에서 세계 5대 중증 질환의 하나로 선정한 질병이다. 관절이 변형되고 뻣뻣해지며 통증이 심해 움직임이 제한되고 생활이 매우 힘들어진다. 나는 이것 때문에 우리 성(省)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병원에 여러 번 입원했고, 장기간 약물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또한 병에 걸릴 때마다 성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와 교수들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곤 했다.(주요 병원마다 대학 동창들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당시 다른 기공도 배워봤지만 기본적으로 아무 효과도 없었다.

고위 직책을 가진 의사임에도 각종 완고한 질병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신이 너무 한심했고, 당시 내가 겪었던 고통과 절망은 정말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1996년 기쁘게 파룬따파를 얻었고, 파룬궁 수련을 통해 위의 모든 병이 다 사라져 몸이 아주 가볍고 건강해졌다!

남편은 실증과학 연구에 종사했는데 “당신에게 증상만 없을 뿐이지 정말로 병이 다 나은 것은 아니야. 반드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전에 내게 류마티스 검사를 해줬던 전문가를 찾아가니 그녀가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안색이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오지 않았는데 어디서 약을 처방받았습니까? (그녀도 내가 의사임을 알고 있다.)”

내가 말했다.

“오랫동안 약을 먹지 않았어요.”

그녀는 의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아직 당신보다 수치가 높은 사람은 본 적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평생 약(호르몬제)을 먹어야 했습니다.”

나는 진지하고 간절하게 “나는 정말 약을 먹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아무 약도 복용하지 않았다면 그건 세계적인 기적입니다!”

검사 결과 모두 정상이었다. 남편은 파룬따파의 신기(神奇)와 수승함을 직접 목격했고 대법을 수련해서 세계적인 기적을 이룬 것을 목격하더니 진심으로 인정했다.

2. 사당의 박해 후 미망에서 진상을 똑똑히 알기까지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초기에 중공은 “1,400건” ‘살인, 자살, 사망’ 사건을 조작했고, 정신병 환자를 이용하고, 살인자를 선동하거나, 중환자에게 돈을 주는 등 비열한 방법을 사용해 소위 “증거”를 조작했고, 전국의 모든 언론 매체를 통제해 파룬궁에 대한 광범위한 비방과 중상을 퍼뜨렸다. 2001년 1월 23일 중공은 파룬궁 박해를 강화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서 소위 분신자살 사기극을 만들어 파룬궁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를 부추겨 파룬궁 탄압에 동참하도록 선동했다.

남편은 나의 파룬궁 수련을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파룬궁을 비방하는 천지를 뒤덮을 듯한 여론 압력 속에서 “숲이 넓으니 나쁜 새도 있지 않을까?”라며 약간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그에게 진상을 알렸다. 특히 가장 영향력이 컸던 “천안문 자살” 사기극에 많은 의문과 허점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휘발유를 담은 플라스틱병과 머리카락은 왜 타지 않았을까요? 류춘링은 불에 타서 죽었을까요 아니면 맞아 죽었을까요? 경찰이 소화기를 들고 순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누가 이 장면을 촬영했을까요? ‘자살’은 갑작스런 사건인데 어떻게 원거리, 클로즈업 화면이 그렇게 많을까요? 또 이 자살한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생이 아니라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게다가 2001년 8월 14일, 국제교육개발기구(IEDO)는 유엔 총회에서 ‘천안문 분신 자살 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모함하는 ‘국가 테러 행위’라고 지적하며 강력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명확한 증거 앞에서 중국 공산당 대표단은 할 말을 잃고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고 이 성명은 유엔에 의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헌법에는 ‘신앙 자유’ 규정이 있으며 파룬궁은 완전히 합법적입니다. 2000년 4월 9일 공안부가 발표한 ‘통지[2000] 제39호’ 문서에 공안부가 규정한 14개 ‘사교’ 목록에도 파룬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1999년 7월 박해 전까지 중국의 많은 신문과 중앙, 성시(省市)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국은 파룬궁이 사람들의 도덕을 높이고 질병을 없애며 건강을 개선하는데 기적적인 효과가 있다고 칭찬하며 파룬궁을 긍정적으로 보도하지 않았습니까?”

