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법제자
【정견망】
연말을 맞아 지난 한 해 수련을 정리하고 되돌아보면서,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마땅히 해야 한다”와 “본성”
전에 한 동수가 있었는데, 나는 그녀의 많은 일을 방법을 찾아 도와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좀 번잡한 일을 그녀가 해주기를 기대했는데, 그녀는 다음 날 그 일을 다시 내게 미뤘다. 나는 매우 화가 났다.
아무도 없을 때,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생각할수록 억울해져서,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나도 왜 이렇게 감정이 움직이는지 놀랐다. 그러나 이 감정은 계속해서 “아이고,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고, 또 그들을 위해 무엇무엇을 했는데, 내가 겨우 한 번 부탁하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군…”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너는 평소에 남을 도울 때 보답을 바란 것이 아니냐? 남이 너를 도와주지 않으니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매번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계속해서 내가 남을 도울 때마다 그 핵심이 무엇인지 계속 느껴보았고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임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나는 마땅히 그를 도와야 한다.’거나 ‘수련인으로서 나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선배로서 나는 마땅히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등등. 나는 이런 행동 자체가 선(善)과 생명의 본능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나는 처음으로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은 진아(真我)가 아니라 하나의 관념(觀念)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마 일상생활에서 형성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수련 중에 형성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모두 그 경지 속 하나의 관념일 뿐 진아가 아니다. 그래서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각도에서 바라보니, 많은 경우에 나는 여러 가지 관념의 지도하에 일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남을 돕는 것은 사실 어린아이처럼 생명의 본능이자 본성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길을 지나던 사부가 보니 당신이 연마(煉)를 괜찮게 하여 천목은 이미 열렸으나, 눈이 없으므로 하나를 연화(演化)해 당신에게 주는데, 이것 역시 당신 자신이 연마해 낸 것으로 쳐준다. 왜냐하면 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를 논하지 않으며, 보수를 바라지 않고, 명예 또한 바라지 않아 속인 중의 모범인물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인데, 이는 완전히 慈悲心(츠뻬이씬)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관념의 지도를 받아 어떤 좋은 일을 했는데, 이 관념에 부합하지 않을 때면 그것이 곧 튀어나와서 성질을 부리거나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수련하는 사람은 바로 이 관념을 제거한 후, 자비심(慈悲心)이 나오는데 이는 일종 생명의 본능이다. 설령 미래에 다른 사람에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이러한 마음을 품고 일을 할 때, 발산한 그런 에너지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고, 신우주의 생명에 부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책임
또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하루는 회사 문밖에서 몇몇 속인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하던 중 서로 명함을 교환하는데 나는 명함이 한 번도 없었음을 발견했다.
다음 날 마침 다른 사람들이 명함을 인쇄할 예정이라, 나도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직책을 뭐라고 써야 할까? 내가 담당자에게 문의하자, 담당자는 “매니저(經理)”라고 했다. 나는 “매니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알 수 없었다. 그저 매우 내키지 않았지만, 법(法)의 배치 속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퇴근할 때 운전하면서 생각할수록 더욱 두려워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내일 혼자 밀림에 던져져 사냥을 하러 나가는 것 같은 그런 공포였다. 나는 운전대에 엎드려 울기까지 했다. 나는 여전히 이 우스꽝스러운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마치 하나의 의존심이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것 같았는데, 이런 두려움과 방황은 더 큰 책임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꿈을 꾼 적이 있다. 시동이 걸린 채 출발을 기다리는 관광버스가 있었는데, 운전석이 비어 있었다. 내가 임시로 불려 가서 운전하라고 했지만, 나는 큰 차를 몰아본 적이 없어 매우 두려워서 운전석에 앉기를 계속 망설였다.
