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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 매화 자태 더욱 아름다워라 (1)

임청(林靑)

【정견망】

매형(梅馨, 가명)은 큰 키에 하얀 피부, 풍만하고 온화한 체구의 소유자다. 육십 대의 나이임에도 세월의 풍파가 얼굴에 큰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며, 늘 미소 짓는 얼굴과 평온한 심성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1999년 정월부터 대법 수련을 시작한 대법제자다. 그녀의 수련 과정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신기한 신적(神跡)이 가득하며 매우 전설적이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 중 일부를 정리해 여러분들과 공유한다.

​1.

​나는 세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노동자였던 새아버지에게 재가했다. 이후 동생들이 셋이나 태어나면서 원래 천덕꾸러기였던 나는 더욱 소외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안일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돌보고 일곱 살 때부터 빨래와 요리를 도맡았다. 다른 아이들이 누리는 부모의 사랑은 받아본 적이 없었고 삶의 고통과 시련만 골고루 맛보았다. 그 심정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마실 때 그 온도를 스스로만 알 듯 참으로 외롭고 고달픈 것이었다.

​어릴 때 나는 천목(天目)이 열려 있어 방 안에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베를 짜거나 목화솜을 잣는 등 여러 일을 하는 이들이 보였다. 어머니께 말씀드렸으나 헛것을 본 것이라며 믿어주지 않으셨다. 자라면서 점차 사심(私心)이 늘어나고 생각이 복잡해지자 천목이 서서히 닫히더니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스무 살 무렵 기가 센 어머니는 돈과 권력을 탐해 나를 어느 마을 서기 집안의 아들에게 강제로 시집보냈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착하고 성실했지만 겁이 많고 나약해서 집안의 기둥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결국 안팎의 모든 대소사와 힘든 일은 남녀의 일을 가리지 않고 내가 도맡아야 했다. 부부 싸움은 일상이었고, 나는 씁쓸한 운명을 한탄하며 세월을 보냈다.

​어머니 직업은 향진(鄕鎭) 중학교 교사였다. 직업 때문인지 사상이 개방적이었고 새로운 사조를 잘 받아들였다. 1980년대 기공 열풍이 전국을 휩쓸 때 어머니는 여러 기공을 전전했다. 당시 기공들은 삿된 것과 바른 것이 섞여 있어 사람들이 어느 것이 진짜 법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찾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어머니는 누군가의 권유로 부체(附體) 공법을 시작하며 나에게도 권하셨다. 며칠 해보았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해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기독교가 좋다는 말을 듣고 기공을 접은 뒤 성경을 들고 나에게 개종을 권했다. 본래 관심은 없었지만 어머니 말씀이라면 거역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어머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함께 성경을 보기도 했다.

​1996년이 되자 파룬따파(파룬궁)가 중국 대륙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기독교를 내려놓고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의붓아버지, 여동생, 두 남동생과 올케들까지 온 가족이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어머니 댁에 연공장 및 법공부장도 생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내게 파룬궁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며 수련을 권했지만, 나는 더 이상 믿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께 “연마하려면 한 문을 틀어쥐고 연마해야지 날마다 바꿔가면서 하나요? 오늘은 이걸 배우고 내일을 저걸 배우면 끝이 있겠어요?”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대법과 스쳐 지나갔다.

​당시 결혼한 후에도 나는 습관처럼 부모님 댁을 찾아가 집안일을 도왔다. 그때마다 부모님 댁에서 법을 공부하는 동수들을 만났다. 법공부장의 자비롭고 화목한 분위기는 사람을 매우 편안하게 했다. 어린 조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그래서 대법에 대해 내심 호감을 품고 있었다.

​1999년 정월, 드디어 내가 법을 얻을 기연이 찾아왔다. 부모님 댁에 갔을 때 마침 동수들이 교류 중이었고 녹음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그 아름다운 선율은 내 마음 깊은 곳을 울렸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을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곡은 대법 음악 《보도(普度)》였다.

