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질투심은 일반적으로 타인이 가진 우수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만이나 원망하는 심리 상태를 일컫는다. 그동안 나는 질투심 면에서는 별문제가 없다고 여겨왔다. 수련 전에도 내 주변에는 외모나 생활 등 여러 조건이 나보다 훨씬 뛰어난 자매들이 있었지만, 한 번도 부럽거나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든 적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강한 질투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파룬궁》 제3장 〈씬씽(心性) 수련〉에서 “질투심이 있는 사람은 남을 얕보고, 남이 자기를 능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며”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나는 늘 남이 나보다 나아야만 질투가 생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남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질투를 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어 당시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법(法)을 통해 이것 역시 질투심임을 알게 되었기에, 남을 무시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이 마음을 반드시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한 항목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나를 이끌어주는 동수가 2025년 대륙 법회 문장을 마지막에 발표된 것부터 거꾸로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러다 열일곱 번째 글인 《직장 환경에서 질투심을 수련해 없애다》(역주: 명혜망에 올라온 대륙법회 문장)를 읽고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나와 이토록 유사한 경험을 한 동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동수는 업무 환경에서 동료 A가 매우 가식적이라고 느꼈다. 예를 들어 A는 동수 앞에서는 무엇을 싫어한다고 표현해놓고선, 다른 사람이 그 물건에 대해 말하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A 자신은 남을 대할 때 매우 진실하고 선량하다고 생각했다. 동수는 이를 보며 “당신은 자신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불공평을 느꼈다.
그 동수는 깨달았다. 사실 A는 자기 인지 능력이 부족해 타인이 보는 모습과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동수는 “그녀가 스스로를 아주 좋다고 여기는데 실제 표현은 그렇지 않았기에 내가 불만을 느꼈던 것”이라고 썼다. 동수는 자신의 이런 상태를 일종의 ‘모호한 질투심’이라고 칭했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예전에 한 동수에게 이와 유사한 집착을 품은 적이 있었으나, 그것이 질투심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상대방이 나보다 뛰어난 점이 있어서 질투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생각하는 자신과 실제 보여주는 모습이 정반대라는 점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자신을 단순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게 생각이 복잡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여겼지만, 나는 그녀가 면전에서 남을 칭찬한 직후 나에게는 전혀 딴판인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에게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품었었다.
대법에 따라 실수(實修)하는 과정에서 심성이 제고됨에 따라, 나는 점차 남의 부족함을 보던 마음을 닦아버렸고, 수련은 안으로 힘을 써야 하며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정도(正道)임을 깨달았다. 타인에게는 자비롭고 선의로 이해해야 하며, 동수가 그런 나쁜 습관을 형성하게 된 배경을 양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동수와의 모순도 해소되었고 그런 일들을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내 공간장(空間場)에 숨어 있던 이 은폐된 질투심을 인식하지 못했다.
대륙 동수의 이 교류 문장은 나로 하여금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타인의 행위를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 왜 질투심인가?’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훌륭하지 않은데 왜 스스로 그렇게 잘났다고 생각할까”라고 여길 때, 우리를 자극하는 것은 ‘그녀 마음속의 자신’과 ‘남들이 보는 그녀’ 사이의 큰 격차다. 그녀 마음속의 자신은 실제의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데, 우리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고 그 수준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 불평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일종의 질투심이다.
일반적인 질투심과 다른 점은 이렇다. 일반적인 질투심은 상대방을 나와 비교하거나 타인과 비교하여 상대방이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면 이런 식의 질투심은 ‘실제의 상대방’을 ‘상대방 마음속의 자신’과 비교하거나, ‘실제의 상대방’을 ‘상대방이 남들에게 보여주려 하는 모습’과 비교하여, 실제의 모습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왜 질투심인지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떠올렸다. 사부님께서는 “여러분 알다시피 두 글자가 있는데 ‘수련(修煉)’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그 련(煉)을 중시하지만, 이 수(修)를 중시하지 않으며 이 수(修)는 마치 그 련(煉)을 수식하는, 수식어로 여긴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닦는 것(修)이 먼저이고 연마(煉)는 나중이라, 닦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전법륜법해》〈베이징(北京) 『전법륜(轉法輪)』 첫 발행식 설법〉)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질투(嫉妒)’ 중에서 ‘질(嫉)’의 함의도 간과하고 있었다. 사실 ‘질(嫉)’에는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뜻이 있다. 예를 들어 ‘질악여구(嫉惡如仇, 악을 원수 보듯 미워함)’는 타인의 악함 때문에 증오가 생겨 심지어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이를 더 넓게 이해하면, 타인의 결점 때문에 그에게 부면(負面) 사상을 갖는 것인데, 나 역시 그러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질투심이 아니겠는가?
또한 ‘질(嫉)’ 자를 파자(破字)하면 ‘녀(女)’와 ‘질(疾, 병)’ 두 글자가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신체에 유선염이나 부인과 등의 문제가 나타난 동수들은 색욕이나 다른 마음에서 자신을 찾는 것 외에도, 자신에게 이런 종류의 ‘질투심’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마음은 생기기 쉽지만 흔히 사소한 일로 치부되어 간과되곤 한다. 이것은 악(惡)의 표현이며, 선(善)을 닦는 대법제자가 절대 남겨두어서는 안 될 집착심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경고하셨다.
“여러분은 아마 과거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대업왕생(帶業往生)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겠지만,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방면에서는 좀 부족하더라도 조그마한 것은 대업왕생하여 다시 수련하는, 그것은 될 수 있지만,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고는 절대 안 된다. 오늘 내가 연공인(煉功人)에게 말한다. 당신은 이렇게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은 더욱 높은 층차의 수련으로서, 질투심은 반드시 제거해 버려야 한다.”
또한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 3》〈대뉴욕지역 법회 설법〉에서 장기간 병업(病業)의 교란을 받는 동수의 질문에 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정말로 당신들에게 물어보겠다. 당신은 진수(真修)하고 있는가? 당신은 정말로 대법의 요구에 따라 했는가?!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중에서 法輪功(파룬궁)을 박해하는 데 대한 불만을 갖고 있는 그러한 속인의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대법제자의 각도에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있는지?”
이를 통해 나는 대법제자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이런 속인들이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사상 행위조차 절대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는 것은 중생에 대한 자비 때문이며 목적은 중생 구도에 있다. 신통(神通)과 정념(正念)으로 악을 제거하는 것 역시 원한이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중생이 구도 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정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태가 바르지 않아 심각한 방해를 불러오고도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선(善)은 대각자(大覺者)의 기본 본성이기에 진정한 대법제자는 반드시 마음속의 모든 악념(惡念)을 제거해야 한다.
사부님의 오묘한 안배 덕분에 동수의 교류를 통해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감지하기 어려운 질투심을 인식해 커다란 누락을 보충할 기회를 가졌음에 감사드린다. 제자가 사존께 절을 올립니다.
현재 개인 층차에 제한된 인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6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