이미 일 년이 지났고, 나는 자신이 이런 책임을 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명함 인쇄 문제 하나가 여전히 의식하지 못했던 매우 깊은 나의 의존심을 폭로했다. 내가 짊어진 것은 단지 그 일뿐이었지,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세계의 주(主)이자 왕(王)은 이 모든 미지의 것에 맞설 용기를 짊어져야 한다. 옳고 그름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오직 그때그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의존심 외에도, 여기에는 또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폭로되었다. 자신을 믿으면,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미래에 직면해서 두려워진다. 왜냐하면 자신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속에 줄곧 사부님을 믿는다면, 어찌 두려워할 수 있는가? 일은 사부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마음속에 오직 신심(信心)만 있을 것이다.
3. 당신을 위해 왔다
동수와 동수 사이의 연분은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 그것은 모두 당신을 위해 온 것이며, 서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최후 순간 서로 만난 것이다.
팀 내에서 점차 내 연차가 쌓이다보니 올해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은 희생과 감당을 했고, 이에 따라 모순도 더 많아졌다. 한동안 나는 몹시 괴로웠다. 왜 내가 최대한 노력해서 어떤 동수를 도와주었음에도, 그는 오히려 나와 맞서려 하는가? 나는 어떻게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마음속의 이 매듭을 풀 수 없었다. 한 번은 법을 배우기 전에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법을 배우고 책을 덮자마자 한 문장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바로 당신이 그녀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아, 수련의 이치는 사람의 이치와 반대구나. 진정한 원인은 원래 업력(業力)이 내가 그녀와 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구나.”
이 과정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내 용량(容量)을 확대시켜 타인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주신 것임을 느꼈다. 또한, 각자(覺者)의 선(善)은 불변하는 것으로 아무 조건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각자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나를 인정하든 나를 오해하든, 당신을 향한 나의 선(善)은 변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내게 이 도리를 깨닫게 하셨고, 자신이 법(法)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보게 하셨다.
과정 중에 다른 동수의 선의(善意)적인 일깨움도 매우 소중하다. 때때로 나는 내가 약간의 감정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방출된 물질은 이미 매우 커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또는 아주 크게 감당해야만 해소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 서로의 수련 어려움을 증가시킨다. 이 동수가 이 일에 능숙하지 않아 떠나기로 선택했을 때, 나는 문득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정말로 그녀의 문제일까? 혹시 내 문제는 아닐까?’ 이 관점에서 생각하니, 나는 내가 행한 감당이 모두 일의 표면적인 것이었지, 다른 한 생명에 대해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보살핌이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본다면 다른 측면에서도 분명 이러한 사유 방식일 텐데,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 수련이 아닌가? 이 동수는 나를 도와주러 온 것으로, 수련 중에서 나의 문제를 보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닌가?
나는 이번에 안으로 찾는 과정에 매우 감사한데, 동수 사이에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든, 모두 당신을 위해 온 것이다. 우리는 표면적인 표현을 뛰어넘어, 서로 소중히 여기며 책임을 다해야 한다.
4. 자연스러운 사유 방식으로 형성
나는 때때로 주변 동수들의 어떤 사유가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을 본다. 가령 평가하길 좋아하는 동수는 말만 하면 이 물건이 말하고 표현한다. 일할 때 사이가 좋기를 좋아하는 동수는, 사이가 좋지 못하면 기분이 나빠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등등. 나는 이것이 동수 본인이 아니라 일종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유임을 똑똑히 볼 수 있다.
나는 사부님께서 왜 내게 다른 사람의 상태를 이렇게 똑똑히 보도록 하셨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내게 나의 관성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자신은 전혀 분별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거울로 비춰주신 것이다. 이 각도에서 체험해보니, 얼마 후 나는 실제로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형성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남을 훈계하길 좋아하는 것으로, 또한 이것이 이미 무의식적인 언어 체계가 되었다. 그것은 내게 많은 모순을 가져왔고, 늘 나로 하여금 이 모순 속에서 그것을 보게 하고 그것을 식별하게 했다. 그것은 정말 내가 아니다.
내 주원신(主元神)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법에서 오는 그런 선(善)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건 남을 훈계할 필요가 없다. 대법 수련자가 법(法)에서 부여받은 그런 관대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을 명백히 깨닫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남을 훈계하는 이것이 늘 “내가 말한 것이 옳다”는 것으로 강화될 때면, 마치 중독된 것처럼 아주 힘이 난다.