​음악에 집중하는 순간 내 눈앞에 한 장면이 펼쳐졌다. 망망대해에서 작은 쪽배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도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목적지도 방향도 없이 어디가 기슭인지 모른 채 막막하고 무기력하게 표류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흰 도포를 입고 불진(佛塵)을 든, 머리와 수염이 하얀 도인이었다. 그가 입은 결백한 흰 도포의 성결(聖潔)하고 투명한 모습은 속인의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얘야, 돌아오너라!” 그는 나를 향해 자비롭게 부르셨다. 그 음성은 층층 환우(寰宇)를 뚫고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는데, 평생 느껴보지 못한 따스함과 친근함이었다.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부르는 듯했고, 내 평생이 바로 그분을 찾고 기다려온 과정인 것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쏟아졌고 나는 쪽배의 노를 저어 필사적으로 그 도인을 향해 다가갔다.

​다음 날 서점에 가서 《전법륜(轉法輪)》을 보았을 때 나는 파룬궁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조급함에 즉시 다섯 권의 대법 경서를 샀다. 집에 돌아와 《전법륜》 속표지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사진 속 인물이 바로 전날 음악을 들을 때 천목으로 보았던 그 도인이었다. 바로 대법 사부님이셨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단 두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심장이 고동쳤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찾던 것이다. 어머니의 권유를 진작 듣지 않아 3년이라는 세월을 허송세월한 것이 사무치게 후회되었다.

​그렇게 나는 본격적으로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우리 가족 중 가장 늦게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독실하고 정진(精進)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모든 경서를 탐독하며 대법 진선인(眞善忍) 표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단속했다. 집안의 실권자로서 남편 대신 모든 일을 결정하며 형성된 강하고 독단적인 성격부터 고쳐나갔다. 능력 있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아 여장부로 불리던 나는 수련 후 부드럽고 선량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님이 뇌혈관 질환으로 전신 마비가 되셨다. 시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남편은 외아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직장에 나가는 남편을 대신해 내가 시아버님을 간병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을 닦아드리며 식사를 챙기고 어린 자녀들까지 돌보는 고된 일상이 이어졌지만 나는 이를 수련인의 자세로 받아들였다.

​치매 증상으로 대소변을 벽과 이불에 묻히시는 시아버님을 친아버지처럼 정성껏 모셨다. 정신이 맑아지실 때면 아버님은 친딸보다 낫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이후 당뇨 합병증으로 발가락이 썩어 들어갈 때도 나는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함께 들으며 간호했다. 신기하게도 아버님의 발가락은 썩는 것이 멈추고 새살이 돋아났으며 건강도 점차 회복되었다. 가족들은 나의 변화를 보며 대법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수련을 지지해주었다.

​2.

내가 수련을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1999년 4월 24일, 천진 교육학원에서 발행한 《청소년과학기술박람(青少年科技博覽)》이란 잡지가 파룬궁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천진 동수들이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45명이 연행되었고, 중앙 정부에 호소하기 위해 다음 날 북경 국무원 신방국으로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대법의 일은 곧 나의 일이라 생각하고 시아버님과 집안일을 정리한 뒤 밤차를 타고 국무원 신방국이 있는 북경 부우가(府右街)로 향했다.

​4월 25일 이른 아침, 부우가 양쪽 도로는 전국에서 모인 동수들로 가득했다. 다양한 계층과 직업,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위로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부터 아래로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까지. 남녀노소 모두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게 서 있었다. 구호도 현수막도 없었으며 보행자와 시각장애인 통로를 비워두었다. 경찰들이 버린 담배꽁초까지 주워 담아 주변은 티 없이 깨끗했다. 이를 본 경찰들도 “무엇이 덕(德)인가, 이것이 바로 덕이다.”라며 감동했다.

​수련생 대표들이 면담했고 나머지 수련생들은 서쪽 담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어떤 동수는 대법 책을 손에 들고 읽었고 어떤 이는 연공했다. 앞에 선 동수들이 지치면 뒤에 있는 동수들이 자동으로 교대해 뒤에 앉아서 좀 쉬게 했다.

우리는 이렇게 밤 9시까지 조용히 기다렸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흩어졌다.

​당시 지방 정부에서 버스를 제공해 수련생들을 귀가시켰는데 우리 대법 수련생들은 모두 사상이 단순하고 심지(心地)가 선량해서, 아무 생각 없이 버스에 탔다.

하지만 뜻밖에도 버스는 북경을 벗어나자마자 멈춰 섰다. 경찰은 우리를 마치 범죄자 다루듯 했고 화장실 이용조차 금지했다. 결국 우리를 보정(保定)시의 국보대대의 마당에 가두었다. 그곳에는 북경에 상방하러 온 수천 명의 동수들이 무장 경찰의 감시 아래 굶주림과 갈증 속에 갇혀 있었다.