남편은 마침내 진상을 깨달았다. 《9평 공산당》이 발표된 후 그는 탈당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이 가입했던 당 조직에서 탈퇴했다.

3. 나의 대법수련을 지지하다

(1) 공개적으로 집에서 자료를 만들고 법공부 소조를 만들다

2005년 당시에는 자료점이 비교적 드물었다. 남편 침실 책상에는 컴퓨터와 레이저 프린터가 있었다. 나는 기술을 잘 아는 젊은 여성 동수에게 부탁해 남편의 컴퓨터에 암호화된 폴더를 만들고 이 폴더에 모든 자료를 넣은 다음 인터넷에 접속하고 다운로드하고 인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는 주변 동수 12명 이상이 주간 및 기타 자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2006년에 나는 남편과 별개로 컴퓨터와 잉크젯 프린터를 구입해 동수들이 보는 주간 등의 자료를 만드는 외에 두 법공부 소조 동수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공급하기 위해 전단지, 소책자, 진상 스티커, 호신부, 진상화폐, 《구평》 등을 인쇄했다. 나는 또 자주 나가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스티커를 붙이고 진상 화폐를 사용했다. 나중에 한 동수가 우리 집에 법 공부 소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 남편은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압력을 받아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고, 동수들이 집에 오는 것을 보면 늘 웃으며 맞이하곤 했다.

(2) 내가 박해받을 때에도 아무 원망 없이 돕고 관심

아래에서 2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2010년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진상 스티커를 붙이러 나간 적이 있다. 버스 정류장에 붙이고 있는데, 술에 취한 50대 건장한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따라왔다. 나는 이를 모르고 모퉁이를 돌아 다른 길로 가니 게시판이 있었고, 스티커를 붙이는 순간 내 손을 잡고는 놓지 않았다. 인근에 경찰서가 있어 나를 끌고 갔다.

나를 심문하기 위해 경찰서에서 30대 경찰관이 내 이름, 주소를 물었고, 협조하지 않으면 철창에 넣을 것이고, 협조하지 않으면 다른 경찰관을 시켜 수갑을 채운다고 했다. 다시 물어도 내가 여전히 협조하지 않자, 그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나를 세게 찼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의 보호하에 마치 두꺼운 솜에 가로막힌 것처럼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고통이나 흔들림이 없었고 무감각했다.

나중에 그들은 몰래 내 사진을 찍고 컴퓨터를 통해 내 주소와 직장을 알아냈다. 또 즉시 우리 집을 수색했는데 30~40대 가량의 아주 사악한 형사가 앞장섰다. 그들은 옷장 밑에 있던 종이까지 꺼냈고 심지어 침대 아래까지 수색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찾으려 침대를 들어올리거나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직장 610과 거주지 경찰서에 연락해 내가 매우 고집이 세고 태도가 나쁘니 엄중하게 처리하라고 말했다.

철창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밤 11시쯤에 아마 그들은 나를 세뇌반에 보낸 후 다시 거주지 경찰서로 데려가기로 협상한 것 같았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우리 회사 610 인원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탁자를 치며 노려보았다.

한편 당시 남편과 대학원생으로 있던 부처장(副處長)급 간부가 직장 보위처장(610은 보위처 관할이다)을 찾아갔다. 남편은 내가 병을 없애고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연공했고 원래 몸이 아주 좋지 않았는데 연공하고 나서야 좋아졌다고 강조했다. 남편은 전에 직장에서 중간 간부(과장급)였기 때문에 아마 그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 책임자도 남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함께 간 대학원생이 말했다.

“그녀는 건강을 위해서 연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곧 칠십이니 한번 봐줍시다! 세뇌반에 보내면 직장에서 돈을 내야 하지 않습니까?”

