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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써서 법을 공부하니 정말 좋아

대법제자

【정견망】

1. 법을 얻은 초기에 게을리하지 않고 법공부를 하다

나는 1998년에 수련을 시작했다. 법을 얻은 후 오로지 수련에만 마음을 쏟았다. 당시 가사 일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거의 법공부, 법 암기, 법 필사에 사용했다. 때로는 법공부를 더 하기 위해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가부좌한 채 책을 보았으며, 너무 졸리면 고개를 숙이고 잠들기도 했다. 가부좌를 오래 해서 생기는 다리 통증이나 목의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깨면 다시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내게는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또 한 번은 법을 더 많이 필사하기 위해 며칠 밤을 침대에 눕지 않은 적이 있다. 졸리면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자고, 깨어나면 다시 필사했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자 내 공간장(空間場)에 있는 한 사악한 생명이 매우 화를 내며 험악하게 욕설을 세 번 반복하고는 떠나가는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그 생명이 욕하는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고, 그것이 달아난 뒤 나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져 졸음이 싹 사라졌다.

내용을 깊이 새기기 위해 법에서 언급된 “수련인으로서 주의해야 할 세부 사항”, “신의 표준은 어떠한지”,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지” 등에 관한 글귀를 따로 적어 두었다. 이렇게 하니 수련 중 일을 겪을 때 첫 일념(一念)이 법의 요구를 떠올릴 수 있었다.

1999년 4.25 당시, 사부님께서 당신은 법을 얻었지만, 아직 법을 얻지 못한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신 취지의 내용이 떠올라 망설임 없이 기차를 타고 북경(北京)으로 가서 법을 수호했다. 중남해에 도착했을 때 현장에 있던 한 동수가 중공이 6·4 사태처럼 우리를 대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주저 없이 앞줄로 파고들었다. 내 마음속에는 우주의 진리와 중생을 위해 내가 먼저 쓰러져도 좋다는 일념뿐이었다.

2. 법 필사와 법공부로 휴대폰 영상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휴대폰 영상을 보는 것에 미혹되어 때로는 몇 시간씩 보곤 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법공부를 해도 법을 얻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고 법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다. 더 무서운 것은 세 가지 일을 그저 형식적으로 하게 되면서 점점 나태해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 반드시 정과를 얻는다”(《2009년 대뉴욕지역 법회 설법》)는 구절을 떠올리며 초심으로 돌아가려 애썼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태해지고 정진하려는 의지를 잃었다. 이런 반복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해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나는 법을 처음 얻었을 때의 상태를 회상했다. 대법이 모함을 받을 때 다섯 차례나 북경에 가서 법을 수호하며 천안문(天安門)에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대법의 결백을 돌려달라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고 크게 외쳤던 일, 세 차례 세뇌반에 가고 다섯 차례 불법 구류되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또 불법 노교 처분을 받고 노교소 정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좋은 사람이며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 사부님께서 가지(加持)해 주시기를 빌었던 기억도 났다. 당시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加持)로 병업(病業)의 방식으로 당일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해낼 수 있었던 정념은 모두 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법공부하려는 열정은 어디로 갔는가? 안일한 마음과 사악한 박해를 견디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서서히 나태해지고 지혜를 잃은 것인가? 사부님께서 거듭 법공부를 강조하셨는데 왜 마음을 써서 공부하고 법에서 제고하지 못하는가?”

바위처럼 견고한 수련의 초심을 찾기 위해 마음을 다해 법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뒷부분을 읽고 나면 앞부분에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머릿속이 흐릿했으며 법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사악이 내가 마음을 다해 공부하여 법리를 깨달으면 자신들이 소멸될 것을 알기에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법륜》을 읽어도 상태가 변하지 않자, 해외 설법을 마음 써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릿속이 백지처럼 멍한 상태였기에 법을 필사하며 외우고 새기기로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필사하다 보니 머리가 점점 맑아졌고 법을 얻지 못하게 가로막던 장애가 사라졌다. 법의 표면적인 뜻을 명확히 알게 되면서 법을 이해하지 못하던 곤경에서 벗어났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휴대폰 영상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게 되었다.

3. 법공부 중에서 더 많은 법리를 체득하다

이 기간의 법공부와 필사를 통해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많은 법리를 깨달았다.

구세력에 대한 이해에 관해 법공부 중 깨달은 것은,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지만 구세력이 안배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중생 구도를 파괴하고 방해하여 결국 중생을 멸망시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행위는 사부님의 뜻에 완전히 위배되기에 죄악이 극심하며 결국 도태될 운명이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러 온 존재이며, 사부님과 서약을 맺은 생명이기에 역사적 사명을 잘 완수해야 한다.