​다음 날 찌는 듯한 폭염 속에서 동수들은 고통을 겪었다. 거의 하루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마당에 있는 유일한 수도꼭지에는 사나운 개를 묶어두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모두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으며 또 피곤하고 더웠는데 피로가 극에 달했다.

​바로 이때 한단에서 온 한 젊은 여자 동수가 일어나 여러 사람을 이끌어 《홍음》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고 온몸에서 일종 성결한 빛을 내뿜는 듯했는데 그 순정함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구절을 선창하면 모두 따라 외웠다.

​마음 고생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
몸 고생은 고생이 아니나니
마음 수련이 가장 어렵도다
고비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데
곳곳마다 마(魔)로다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겠노라
세상 고생 겪을 대로 겪나니
세간 벗어나면 부처로다

​그녀의 선창에 따라 한 수 한 수 법을 외우는 소리가 천지에 울려 퍼지자 동수들의 정신(精神)이 좋아졌고 정념(正念)이 솟구쳤다. 현장에 있던 모든 동수들이 허리를 곧게 펴고 몸을 바로 했으며, 두 손을 제인하거나 허스했다. 모두 겸허하고 공경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우주 대법을 위웠고 이 크고 맑은 목소리가 층층 창우를 관통해 우주 사이에 메아리쳤다. 그 장면은 아주 감동적이 었고 경찰들도 그 엄숙하고 성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었다.

​나중에 많은 경찰과 정부 부서 인원들이 와서 우리들의 사진을 찍고 이름과 주소 등 인적 사항을 기록한 후 풀려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4.25 당일 장쩌민은 이미 살기를 발동했고 몇 달 후인 720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과 단속 및 박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4.25 이후 사회에서 사람들의 파룬궁(法輪功)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고 분위기도 다소 긴장되기 시작했다. 본래 대법(大法)을 지지하거나 호감을 느꼈던 사람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공산당의 각종 정치 운동이라는 피바람을 겪으며 살아온 노인들은 정치적 폭풍이 곧 닥칠 기미를 더욱 민감하게 감지하며 불안해했다. 오직 진정하게 파룬궁을 수련하는 대법제자들인 우리만은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쩐(眞), 싼(善), 런(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기에, 낮에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밤중에 귀신이 문을 두드려도 무섭지 않다는 식의 당당한 심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평소 하던 대로 흔들림 없이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했다.

​어느덧 7월이 되자 정치적 분위기가 갑자기 긴박해졌고, 공산당이 파룬궁을 탄압할 것이라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퍼졌다. 7.20을 앞둔 어느 장날인 7월 17일(음력 6월 5일), 현 보도소에서는 다시 한번 대규모 단체 연공 홍법 활동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내가 사는 향진으로 정해졌다.

​그곳은 비교적 큰 향진이라 매달 음력 5일과 10일이면 농산물 장이 섰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장을 보러 모여들었다. 먹거리와 옷가지, 생필품을 파는 각종 노점과 장사꾼들이 시장을 가득 메웠으며 사람들이 사고 싶은 물건은 거의 다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장을 보거나 구경하며 물건을 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시장 전체가 사람들의 소리로 떠들썩하며 매우 번화하고 활기차게 붐볐다.

​시장 면적은 약 2만 제곱미터(二十畝) 정도로 매우 넓었으며 남편 직장 맞은편에 있었다. 청소를 하고 회의장을 배치하며 동수들이 단체 연공을 할 수 있도록 가부좌용 방석을 준비하는 임무는 우리 진과 주변 몇몇 마을의 동수들이 맡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회장을 배치하기 위해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천목(天目)에 이러한 광경이 나타났다. 우리 수천 명의 동수들이 연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들고 위장복을 입은 군인 무리가 우리를 포위하더니, 총을 겨누고 언제든 사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면에는 한 명의 사악한 우두머리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고전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것처럼 웃통을 벗고 커다란 칼을 든 채 참수를 준비하는 망나니가 서 있었다.

​나는 연공장 한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그 사악한 우두머리가 나를 가리키며 “너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나는 담담하게 일어났다.

​”이래도 계속 연마할래?”

​”하겠다!”