동시에 남편 친구인 이 대학원생은 우리 지역 책임자(아마 두목)와 친했는데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60대 여성이 건강을 위해 연공한 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기껏해야 신앙의 문제일 뿐이니 한번 도와줍시다.”(두 경찰서가 같은 지역에 있었다). 그녀는 곧장 경찰서로 와서 우리가 거기 있는 것을 보고는 즉시 휴대 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모 국장님이세요? (직장의 보위처장)” 그리고 밖으로 나간 다음 잠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더니 610 인원에게 전화를 주자, 610이 “처장님이 데려가서 교육하라고 하시네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내가 곧 돌아올 것을 알고 인근에 사는 아들을 급히 불러 침대며 집안 물건들을 좀 정리하라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돌아와도 힘들거라고 했다. 사실, 남편 역시 큰 압력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남편은 단 한마디 불평이나 비난도 하지 않았고 그저 돌아와서 좋다고만 말했다.

2012년 11월 초, 30대의 키가 큰 여성이 이끄는 한 무리 사람들이 우리 집에 침입해 주민센터에서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고 (주민센터 파룬궁 담당자인 50대 남성은 내가 얼굴을 안다)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는 18대를 앞두고, 당신 아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학습반에 데려가 학습시키려 합니다.”

남편은 즉시 말했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내가 보장합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아무런 절차도 밟지 않고 불법으로 집을 수색했다. 동행한 경찰관은 50대로 보였는데 내가 그에게 진상을 말하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또 집을 수색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남편 방에 들어가려 하자 그는 이곳은 교수님 방이고 그는 연공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길을 막았다. 그들은 서둘러 나를 데려갔고 나는 결국 전국적으로 악명 높은 세뇌반에 불법적으로 구금되었다.

세뇌반에 불법 구금된 첫날부터 남편이 세면도구를 전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유는 우리 집에서 압수한 물건이 너무 많아(당시 나는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국보(國保)에서 조사 중이라고 했다. 불법 구금된 지 20일이 지나서야 남편의 첫 면회가 허용되었다. 남편은 들어오자마자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동행한 세뇌반 직원 황(黃) 씨에게 왜 안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눈이 ‘고정’되어 있는지 물었다.

황 씨는 “이곳 사람들은 다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남편이 황 씨에게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활동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황은 드물게 있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즉시 거짓말을 바로잡으며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이후 포협이 나를 세 차례 데리고 내려갔고 매번 10~15분 정도였다. 비록 횟수도 적고 시간도 짧았지만 남편이 찾아와 내가 활동할 권리를 위해 싸운 덕분에 외출 금지라는 사악한 규칙을 깨고 나를 데리고 내려간 것이다.

12월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자 남편은 나를 만나 옷을 보내려 했다. 아들은 1시간 반 이상을 운전해서 교화소까지 가서 옷은 전달할 수 있지만 당국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12월 25일 남편과 아들이 케이크를 가져다주었다. 26일이 내 생일이었기 때문에 케이크에 글은 없었지만 꽃 두 송이가 있어서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남편은 동행한 세뇌반 직원에게 곧 섣달그믐인데 이곳에 초대소가 있는지, 또 함께 섣달그믐을 보낼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초대소가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나중에 남편이 이 면회를 위해 자신의 의사에 반해 ‘교육에 협조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미 이에 대해 엄정성명을 발표했다).

(3) 사악의 이간질과 이혼 요구에도 굴하지 않다

사악이 남편에게 말했다.

“교수님, 당신은 과학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큰 성과가 있고,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성(省)에서 주는 것도 있고 국가에서 준 것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우수한 분이니, 더는 그녀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이혼하십시오! 그녀보다 더 강하고, 더 좋고, 더 젊은 사람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대답했다.

