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신(復一新)
【정견망】
다년간 법을 외우고 공부하면서 수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기에 이를 써서 공유하고자 한다.
진정한 수련이란 무엇인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오로지 법을 배우고 마음을 닦으며 아울러 원만하는 수단 ― 연공(煉功)을 하여 확실하게 본질적으로 자신을 개변하면 心性(씬씽)이 제고되고 층차가 제고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다.”(《정진요지》〈무엇이 수련인가〉)
“진정한 수련은 곧 마음을 닦아야 하고, 안으로 닦아야 하며,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밖에서 찾는 것이 없다.”(《전법륜》)
사부님께서는 법을 처음 전하실 때부터 진정한 수련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30년 가까이 수련해 왔지만 여전히 진정한 수련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본질의 개변이 아주 느렸으며 층차 제고도 아주 느렸다. 무조건 안으로 찾을 수 없었고 늘 밖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이기적이고 저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 주위 친구들을 보면서도 늘 자신의 표준으로 대했는데 이 사람은 남을 이용하길 좋아하고, 저 사람은 위선적인 것을 좋아하며 말이 진실하지 않다는 등등. 동수에 대해서도 늘 그들의 부족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 사람은 법에 따라서 일하지 않고, 저 사람은 속인처럼 말한다면서 늘 다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고만 여겼다. 나는 늘 자신의 세계관으로 외부 세계를 가늠했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일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사물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심하게 불평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일 자체에 매몰되었다.
수년간의 법 암기와 사부님의 가르침을 통해 나는 모든 외부적인 그런 사람이나 일은 모두 나의 내심(內心)이 투사된 것임을 깨달았다. 과거에 나는 단지 밖으로만 닦고 남을 닦았을 뿐 자신은 닦지 않았다. 닦고 닦았음에도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아주 많은 사람 마음의 집착이 있었다. 안으로 찾아 자신을 닦는 것은 그저 말로만 했을 뿐 진정으로 나의 행동에 적용하지 못했다. 사부님의 법리(法理)는 단지 이론상의 인식에 불과했고 단지 남을 가늠하는데 사용했을 뿐 자신의 언행을 지도하는데 사용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은 늘 수련인이 될 자격조차 없다고 느낀다.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함을 동수들은 진작 돌파했겠지만, 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전에 늘 자신이 옳다고 여겼다. 수련하고 나서도 이렇게 내가 높이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늘면 늘었지 오히려 줄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30여 년 교직 생활과 관련이 있을 텐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승부욕이 강하고 자아가 강렬해서 남이 나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옳다고 여겼으며 사악한 당 문화에 중독되어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극치까지 하며 극단적으로 하려고 했다. 때문에 남을 무시하는 강렬한 마음이 생겼다.
과거에 누가 나에 대해 뭐라고 말만 해도 나는 아예 마음에 두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으려는 습관이 생겼는데, 더 나아가 남이 나를 통제하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친구와 가족들 모두 나를 존경하되 멀리하는 상태에 처하게 했는데 늘 나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동수들도 내 앞에서 내게 무슨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수련이란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고, 수련이란 바로 자신의 사람 마음을 닦아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30년 가까이 수련하면서도 진정으로 자신을 수련하지 않았다.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은 사람 마음을 닦는 것이고 자신을 닦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모순이 있을 때, 곤란과 불공평한 대우가 있을 때 여전히 자신을 찾아 안을 향해 볼 수 있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수련으로”(《대만법회에 보내는 축사》)를 따르지 못했다. 사실 수련인은 자신을 수련하는 외에 다른 모든 걱정은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큰 문제에 대해 오히려 도(道)를 어겼고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닦지 못했다. 두 눈은 늘 밖을 바라보면서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거의 30년을 수련했음에도 변화가 크지 않았고 사부님이 대법에서 말씀하신 그런 신적(神跡)을 실천하지 못했으며 대법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에 내가 집착했던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거나,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이런 관념은 모두 사람 마음이고, 사람이 집착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 뿐 신(神)이 원하는 것이 아닌데, 신의 마음은 완전히 내려놓은 것이다. 전반 우주는 다 법(法)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법은 전 인류의 것인데 누가 어떻든 내가 왜 걱정하는가? 만약 자신이 법으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다 사부님의 배치가 아닌가? 모든 것이 자신을 닦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걱정을 하는가? 이것은 모두 사람 마음이 아닌가?
다년간 법 암기를 통해 나는 수련이란 바로 수련인의 사람 마음 관념을 제거하는 것임을 똑똑히 안다. 나는 이런 관념은 모두 내가 아니며 나는 반드시 이런 좋지 않은 사람 마음과 관념을 제거해야만 한다. 더는 나의 수련 정진을 가로막는 이런 것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반드시 일체 사람 마음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사람 몸에 대한 집착을 포함한다. 일사일념(一思一念)에서부터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한다. 그 어떤 일을 만나든, 아무리 큰 곤란을 만나든, 모두 안으로 찾고 자신을 닦아야 하는데, 내 생각에 이렇게 하면 넘어가지 못할 관(關)은 없다.
다년간 법을 외우면서 내가 분명히 깨달은 것은, 과거의 나는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겼고 마음의 중점을 일하는 것에 두었으며 일하는 과정에서 사람 마음을 닦는 것을 주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기간 한 무더기 일을 했지만 자신의 집착심 제거는 여전히 아주 느렸고, 제고 역시 당연히 아주 느렸다. 말하자면 자신은 수련할 줄 몰랐고 대법 수련의 특수성을 몰랐으며 지금 말세에 도덕이 저하된 상황에서 닦는 것이 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년간 법을 암기하면서 나는 사람과 신(神)은 다름을 깨달았다. 신(神)은 조화롭고 자비로워 중생을 보면 다 고생스럽게 보고, 사람을 보면 다 한 층차에 있으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이 없다. 기왕 이렇다면 내가 사람을 좋고 나쁘게 구분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오직 사람이 사람을 볼 때만 구분하는데 당신은 선(善)하니 내가 당신에게 잘하고, 당신은 나쁘니 내가 당신에게 좋지 않게 대한다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신(神)은 사람에 의해 개변되지 않으니, 당신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늘 법(法)의 요구에 따라 당신을 대할 것이다. 당신이 나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당신을 대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속인의 이치에 따라 당신을 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중생을 대해야 하는데 우리만이 진정으로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생에 대해 반드시 자비해야 하며 오직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야 하며 더는 중생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결국 수련이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수련이란 바로 자신을 닦는 것으로, 자신을 잘 닦아야지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을 잘 닦지 못하면 사존께 번거로움만 더하고 나 때문에 사부님께 걱정만 끼칠 뿐이다. 특히 사부님께서 중공의 비방을 받으시는 지금, 이 일에 나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잘 수련하지 못해서 사부님께 혼란을 더해드렸고 결과적으로 정법의 뒷다리를 잡았다. 여기까지 쓰면서 나는 이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 30년 동안 자신을 잘 닦지 못했기 때문에 사존께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다. 나는 사부님께서 이 못난 제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줄곧 제자로 보호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제자는 이제 수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자신을 잘 닦아, 무조건 안으로 찾으며, 세 가지 일을 잘해 최후에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상은 내가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만약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