설법 중 “대법제자로 말하면, 여러분은 이번 박해 중에서, 어떻게 구(舊) 세력이 억지로 우리에게 가져다준 박해를 제거해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할 것인지, 어떻게 대법제자의 길을 바르게 갈 것인지, 이번 박해 중에서 어떻게 중생을 구도할 것인지 하는 이것은, 모두 역사가 대법제자에게 부여한 책임이다.”(《2003년 워싱턴 DC 법회 설법》)을 읽었을 때 몸에 전율이 일었다. 예전에는 길을 바르게 걷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만 책임인 줄 알았는데, 구세력의 박해를 배제하고 안배를 부정하는 것 또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엄숙함을 느꼈다.

나는 이전에 적어 둔 구세력에 관한 사부님의 설법을 찾아보았다. “당신이 바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정념이 아주 충족하다는 것이다.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하고 사부의 요구에 따라 한다면 당신은 구세력을 부정하고 당신 자신의 길을 올바르게 걷는 것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동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구세력의 빈틈을 타는 일들을 돌이켜보니, 모든 번거로움은 대법제자에게 사람마음(人心)과 집착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어느 동수가 수련을 잘한다고 하여 모두가 그를 따라 배우면 구세력이 그 동수를 데려가 버리거나, 속인이 대법의 억울함을 풀어주길 집착할 때 유엔 인권기구가 오히려 인권을 박해하는 정부를 의장국으로 세우는 등의 사례가 그러하다. 하지만 사람마음과 집착이야말로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내려놓고 제거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전법륜》에서 “당신에게 한 가지 진리를 알려주겠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대법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사부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아서 조성된 것이 아닌가? 이것이 중생구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는가?

또한 일부 동수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데, 당연히 구세력의 안배가 있다. 사부님께서는 동수의 질문, 즉 임종을 앞둔 동수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에게 법을 읽어주면 가장 좋다. 이 시기에 마땅히 가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막론하고 모두 그 자신을 보아야 한다.”(《2007년 뉴욕법회 설법》)

어떻게 자신을 보는가?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한 생명의 선택은 그 자신에 의해 결정되며, 역사상에서 그가 어떤 소원을 빌었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그 자신에 의해서 결정된다.”(《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 설법》)라고 하셨다.

나의 이해로는, 자신이 결정한다는 것은 역시 당신의 일념이 법에 있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며 곧 속인이다. 사부님께서 속인을 관장하시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법에 먹칠할까 봐 걱정하며, 여전히 중생을 구도하고자 하는 것은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일념이기에 사부님께서 관장하실 것이다.

4. 관념을 바꾸는 것에 대한 이해

나는 “병업(病業)” 방면의 문제에 대해 나의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간단히 말해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을 넘길 때 사부님께서 설하신 법을 믿는가와 관념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부님께서는 설법 녹음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아주 빨리 좋아진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믿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는 그것을 모두 들춰내야 하고”라고 하셨는데 나는 연공인(煉功人)은 병이 없다는 것을 믿었다.

“연공인(煉功人)은 장래 수련에서 역시 편안하지 않으며, 신체에 많은 공이 나타나는데, 모두 아주 강렬한 것들이 당신의 신체 내에서 오가며 움직여서 당신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고 저렇게 불편하게 한다.”(《전법륜》) 이 역시 나는 믿었다. 나는 관념을 바꾸어 몸에 나타나는 각종 괴로움과 통증을 모두 공이 나오는 것으로 여겼다. 뒤집어내는 상태를 이틀에서 사흘 정도 견뎌낸 것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거의 일념으로 모든 병업 상태를 사라지게 했다. 《전법륜》에서는 “우리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라고 하셨다. 정말로 그러했다!