“우리는 문화혁명 시기에 ‘냄새나는 아홉 번째’로 비판받던 세대로 함께 농장에선 농사를 짓고 공장에선 노동자로 일하면서 서로 돕고 힘든 세월을 함께 극복했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대학원생을 모집한 후 당시 나는 이미 10년 이상 학교를 떠나 있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결국 대학원에 진학해서 졸업하고 모교에 머물면서 일했습니다. 이 기간에 그녀도 대학 은사님의 도움으로 모교로 돌아와 일하기로 했는데 인사처장도 곧 다른 곳으로 보내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위해 대학으로 돌아갈 기회를 포기했고 우리 직장 물류 부서에서 관리하던 학교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모든 집안 일을 도맡아 했는데 두 자녀가 대학에 갈 때까지 나는 집안일을 도와준 적이 없습니다. 단지 아이들이 공부하다 의문 나는 질문을 하면 대답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가정을 위해 이렇게 희생했기 때문에 내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고 덕분에 이러한 성과를 달성했는데 내가 어떻게 배은망덕(背恩忘德)할 수 있겠습니까?”

4. 남편이 받은 복보(福報)

(1) 육체적인 복보

남편은 2017년 말 병원을 방문했을 때 소뇌 위축증이 의심되어 2018년 성(省)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았고, 2018년 연말 다시 성 병원에 입원하여 신(腎)부전증이 추가되었는데 병원에서도 별 치료 방법이 없었다. 퇴원 후 나는 그에게 대법을 배워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전법륜》을 배우기 시작했고, 나와 같이 각자 한 단락씩 읽었다. 2021년 7월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약 2년 동안 그는 책을 20번 정도 공부했고, 사부님의 모든 설법 중 병업에 관한 대부분의 경문을 공부했다. 그는 늘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9자진언을 외웠다.

남편에게 가장 분명히 나타난 복보는 일반적으로 노인이 소뇌 위축이 오면 아주 빨리 뇌 기능 저하로 이어져 노인성 치매가 나타나는데,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례가 많이 있다. 가령 우리 사구(社區 커뮤니티) 서기의 아버지, 우리 병원 간호사의 시어머니 등등. 하지만 남편은 CT 사진에서 뇌세포가 점점 더 줄어들긴 했지만 죽을 때까지 뇌 기능은 아주 정상이었다. 대법을 정면(正面)으로 대했기 때문에 복보를 받아 나타난 기적이 아니겠는가?

소뇌는 또 균형을 담당하기 때문에 소뇌가 위축되면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쉽다. 2020년 남편이 넘어져 고관절 골절로 고관절 치환술을 받았다. 나는 수술 전에 남편에서 ‘9자 진언’을 성심껏 외우라고 당부했다. 담당 의사는 40대 남자였는데, 수술이 끝난 후 수술이 대성공이라며 매우 흥분한 상태로 수술실에서 나왔다! 그는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었고 속도로 빠르고 좋았으며 70대 노인의 생리 지표가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고 했다.

(2) 선종(善終)

2021년 7월, 남편이 보행기를 타다가 집에서 앞으로 넘어져 선혈을 토해 120을 불렀다. 구급차가 그를 가장 가까운 시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해 보니 피를 토한 것은 구강 파손 때문이고 다른 상처는 없지만 두개 내 출혈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며칠 후 두 번째 뇌 CT를 찍었지만 두개 내 출혈이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며칠 더 관찰한 후 퇴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5시, 간병인이 남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당직 의사를 부르자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소생술을 했지만 사망했다. 그는 이렇게 고통 없이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바로 《상서·홍범》에서 말하는 오복(五福) 중 하나인 ‘선종(善終)’이다. 선종이란 한 생명의 마지막 총결로 생명의 가장 큰 복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닦기 어려운 것이 ‘잘 죽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본 남편의 표정은 마치 잠든 것처럼 매우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생명을 마쳤다. 사실 그의 가장 큰 복보는 바로 사부님의 홍대하고 자비하신 구도 아래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 아름답고 빛나는 미래를 걷고 있다는 것이다. 불은호탕(佛恩浩蕩)이 아닌가! 여기서 대법 사부님께서 구도해 주신 홍은(洪恩)에 감사드립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