​사악한 우두머리가 망나니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며 신호를 보내자, 망나니가 즉시 커다란 칼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앞에 섰지만 나는 조금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내 이마를 가로로 만져보더니 말했다.

“여기에 베인 흔적이 있구나. 너는 전생에 법을 얻기 위해 머리가 잘린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바로 이 자리를 벨 것이다.”

​말을 마치며 커다란 칼을 휘두르자 순간 머리 윗부분이 날아갔다. 나는 원신(元神)이 아스라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장면은 곧바로 아주 광활한 수면 위로 바뀌었다. 나는 물속에 서 있었는데 물이 이미 가슴까지 차올랐고 계속해서 위로 차오르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한 자 길이의 나무빗 같은 물건이 유유히 회전하며 내려오더니 수면에 떨어지자마자 작은 배로 변했다. 나는 그 배에 올라탔다. 갑자기 자신의 배가 만삭이 된 임산부처럼 매우 커진 것을 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또 임신을 했지?’

​다시 보니 작은 배는 맷돌만 한 거북이로 변해 있었다. 거북이는 온화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눈을 깜박이며 거북 등 위에 누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거북의 목을 베고 등 위에 누웠는데 매우 편안했다.

​거북이는 빠르게 앞으로 헤엄쳐 나갔고, 양옆의 물은 소리를 내며 갈라지며 자동으로 길을 내어주었다. 곧 전방에 커다란 산이 나타났고, 산 위에는 보살의 법신(法身)이 나타났다.

​나는 거북 등에서 내려 산을 향해 걸어갔다.

​앞에는 웅장하고 장려한 사찰이 있었고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한 동자(童子)가 문 커튼을 들어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 동자는 어릴 때 함께 자란 여자 친구 삼밀(三密)이었는데, 이때의 삼밀은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무심결에 말했다. “삼밀아, 네가 왜 여기 있니?”

​삼밀은 부드럽게 미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니 보살이 연꽃 좌대에 앉아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사유 전감(思維傳感)로 “이제 짐을 내릴(하차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보살이 두 손을 뻗자 아기 한 명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받쳐졌고, 내 배는 즉시 비워지며 아주 가벼워졌다.

​보살은 빨간 끈을 아기의 몸에 묶더니 곧바로 아기를 삼밀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를 이곳에 맡겨 길러야 한다는 뜻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장면이 즉시 사라졌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생각했다. ‘방금 천목으로 본 광경은 무슨 뜻일까? 법에 대한 나의 확고함을 시험한 것일까? 그럼 뒤의 장면은 또 무슨 뜻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칼산과 불길 속이라 해도 대법을 수련하는 나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확고한 마음으로 장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날의 홍법 활동은 극히 장관이었으며, 거의 현 전체에서 참여 가능한 모든 동수들이 왔다. 약 5~6천 명의 동수가 단체 연공에 참여했다. 그 성대한 광경은 장엄하고 신성했으며 대법의 자비와 위엄을 나타내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것은 우리 현 보도소에서 처음으로 조직한 대규모 홍법 활동이자 마지막 활동이었다. 당시 동수들이 사진도 많이 찍고 녹화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뒤이어 들이닥친 천지를 뒤덮는 사악한 박해 속에서 이 소중한 영상들은 대부분 보존되지 못했다. 오직 소수만이 명혜망에 올라갔을 뿐이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번 대규모 홍법을 조직했던 우리 현 보도소 소장은 매우 선량하고 용기 있게 책임을 다하던 젊은 남자 동수였는데, 7.20 박해가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을 견지하고 쩐(眞), 싼(善), 런(忍)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경의 박해를 받아 사망했다.

​7월 20일 0시부터 전국 각지의 보도소장과 보도원들이 갑자기 체포되고 가택 수색을 당했다. 7월 22일, 파룬궁을 박해하는 정치 운동이 천지를 뒤덮듯 시작되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신문, 선전 매체, 인터넷이 전방위적으로 파룬궁을 모함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24시간 내내 방송했다. 순식간에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 붉은 공포가 신주(神洲) 대지를 뒤덮었고 하늘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좋으신 사부님, 이렇게 좋은 대법을 중공은 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모함하며 박해하는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북경 국무원 신방국(信訪局)에 가서 상황을 알리고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전국 각지에서 대법제자들이 무리 지어 대법과 사부님의 공정함을 요구하기 위해 북경으로 상경하면서 북경행 기차와 버스는 만원이 되었다. 그 당시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에 모인 사람들은 대다수가 북경에 상경하려는 파룬궁 수련생들이었다.