어떻게 관념을 바꿀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이 속인의 그 천백 년 이래 뼛속에 형성된 사람의 이치를 개변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사람의 표면적인 이 한 층의 껍데기를 벗어버릴 수 없으며 원만할 수 없다”(《정진요지》〈경고하는 말〉)라고 하셨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껍데기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반리(反理), 즉 사람의 이치다. 반리에서 벗어나 문제를 바라볼 때가 바로 정리(正理)이며, 초상적인 이치로 문제를 보고 생각하며 처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리는 이러하다. 좋지 않은 일과 모순은 업을 소멸하는 것이며, 사람마음(人心)을 폭로하고 사람마음을 제거하는 것은 제고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내 주변의 한 동수는 자주 “나는 당신의 심성을 높여주러 왔다”라고 말하는데 정말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4년 동안 끊임없이 모순이 나타났는데, 나는 매번 마음을 닦으며 그녀에 대한 반감에서 흔쾌히 받아들이는 상태로 변했다. 관념을 철저히 바꾸기 전 마지막 두 번의 모순 속에서 나는 당시 진심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었지만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정말로 이 고비를 넘기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넘기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평소 내가 말을 아주 강하게 했기에), 아주 친절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에게 “누가 당신을 화나게 했는가, 누가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음성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빚을 졌고 그녀는 빚을 받으러 온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나의 원한심과 질투심을 제거할 기회였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야만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중에 겉으로는 그녀를 받아들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매우 마지못해 했다. 그때 다른 일로 내 마음이 이미 한계까지 상처 입었다고 느꼈기에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다시 나를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일이 그대로 일어난다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나를 몹시 화나게 했다! 나는 당시 정말 그녀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고 감정이 거의 붕괴되었다. 그녀를 문밖에 세워두고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또 옳지 않다고 느껴져 계속해서 울었으며 고비를 넘기기가 정말 어렵다고 느꼈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다시 나를 점화해 주셨다. “너는 중생을 구도하러 온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단번에 깨달았다. ‘아, 나는 중생을 구도하러 왔는데 어찌하여 여전히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연연하는가?’

“사부님, 제가 틀렸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은사님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드렸고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나는 마침내 맑아졌으며 그때부터 완전히 관념을 바꾸어 더는 그녀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 개의치 않게 되었다. 나는 오직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것인가에만 신경 썼으며, 그녀를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잘못이라고 여겼다.

나중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법공부를 할 때 그녀가 나에게 “다음 장은 어떻게 시작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속에서 짜증이 나 “당신은 이미 여러 장을 다 썼는데 왜 아직도 물어요?”라고 다그쳤다.

그녀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 묻는 거예요”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왜 묻나요? 조금만 마음을 쓰면 알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생각을 돌려보니 내가 또 틀렸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나의 인내심 없는 집착을 제거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법을 아무리 많이 베껴 쓴들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법이 나의 수련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던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단번에 평온해져 얼른 그녀에게 사과했다.

법공부와 마음 닦음 중에서 나는 더욱 체득했다. 자신의 주변에 나타나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도 우연한 것이 없으며, 그것들의 나타남은 모두 자신의 인심을 폭로하고 자신을 연마하며 성취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신과 모순이 발생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인심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잘못된 것이다. 이는 수련자 앞에서 정말로 누가 좋고 나쁘며 누구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집착심을 제거하는 문제임을 말해준다.

5. 중생구도에 대한 이해

내가 《2003년 애틀랜타 법회 설법》 중 “그러나 오늘의 정법은 달라졌는데, 대법과 대법제자를 말함에서 좋다, 혹은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라는 부분을 공부할 때 마음속에 충격을 받았다. 원래 대법제자가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평소의 언행 속에서 나는 비록 대법에 먹칠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했고 “중생이 대법(大法)을 소중히 함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고”(《정진요지》〈정론〉)라고 했지만, 자신의 언행을 너무 중시하지는 않았었다.

내 주변에 접촉하는 세상 사람들을 구도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마음을 써서 법을 잘 공부해야만 가능했다. 나는 장기간 병업 상태에 있거나 세상을 떠난 동수들이 떠올랐다. 그의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그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의 상태를 보고 대법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또한 다른 공간을 듣거나 보는 동수들이 왜 교란을 받아 정신이 흐릿해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는가? 법에서 모두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법 위에서 수련하지 않고 집착심이 있어 조성된 것이 아닌가?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정진요지 2》〈교란을 배제하자〉) 만약 동수들이 모두 법에서 수련하고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을 모두 법으로 옳고 그름을 가늠하며 진정으로 법에서 진지하게 수련한다면, 파괴할 수 없는 정체를 형성할 것이고 손실이 분명 적어질 것이다.

나는 법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이 중생구도이며, 자신이 잘 수련하는 것 또한 자신의 체계 내의 모든 중생을 구도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동수가 잘 수련하는 것 역시 그 체계 내의 모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고, 잘 수련하지 못하면 그의 체계 내 중생을 망치는 것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만약 이 한 사람이 제도되어 수련성취 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무량무계(無量無計)한 생명이 수련성취 될 것인가?”(《대뉴욕지역 법회 설법》)라는 부분을 공부하며 나는 이해했다. 자신과 동수가 잘 수련하는 것은 단지 중생이 구도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무량무계한 생명이 수련 성취되고 구도되는 문제이며 그 의의가 너무나 중대하다는 것이다!

