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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 만큼 높다고 해서 꼭 대법의 요구에 부합하진 않아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한 작은 인식

산동 대법제자 중맹(眾萌)

【정견망 2026년 01월 17일】

법을 얻은 초기부터 나는 사부님께서 《전법륜》 제3강 ‘수련은 전일해야 한다’는 소절에서 말씀하신 ‘네댓 명의 층차가 극히 높은 대각자’에 관한 대목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사부님께서 왜 이 대목을 말씀하셨는지 근본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 서부법회설법》에서 같은 의혹을 가진 동수가 이 문제를 제기해 사부님께 가르침을 청했고,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의혹을 풀어주셨으나 자신의 층차에 한계가 있고 오성(悟性)이 부족해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여전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비교적 보편적이어서 동수들과 여러 차례 교류하고 탐구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동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수련인은 반드시 이 정도까지 고요해(靜)져야만 더 높은 경지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만약 이 단락의 설법이 우리에게 청정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라면 왜 ‘청정심(淸靜心)’ 소절에 넣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다. ‘수련은 전일해야 한다’는 절에 놓인 이상, 이는 불이법문(不二法門)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단락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 한 사람이 이런 정도로 고요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네댓 사람이 거기에 앉아 모두 그런 정도로 고요하고, 마치 깊은 못의 고인 물(一潭死水)과도 같이 아무것도 없어, 내가 그들을 감수(感受)하려고 해도 감수할 수 없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정말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운, 그런 기분을 느꼈다.”(《전법륜》)

이 설법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사부님께서 이런 청정한 상태를 긍정하신 것이라면 마땅히 위안을 느끼시거나 기뻐하셔야지 왜 괴로우셨을까?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사부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태가 아닐까?

몇 년 전 《2004년 뉴욕 국제 법회 설법》을 공부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주의 과거는 사(私)적인 것으로, 사람을 두고 말하면, 정말로 관건적인 시기에는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정법(正法)을 시작할 때, 일부 신들은 나에게 “당신만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씁니다”라고 했다. 당신들이 들어도 불가사의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대법이 육성한, 다른 사람을 위한 정법정각(正法正覺)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하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은 역사에 따라 결속된다.”

“일부 조기(早期)에 법 공부하던 사람은 나는 집에서 책을 본다고 하는데 바로 대법제자가 나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사오(邪悟)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오 하지 않은 사람은 그래도 좋은 축에 속한다. 이 몇 년간 대법제자들은 모두 박해를 받으면서도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며 진상을 알리고 있는데, 그가 집 안에서 어떻게 책을 보든지 간에 어떠한 제고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만약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비단 제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대법제자’, ‘대법제자’여! 무엇이 ‘정법시기 대법제자’인가? 우주 중에서 이것은 제1의 칭호이며 제일 위대한 생명이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 자신이 제도 되는 것만 상관하는데, 그럼 되겠는가? 그러면 어찌 ‘대법제자’일 수 있는가? 무엇을 ‘정법시기 제자’라고 하는가? 당신은 법을 실증하였는가? 대법이 당신에게 좋은 점을 주어 당신이 왔으나, 대법이 수난을 당하고 있을 때 당신은 오히려 숨어서 대법을 위하여 한 마디 공정한 말을 못한다. 당신은 하나의 평범한 사람보다도 못하면서 또 무슨 집에서 법 공부를 한다고 말하는가? 박해 중에서 중생들은 모두 독해되고 있는데, 당신이 숨을 수 있는가? 대법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가서 진상을 똑바로 알리며 무엇 때문에 중생을 구도하려고 하는가? 왜냐하면, 이는 바로 대법제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나, 리훙쯔(李洪志)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이며, 대법제자는 바로 이러한 수련인이다.”

이 두 단락의 설법을 보고 마음속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수련은 전일해야 한다’에서 말씀하신 이 네댓 명의 층차가 극히 높은 대각자들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생겼다. 우주가 성(成)·주(住)·괴(壞)·멸(滅)의 법리 속에서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사부님께서는 대궁(大穹)의 무량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심력을 다 소모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의 다 소모하셨다. 대법제자는 사부님께서 선택하신, 심후한 근기와 위대한 책임을 가진 한 무리 생명들이다. 중생이 복멸(覆滅)의 운명을 바꾸려면 반드시 위사위아(爲私爲我)한 구법리에서 벗어나 신우주 대법의 요구에 동화해, 위타(爲他)한 생명이 되어야만 진정으로 괴멸의 순환에서 벗어나 원용불멸(圓容不滅)에 도달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중생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실 때, 대법제자들이 사부님의 정법을 돕기 위해 험난함과 심지어 생사의 겁난에 직면했을 때,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높은 이 생명들은 무엇을 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돌보며 그곳에 앉아 고요하고 고요하며 고요하게 있었다. 기껏해야 사부님께 “당신의 성공을 빈다”라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만약 된다면, 와 정말 대단하다, 나도 당신에게 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구세력(舊勢力)ㆍ구(舊) 생명에게 건드려진 후 조성된 저애력과 세간에 충만 된 사악한 기세를 보고 중생들은 각자 사념(私念)을 품었다. 다수는 아마 이 일은 성공하기가 몹시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으며, 만약 안 된다면 그럼 나도 연루될 수 있다고 여겨, 이 때문에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다.”(《각지 설법 5》〈2005년 캐나다 법회 설법〉)

나는 이로부터 구우주의 위사(爲私)한 본성이 남김없이 드러난 것을 보았다.

