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중국 공산당의 소위 “제로화 행동[역주: 소위 중국 내 파룬궁 수련자를 0명이 되게 만든다는 사악한 당의 프로젝트]”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일부 동수들은 압력 앞에서 타협했고, 일부 동수는 가족의 강요에 의해 서명했으며, 일부는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묵인했다. 나는 여기서 유다에 관한 이야기와 계시를 공유하고자 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열두 사도(使徒) 중 한 명이었다. 다시 말해, 유다는 신의 은혜를 받아 신의 총애와 존중받는 제자였으며, 많은 은혜와 가호를 받았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미(讚美)”를 의미한다. 하늘은 그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을 기회를 주셨고 또 성도(聖徒)가 될 기회를 주셨지만, 그 자신은 배신자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逾越節) 전에 유다는 제사장들과 계약을 맺고 예수를 그들에게 넘기기로 했다. 유다는 줄곧 자신의 계획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노예의 몸값인 은화 서른 개에 예수를 팔았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결국 예수를 배신했을까? 유다는 본래 재물을 탐했는데 자신의 탐욕을 닦아버리지 못했고, 오히려 줄곧 마성(魔性)이 영혼을 지배할 때까지 욕망을 방종했다. 그가 돈의 노예가 되어 죄악을 향하자 사탄이 유다의 마음을 통제해 주(主)를 배신하게 했다. 근본 원인은 바로 그가 그리스도보다 돈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예수가 판결을 받을 때, 유다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수척해졌으며,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화를 대제사장(가야파) 앞에 던지며 예수님을 석방해달라고 간청했다. 유다는 “나는 무고한 사람의 피를 팔아넘긴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네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유다가 크게 회개하고 죄악을 인정했을 때 그는 사람들의 발길질을 당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유다는 성 외곽에 나가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유다의 시신은 나무에서도 떨어졌고, 땅에 떨어지면서 부패로 인해 배가 터져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배신을 위해 유다가 지불한 돈으로 밭을 사서 배신자를 묻어주었다. 그 밭은 나중에 “피의 밭”으로 불렸다. 그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 동물의 내장을 버리는 악취가 나고 더럽고 버림받은 저주받은 곳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공의 “제로화 행동”은 수련자들에게 대법을 배반하고 사부님과 결별한다는 소위 삼서(三書)에 서명할 것을 강요한다. 만약 우리가 이 삼서에 서명한다면 우리가 유다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전향이고 배반이며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많은 동수들이왜 이 시점까지 아직도 “제로화 행동”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예수는 유다를 제자로 선택했고 유다는 주와 함께 3년 동안 같이 살고, 같이 행동하며, 같은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은화 30냥에 주님을 원수들에게 팔아먹었다. 만약 유다가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죽었다면, 그의 이름은 열두 사도 가운데 영원히 새겨져 영원히 존경받았을 것이다. 결국 죄악의 본성을 드러낸 것은 그 자신이었고 때문에 그는 성도(聖徒)에서 배신자가 되었고, 신성한 제단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유다의 이야기는 이후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왔으며, 그 목적은 후대 사람들에게 성도와 배신자 사이는 단 한 걸음의 차이만 있으면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제로화 행동”이 존재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이 역시 내가 일부러 그들을 폭로하여 여러분에게 그들을 알게 하고 제자들 속에서 이런 숨겨진 악성 종양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정진요지 2》 〈사악을 질식시키자〉)
“제로화 행동”은 수련 단체 중에서 유다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나는 직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자식들에게 연루시킬 수 없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감옥에 들어갈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장기간 이익과 사부님 사이에서 심성이 흔들리면서 양쪽을 다 움켜잡고, 이익이 많은 쪽으로 기우는데, 고험(考驗) 중에서 변덕스럽게 이랬다저랬다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부님을 팔아먹거나 대법을 배반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안일을 원하는지 아니면 사부님을 원하는지다.
어떤 사람은 한편으로는 삼서를 쓰고 사부님을 욕하면서 다른 한편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면서 사부님의 보호를 얻어 원만 회귀(回歸)하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이 만약 성불(成佛)할 수 있다면 천국은 곧 패괴(敗壞)할 것이다. 사실 전통적인 정통(正統) 문화에서도 어질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며, 불충(不忠)하고 불효(不孝)하면 사람 중에서도 치욕으로 여겼고 다른 이들의 멸시를 받았다. 우주에 어질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신불(神佛)은 없으며, 불충하고 불효하면 불문(佛門)에서도 반드시 쫓겨났다. 속인은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고 했으니, 사람에게 신의가 없다면 세상에 설 자리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창세주를 배반하고 팔아먹은 자는 근본적으로 신우주에 설 자리가 없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로지 대법(大法) 속에서 좋은 점만 얻으려 하고 대법(大法)을 위해 지불하지 않는 사람은, 신(神)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사람은 가장 좋지 못한 생명이다.”(《정진요지 2》 〈건의〉)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에서 제명하셨고, 온갖 심혈을 기울이며, 밤낮으로 헌신하셨다. 우리가 만약 사부님의 호탕(浩蕩)하신 불은(佛恩)을 시시각각 명심할 수 있다면 중공 관리들에게 “사부님께서는 나의 큰 은인이시기 때문에 나는 사부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사악을 두려워 떨게 하고 구세력을 부정해 박해를 해체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심성을 지키지 못하고 충정(忠貞)하지 못하다면 결과는 도태일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압력 앞에서 두려워하며 연마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이 정과(正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처마저도 팔아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두려워하는 마음은 집착이 아닌가? 수련은 바로 큰 파도가 모래를 일 듯 남은 것이야말로 금(金子)이다.”(《정진요지》 〈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
우리가 대법제자가 되기로 선택했을 때,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가 되었고,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촉망받았으며, 수련 중에서 온갖 은혜를 받았다. 이는 한편으로는 큰 영광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이다. 우리는 자신을 짓밟고 주불(主佛)의 은전(恩典)을 저버려선 안 되며 대법을 비방하거나 사부님을 팔아먹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련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니 원칙과 최저선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팔아먹지 않고 배반하지 않음은 수련의 근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떠한 압력도 모두 불법(佛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견정(堅定)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법에 대하여 아직 견정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정진요지》 〈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고층차에서 수련이란 바로 선택이며, 우리의 선택은 또한 중생과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 우리의 선택이 반석(磐石)처럼 확고할 때 우리는 곧 사부님과 함께하는 것이고, 우리가 삼서에 서명하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비열한 유다가 될 것이며, 삼서에 서명하고도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우리는 유다보다 더 치욕스러울 것이다. 고험 앞에서 진실한 심성(心性)이 드러나며 우리가 쓴 것이 바로 우리의 위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선과 악의 표현 중에서 각자 나름대로 얻을 결과를 모두 충분히 체현하였다. 중생들이여, 장래의 위치는 당신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정진요지 2》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나는 동수들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진요지 2》를 여러 번 읽어 전향과 배반의 결과를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로화 행동”에 관한 교류 문장을 많이 읽고 자기 미래의 길을 이성적으로 사고해 보기 바란다. 성도(聖徒)가 되어야지 반도(叛徒)가 되어선 안 된다. 이는 대법제자의 최저선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1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