“사부는 때로 당신들이 한 그런 일을 볼 때 정말로 아주 상심한다. 그러나 나보고 당신을 포기하라고 하면 사부는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 정말로 쉽게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대뉴욕지역 법회 설법》)

“매 사람을 나는 다 제도하려고 한다. 오직 그가 법을 배웠다면 나는 그를 제도하려고 하며 나는 그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 (《2004년 시카고 법회 설법》)

사부님의 자비는 이토록 홍대하시다!!! 법을 읽을 때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으며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함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라, 꼭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법제자의 慈悲(츠뻬이)이다.”(《대뉴욕지역 법회 설법》)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동수의 어떤 집착심을 보았을 때 인내심을 갖고 법 위에서 교류하여 그를 제고하게 하고, 동수가 수련할 줄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 인내심 있게 그를 법 위에서 수련하도록 인도하며, 나태해지거나 법에서 떨어져 수련하고 싶어 하지 않는 동수를 보았을 때 인내심 있게 법 위에서 그를 일깨워야 한다. 동수가 한 층차 제고하는 동시에 한 층의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며, 동수가 끊임없이 제고한 후에는 구도하는 것이 어찌 한 층뿐이겠는가? 그렇다면 더 많은 중생이 구도를 받게 되지 않겠는가! 또한 동수들이 모두 법에서 끊임없이 제고한다면 ‘세 가지 일’을 분명 더 잘할 것이고 사람을 구하는 강도는 더욱 커질 것이다.

내가 “사실 내가 일찍이 말했다. 당신들의 마음상태가 아주 바를 때 스파이는 감히 이곳에 머물지 못하는바, 그는 단지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바른 마당에 의해 동화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제자가 내보낸 순정한 이 마당은 사람의 모든 사상의식 속의 좋지 못한 것을 제거할 수 있고, 순정한 마당은 그것을 해체할 수 있으며, 사람의식 중의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해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구도와 慈悲(츠뻬이)의 다른 체현이다.” (《2003년 미국 중부법회 설법》)라는 구절을 공부할 때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자신이 잘 수련하고 동수가 잘 수련하여 우리가 정체적으로 모두 잘 수련할 때, 우리의 이 강력하고 순정하며 순선(純善)한 마당의 범위 내에서 사람의 나쁜 사상과 좋지 않은 의식은 모두 해체될 것이며 사악은 악을 행할 곳이 없게 된다.

6. 수련이 좋고 나쁜 경계와 표준에 대한 이해

사부님께서는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한다면 곧 위덕이 없으며, 한 말이 법에 있지 않으면 중생을 구도한다는 것을 말할 나위가 없으며, 한 말에 위덕이 없고 힘이 없다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사악도 틈을 탈 것이다.” (《2005년 맨해튼 국제법회 설법》)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잘 수련하고 못 수련하고의 경계와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로 구우주의 법리는 ‘위사위아(爲私爲我)’이고, 신우주의 법리는 ‘위타위공(爲他爲公)’이니, ‘위사’인가 ‘위타’인가가 바로 잘 수련하고 못 수련하고의 경계와 표준이다. 나는 예전에 단지 구우주의 법리가 ‘위사위아’인 줄만 알았지, 자신이 바로 구우주 안의 생명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위사위아’의 마음을 닦아 없애지 않는다면 구우주의 법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신우주로 들어갈 수 없다. 결속하는 그날이 오면 구우주는 해체되어 도태될 것이고 그 안의 생명도 따라서 도태될 것이다. 법리가 명확해지자 나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관념을 바꾸고 신우주의 법리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순정하게 했다.

우선 나는 ‘위사위아(爲私爲我)’의 관념을 내려놓았다. 더는 동수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는지 여부, 나를 화나게 하는지를 보지 않고, 오직 상대방이 끊임없이 잘 수련할 수 있도록 생각했다. 동수들에게 단체 법공부 환경을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함께 정진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법리를 깨달은 후, 나는 휴대전화 안전에 주의하지 않아 내가 문밖에 세워두었던 한 동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혼자 집에서 법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와 최근 며칠간 내가 마음을 다해 법공부를 하며 사상이 변화된 생각을 나누었더니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기꺼이 우리 집에 와서 계속 법공부를 하기로 했다.