구우주 내의 생명들이 층층이 이러하며, 사람이란 이 가장 낮은 층에 표현되는 것은 지인이나 친구들이 우리에게 “안전에 주의해, 좋으면 집에서 혼자 연마하면 그만이지, 여기저기 다니지 마, 위험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악의 일관된 주장도 이와 같다. “집에서 혼자 연마하면 누가 당신들을 상관하는가? 왜 기어코 남을 선동하려 하는가! 스스로 번거로움을 자초한다!” 이것은 단지 사람의 한 가지 표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우주 내 생명들이 상하로 대응하는 필연적인 표현이다.

그들의 뼛속 깊은 자사(自私)는 근본적으로 대법에 동화되려 하지 않고, 단지 ‘고인 물’과 같은 고요함(靜)으로 구우주의 쇠망을 연장하려 할 뿐이니, 구우주 생명의 지혜 역시 고작 이 정도일 뿐이다. 우주 내의 이러한 중생들에게는 본성이 그러하니 탓할 수도 없으며, 사부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로우시며 대법은 그들을 구도할 수 있다. 대법제자로서 만약 이 생명들과 같은 상태라면 그것은 법을 얻지 못한 것과 같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私)야말로 구우주 괴멸의 근원이다. 창세주께서 중생을 위해 심혈을 다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대법제자들이 참혹하게 박해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능력이 있음에도 돕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 역시 끝에 다다랐음을 알지 못하니, 아마 이것이 사부님께서 마음 아파하신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기공이란 무엇인가? 많은 기공사가 모두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 많은 기공사가 그 한 층차 중에서 말하지만, 나는 더욱 높은 층차에서 기공에 대한 인식을 말하므로 그들의 인식과는 뚜렷이 다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법은 과거의 기공사들이 말한 것과 ‘완전히 다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은 과거 우주 중생들이 아는 수련이 아니라 정법(正法)이며, 과거의 낡은 법리 기제와 생명 본질을 진정으로 개변하는 진정한 ‘수련’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될 수 없으며, 과거 기공사가 말한 기(氣)를 연마하는 것을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누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수련은 전일해야 한다’는 단락 마지막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그에게 대학의 것을 가르쳐 주는데, 그는 늘 나에게 어떻게 인도하는가, 어떻게 의념활동을 하는가 하면서 초등학생의 일을 묻는다. 그는 이미 이렇게 하는 데 습관이 되어, 기공은 곧 이런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이런 것이 아니다.”

오직 진정으로 개변하고 법의 기점에 서서 문제를 보아야만 그것이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표면적인 변화일 뿐 뼛속에는 여전히 낡은 이념이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미래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엄숙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의 문제다.

만약 대법제자가 이 신구(新舊) 우주 생명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대법을 배우는 것이 단지 자신의 소위 제고와 원만, 나아가 장래의 성취를 위해서이며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경지와 아무리 고요한(靜) 상태가 있고 아무리 많은 진상 알리는 일을 할지라도 사부님의 요구와 대법의 표준에 도달할 수 없다.

《정진요지》 〈불법용어〉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나의 말을 곡해(曲解)한다면, 당신은 불교를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사부님 정법의 홍대한 내함을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바쁘게 오가는 것이 여전히 구우주 안의 초급, 중급, 고급이라는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사부님께서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에서 가르쳐 주신 바와 같다. “여전히 그것들의 산, 여전히 그것들의 물, 여전히 그것들의 신, 여전히 그것들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그렇게 성취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개변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표면형식을 좋게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옷 그것을 깨끗이 씻는다 해도 여전히 그 옛 옷인 것처럼, 말하자면 이런 뜻인데, 이 형용이 정확하지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인식하기에, 단지 대법 서적만 보고 다른 책을 보지 않는 것은 사람 쪽에서의 전일함이며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불이법문일 뿐이다. 오직 이 네댓 명 대각자의 상태 표현을 명확히 보고, 구생명이 위사(爲私)한 근본을 근본적으로 인식해야만 비로소 단지 대법을 이용해 자신을 원용하고, 대법을 이용해 자신을 제고하며, 대법을 이용해 난을 피하려는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신우주의 대법이 구우주의 법과는 근본적으로 별개의 것임을 진정으로 인식해야만 진정으로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미래가 원하는 것을 원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미래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지, 어떻게 걸어 들어가는지에 대한 ‘불이법문’의 엄숙한 문제이다.

글에 인용된 사부님의 설법에는 더욱 깊은 내함이 있다. 이상은 단지 개인의 현재 얕은 인식이니, 부족한 점은 동수들이 자비롭게 지적해 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홍음 3》 〈건곤을 다시 만들다〉를 공경히 적어 동수들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건곤을 다시 만들다

건곤을 다시 만들고 대궁을 바로잡고자
겹겹이 막는 저애를 돌파하네
정법은 낡은 먼지 씻는 것이 아니거니
동화갱신(同化更新)하여 대홍(大洪)에 진입하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