​겁에 질린 대마두는 정부 모든 기층 조직에 엄격히 통제하고 사수하여 파룬궁 수련생들의 북경 상경을 엄금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문을 지키고 자신의 사람을 감시하라. 어느 지역에서 수련생이 상경하면 해당 지역 관리를 즉시 파면시키겠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층층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추격하고 가로막으며 수련생들의 상경을 막았다. 또한 구족을 멸하는 식의 사악한 수단을 동원해 수련생들이 사부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는 것을 저지했다.

​그 시절 북경으로 가는 거의 모든 여객 열차와 버스를 검문했다. 북경에 들어가는 모든 인원은 반드시 층층이 몸수색과 심문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북경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수많은 검문소가 설치되었고, 실탄을 장전한 무장 경찰과 군대가 북경으로 향하는 모든 차량과 행인을 심문하고 가방을 뒤졌다. 이 과정에서 상경하던 수련생들이 줄줄이 가로막히고 억류되었다. 국무원 신방판공실 또한 사람을 잡아 가두는 곳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의 대법제자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가듯 북경으로 가서 법을 수호하고 대법을 실증했다.

​합법적인 민원의 길이 막히자 우리는 북경 천안문 광장에 가서 연공하고 현수막을 펼치며 “파룬따파하오!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라고 외쳤다. “불공정에 처한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도항》 〈미국 서부법회 설법〉)

​그 시기 대법제자들이 법을 실증한 비장한 역사는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릴 정도였다. 창우(蒼宇) 사이에 영원히 마멸되지 않을 휘황함과 위덕을 남겼다.

​2000년 정월, 설을 쇠고 난 후 남편이 연차 휴가 중이라 시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틈을 타서 나는 현지 동수 12명과 약속했다. 다시 북경에 가서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대법을 수호하며 실증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탄 택시가 북경의 남문인 탁주(涿州)에 이르렀을 때 가로막혔다. 검문소에 붙잡힌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았는데 모두 북경으로 법을 수호하러 가는 대법제자들이었다. 많은 무장 경찰이 실탄을 장전한 채 동수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한 나는 함께 온 몇몇 동수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도로변의 옥수수밭으로 뛰었다.

​우리는 농경지를 가로질러 층층의 검문소를 우회하고 곳곳의 검문을 피해 다시 택시를 잡아 마침내 먼지를 무릅쓰고 천안문 광장에 섰다.

​출발할 때는 12명이었으나 겹겹의 봉쇄와 차단을 거치면서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 5명뿐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자신의 사전(史前) 서약을 이행하려 했다. 사악이 대법을 박해할 때 우리는 생명과 선혈로 대법을 수호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 서서 우리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두전포륜(頭前抱輪) 동작을 했다. 이 순간 천지가 마치 정지한 듯했고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며, 나는 마침내 불가에서 말하는 ‘공(空)’이 어떤 상태인지 체득했다.

​경찰차가 우리를 향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와 멈췄고, 문이 열리더니 늑대나 호랑이 같은 경찰 7~8명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우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폭력적으로 구타한 뒤 경찰차에 실어 천안문 파출소에 구금했다.

​파출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천안문으로 법을 실증하러 온 수많은 대법제자가 갇혀 있었다. 각급 지방 정부와 단위의 관리들에게 연루되지 않도록 대법제자들은 모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경찰들은 전기봉으로 독하게 매질하며 동수들을 위협했다.

​”이름을 대지 않으면 너희를 서북 대사막으로 끌고 가 총살하겠다.”

​우리는 정말로 한 무리씩 버스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수련생들을 보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이 수련생들이 동북이나 서북의 어느 비밀 기지로 끌려가 장쩌민 깡패 집단의 장기 적출을 위한 장기 은행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방 안에는 20대 초반의 아주 선량한 청년이 있었는데 대학생이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누님은 수련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내가 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수련생이라고 말하자 그는 매우 놀라고 감동하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누님, 무서워하지 마세요.”

​사악한 자들이 어떻게 우리의 개인 정보를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상경한 수련생들을 차단하기 위해 북경 주재 판사처 직원이 감방으로 나를 찾아왔고 그날 나는 현지 공안국으로 납치되었다. 그날이 정월 열이렛날이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