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重生)
【정견망】
나는 27년 동안 수련한 대법제자다. 그러나 나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좋은 일이라는 이 법리를 줄곧 똑똑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련의 길에서 만난 일에 대해 흔히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하지 못했다. 사물을 접할 때 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신의 표준을 따랐기 때문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좋은 일임을 해내지 못했다. 다년간 법을 외우면서 오늘 나는 마침내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그러므로 당신이 부딪힌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당신이 오직 대법을 수련하기만 하면 모두 좋은 일인데, 틀림없다.”(《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라는 법리의 내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를 써내어 동수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1. 눈으로 봐야 확실한가?
예전에 나는 늘 눈으로 봐야 확실하다고 여겼고, 대법을 배운 후에도 일부 얕은 인식은 있었지만 일부 큰 문제에 부딪히면 가끔 흐릿해지곤 했다.
예를 들어, 어른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면 맞는 아이를 대신해서 화가 났고, 아이를 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며, 정말 그런 일을 만났다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이런 일을 만나면 즉시 두 사람은 인연 때문에 왔고, 아마도 아이가 전생에 어른에게 빚을 져서 상대방을 때렸기 때문에 이번에 결산하러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내가 나서서 함부로 단속한다면 그럼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린 후 갚지 않는다고 하자. 수련하기 전에 내게 돈을 빌린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일부는 돈이 있어도 갚지 않았다. 당시 나는 돈을 빌려 간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생겨서 다시는 그들과 만나지 않았다. 나중에 대법을 배우고 나서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도리를 깨달았는데, 아마 내가 전생에 그들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금생에 갚아야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내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 딸은 내가 수련하기 전에는 매우 순종적이었고 다들 착한 아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내가 수련한 후 그녀는 말을 듣지 않고 곳곳에서 내게 대항했는데 표현이 아주 불효막심했다. 수년 동안 내게는 마음의 병이 있었는데, 늘 ‘내가 너에게 이렇게 잘해주었는데 네가 이렇게 불효하다니, 이렇게 하면 너는 큰 업을 지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늘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했고 때로는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해져서 도저히 구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내 눈앞에 이런 표현이 나타났기 때문인데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법을 외우고 법을 베끼면서, 나는 아이가 왜 이러는지 정말 이해하게 되었다. 전혀 내가 본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내 수련을 도와주신 것이다. 내가 만약 수련하지 않았다면 이번 생에 우리가 서로에게 진 업의 빚을 결산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대법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은원(恩怨)은 반드시 금생에 결산해야 한다. 딸이 내게 불효한 것은 아마도 내가 전생에 그녀에게 불효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바로 업력윤보(業力輪報)다.” 당신이 그에게 빚을 졌으면 그는 당신을 찾아와서 빚을 받아 갈 것이며, 더 많이 받아 가면 다음번에 그가 다시 당신에게 갚아준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거꾸로 되는데, 바로 이렇게 돌아오고 돌아간다.”(《전법륜》)
그러니 나는 딸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마땅히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법리를 똑똑히 알고 나니 지금 나는 아이의 무리하고 불효한 것을 보아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일체 옳고 그름을 참고 양보하면서 평온한 심태로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사부님과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2. 산을 보고도 산이 아니라고 볼 수 있어야
나는 법을 외우면서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가상(假象)이고 다 사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수련 과정에서 육안으로 본 것을 다 진짜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병업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병이 왔다고 여기지 말고 마땅히 수련인의 표준으로 대해야 하며, 개인 수련에선 병업 반응이지만, 정법 수련할 때는 바로 구세력의 교란이다. 두 가지 상황 모두 수련인의 사람 마음을 고험하는데, 만약 무조건 안으로 찾아 심성을 제고해 올라갈 수 있다면 병업 가상은 즉시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정법의 이치로 대하지 못한다면 구세력이 틈을 타 육체적인 박해를 진행하게 되며, 엄중한 경우 육체를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병업이 어떤 방식으로 오든 모두 마땅히 좋은 일로 간주해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속인중에서 수련하기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다 속인인데 속인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은 아마 바른 법리(法理)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며 명리정(名利情) 방면에서 다투길 좋아하고 개인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우리 연공인은 명리정을 내려놓고 담담히 보아야 하며 최후에는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때때로 어떤 것을 보고 당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대법의 법리로 보면 꼭 당신 것이 아닐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얻기 위해 싸워서 가져온다면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질 수 있다. 속인의 눈에는 많이 얻을수록 더 좋지만, 우리 수련인의 눈으로 보자면 당신의 것이라면 잃지 않지만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싸워도 얻을 수 없으며 싸워서 얻는다면 덕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 수련인은 자연스러움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또 있다. 추위, 더위, 고생, 피로, 괴로움 등등에 직면했을 때 속인은 나쁜 일로 여기지만 우리 수련인은 그것을 마땅히 좋은 일로 여겨야 하며 추위, 더위, 고생, 피로, 괴로움 등은 수련인이 죄업을 없애고 덕으로 전화시킬 수 있으니 이는 확실히 아주 크게 좋은 일이다.
3. 복잡한 환경속에서 자신을 단련할 수 있어야
수련인이 만약 속인 중에서 반대로 문제를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바로 속인이다. 특히 말겁시기 인류는 이미 어느 정도로 타락했는가? “사람마다 서로 적을 보듯 하고 일마다 뜻대로 되기 어렵구나”(《홍음》 〈괴이하게 변함〉)라고 하신 사부님 말씀과 같다.
이 복잡한 사회 환경에서 우리 수련인은 속인들의 냉담하고 무정한 것을 마주해, 이렇게 복잡한 환경을 자신의 수련 성공을 위한 좋은 환경으로 여기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심지어 당신이 그를 구도할 때 그는 오히려 당신을 해치려 신고할 수 있는데, 우리가 만약 이것을 자신에 대한 고험으로 여길 수 없다면 우리는 금강불멸(金剛不滅)한 우주의 신(神)으로 자신을 단련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가장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가장 복잡한 환경에서야만이 높은 공을 수련해 낼 수 있다는, 이 뜻이다.”(《전법륜》)
따라서 대륙에서 수련하는 대법제자인 우리는 남다른 혜택이 있는 것으로 이렇게 복잡한 환경속에서, 우리가 만약 정념으로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최후에 대각자로 수련 성취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오직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좋은 일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가 그 어떤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자신을 닦을 수 있고, 우리에 대한 구세력의 일체 교란을 타파할 수 있으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수련의 길을 잘 걸을 수 있고, 결국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작은 인식이니 법에 없는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6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