내가 이것이 한 가지 문제임을 조금 인식했을 때, 바로 한 동수가 꿈에 내가 사람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은 어느 불(佛)ㆍ도(道)가 거기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는가? 그런 것이 어디 있는가?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마땅히 끊어버려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가? 나는 사부님께서 나더러 여러 사람들 앞에서 훈계하는 행위가 대법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점화해 주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 물건은 점점 내가 아님을 더 느낄 수 있었다. 화를 내는 그 생명은 내가 아니며, 남을 훈계하는 그 생명도 내가 아니었. 예전에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어서 그저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고 느꼈다. 이 부분의 수련은 아직 진행 중이며, 지금 나눌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런 식별 과정에 불과하다.
5. 내려놓은 후의 가뿐함
천국악단 퍼레이드에서 북을 칠 때, 사람들은 늘 내게 물었다.
“긴장하셨어요?”
나는 “긴장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했지만, 긴장을 풀려고 시도해도 풀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긴장 역시 일종의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발견했다. 북을 잘 치는 것은 더 가뿐할수록 더 자유롭고, 더 잘 치고 더 안정되는 것이다. 나중에 나는 몸과 어깨도 긴장되어 풀리지 않는 것을 발견했고, 어떻게 해야 이완될 수 있을지 몰라 수련에서 늘 원인을 찾아보았다.
미국 독립기념일 퍼레이드에서 나는 답을 찾았다. 최근 나를 겨냥해 많은 모순이 발생했기 때문인데, 내 입장에서 감수한 것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온통 불만이었다.
나는 이 안에서 줄곧 맴돌며 명확하지 못했다. 그날 퍼레이드 출발 전에 나는 거기에 앉아 있었는데, 한 가지 일, 두 가지 일, 한 사람, 두 사람, 매 하나의 장면들이 다시 눈앞에 밀려왔을 때, 나는 문득 법(法)에서 한 가지 이치를 깨달았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양해(諒解)”였다. 나는 아주 명백하게 이렇게 “이해하고 내려놓음”을 선택했는데, 마음속으로 매우 기쁘고 가뿐했다. 나는 나 자신을 옳고 그름을 따지는 통제에서 벗어나게 했고 구해냈다. 그리고 이어진 퍼레이드에서, 길 양쪽에 수만 명의 관중이 가까이에 있었고 카메라 렌즈도 가까이 있었지만,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대신 생명이 본래 지녀야 할 이러한 가뿐함과 기쁨으로 가지(加持)되었다.
이후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바로 왜 신(神)은 옳고 그름을 보지 않는지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전에는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였다. 사실 이런 옳고 그름 또한 나 자신의 관념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나는 자신이 불선(不善)하다고 느낄 때, 내가 틀렸음을 안다. 이것이 바로 그 “옳고 그름”이라는 관념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 수련하는 사람이 불선하다면 그럼 바로 틀린 것이다. 그 일 자체의 옳고 그름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6. 맺음말
올해 나의 성장은 중생들과 동반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 프로그램을 듣고 우리 매체를 보면서, 단계적으로 진상을 알았고, 여러 차례 역사 사건들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다. 어떤 시청자는 “나는 날마다 당신들의 프로그램을 다 보려고 합니다. 많은 화인(華人)들에게 등대처럼 앞길을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은 중생이 남느냐 도태되느냐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니 매체를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사부님께서 전체 바둑을 두고 계시고, 우리는 사부님 손안의 한 입자(粒子)다. 바둑판 안에는 판 중간에 있는 바둑알도 있고, 모퉁이에 있는 바둑알도 있다. 사부님을 믿고, 대법의 배치를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유기적이고 원융(圓融)하다. 매체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 현재 맡은 일을 착실하게 잘하는 것은 모두 미래 우주의 대원만(大圓滿)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이며, 모두 수련인의 경지와 진선인(眞善忍)의 자비를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공동으로 사명을 완성해 서약(誓約)을 실현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8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