법공부 중에 나는 이 동수와 예전에 나와 자주 모순이 생겼던 동수 모두 ‘좋은 몸을 갖겠다’는 목적으로 수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루는 법공부를 마친 후 그녀들에게 “당신들은 왜 수련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들은 거의 동시에 “수련해서 돌아가야죠, 사부님을 따라 집에 가야죠!”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내가 보기엔 당신들 둘 다 좋은 몸을 갖기 위해 수련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녀들은 아주 정직하게 “맞아요”라고 했다. 나는 “《전법륜》에서 ‘당신이 각종 구하려는 목적을 품고 와서 공(功)을 배우고 대법(大法)을 배우려고 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당신에게 한 가지 진리를 알려주겠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이 단지 좋은 몸을 갖겠다는 마음만 품고 배운다면 법을 얻을 수 없지 않을까요? 사부님께서 어떻게 당신들을 관장하시겠어요? 사부님을 따라 집에 가고 싶다지만 갈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겠다는 말은 단지 소원일 뿐 실현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나중에 온 동수는 나에게 “당신이 핵심을 짚었습니다. 당신은 침을 놓듯 나의 실체를 찔렀습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으며 앞으로 반드시 잘 수련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동수와 몇 번 교류했을 때 그녀는 매번 말없이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 나는 내 말이 매우 직설적이고 완곡하지 못해 좋은 의도였음에도 무의식중에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싶어 그녀의 기분을 물었다.

그녀는 “나는 내가 수련할 줄 모르는 것이 한스러워요. 당신이 나를 위한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 좀 강경하게 느껴집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내 말이 강경한 것은 내 잠재의식 속에 질책(指責), 원망, 조급한 마음이 섞여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순정하지 못한 것이니 나 자신을 수련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제고합시다.” 나는 그녀를 격려했고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이해했다는 듯 웃었으며 나 역시 마주 웃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 수련할 줄 모른다고 했고 나는 짜증이 났다.

“당신이 우리 집에 온 지 3~4년이 되었는데 매일 무엇을 배웠나요? 내가 몇 번이나 마음 닦는 법과 안으로 찾는 법을 교류하지 않았나요? 여러 가지 예도 들어주었고 명혜망도 보면서 여전히 수련할 줄 모른다고 하니 정말 할 말이 없네요.”

내 말을 듣고 그녀는 또 눈물을 흘렸다. 나는 갑자기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라, 꼭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법제자의 慈悲(츠뻬이)이다.”(《대뉴욕지역 법회 설법》)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나 자신이 또 심성을 지키지 못했고 인내심을 닦아내지 못했으며 여전히 습관적으로 질책하고 원망했던 것이다. 내가 또 잘못했음을 깨닫고 동수가 나에게 제고할 기회를 준 것을 소중히 여기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그 동수가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위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사부님께서 당신의 입을 빌려 무거운 망치로 나를 깨워 수련하는 법을 알려주신 것임을 이해합니다. 어제 집에 간 후 얼굴이 속에서부터 밖으로 뜨거워졌는데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편안했습니다! 앞으로 나의 부족함을 보면 더 많이 말해주세요. 나는 수련할 줄 모르니 당신이 알려줘야 합니다.”

이 얼마나 좋은 동수인가! 그 후 나는 다시 인내심 있게 그녀와 교류했다. 그녀는 “나는 예전에 자신의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못하고 늘 흐리멍덩했습니다. 앞으로 나도 마음을 다해 법을 공부하고 잘 수련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의 관념이 바뀐 후 한 번은 발정념을 할 때 주변에 끝없이 넓고 빽빽하게 모여 있는 분홍색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마치 분홍색 빛을 받는 것 같았고 온몸이 분홍색이었으며 손에 든 깃발조차 분홍색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환호하고 축하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들이 내가 법리를 인식하고 관념을 바꾼 후에 구도된 중생들이며, 자신들이 구도된 것을 환호하며 축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신 것은 내가 마음을 다해 법공부를 한 것에 대한 격려였다. 마음을 다해 법을 공부하는 것은 정말 좋다!

이에 나는 또 동수들이 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점이나 어느 구절의 법이 자신의 어떤 점을 짚어주었는지를 주변 동수들과 많이 교류할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서로 제고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동수들이여, 우리 마음을 다해 법을 공부해서 정체적으로 더 빨리 제고하고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정진합시다! 다시 한번 대법에 감사드리고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문장 중 법에 대한 깨달음이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