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아무리 좋지 않고, 아무리 나쁘더라도 마치 강철과 같은 것이라도 불법의 慈悲(츠뻬이)한 위력 앞에서는 모두 녹아버린다. 그러므로 마(魔)는 보기만 하면 두려워한다. 그것은 정말로 두려워한다. 그것이 녹아버릴 수 있고 없어질 수 있는데, 절대 사람이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다.”(《미국서부법회설법》)
개인적인 이해로는 ‘용(溶)’과 ‘융(熔)’의 근본은 사실 모두 ‘용(容)’ 자에 있다.
수련인이 만약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일을 용납하지 못하며, 동수 간의 간격과 모순, 부족함을 배척하는 데 익숙해져서 모두 타인의 문제라고 여기고 자신을 그 속에 둘 줄 모르며, 그 속으로 포용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면, 자비의 에너지 또한 미칠 곳이 없게 된다. 이때 겉으로 아무리 일을 많이 한다 해도 그것은 대개 속인의 일 처리와 억지로 구함(强求)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 무엇을 바꿀 수 없다.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빠짐이 없는 정체를 형성하기는커녕 법 위력의 가지조차 받을 수 없으며, 더욱 위험한 것은 극단으로 치달아 자신만의 작은 무리를 끌어모으고, 불평불만이 가득하며, 마침내 오만해지고 안하무인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오직 먼저 자아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용입(容入)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거듭 승화하여 ‘용(溶)’과 ‘융(熔)’의 법력을 드러내어 모순을 녹여 없애고 심성을 승화시켜, 중생을 진정으로 제도하는 목적에 도달하고 대법제자의 빠짐 없는 정체를 진정으로 형성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쉽게 ‘높은 곳으로 깨닫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수련에서 이와 똑같이 중요한 다른 한쪽 면인 ‘낮은 곳으로 닦아 나가는 것’, 즉 실제적인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소홀히 하곤 한다.
특히 속인 중에서 능력이 비교적 강하고 사리가 예리한 동수일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바르게 가고 있고 깨달음도 좋으니 다른 사람들은 다 안 된다’라는 마음을 싹틔우기 쉽다. 이것은 손오공을 떠올리게 한다.
보리조사는 그에게 ‘오공(悟空)’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능력이 하늘을 찌르고 칠십이변을 부리며, 심지어 오만하게 스스로를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 칭했다. 그러나 아무리 높게 깨달은들 심성이 제때 따라가지 못하면, 뼈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오만함과 온갖 인심(人心)이 싹트기 마련이다. 사람은 흔히 마음속으로 사람을 삼십육등으로 나누고, 자기 뜻에 맞지 않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혐오와 배척심을 품으며, 자기가 남보다 더 잘 꿰뚫어 보고 더 잘 닦는다고 착각한다. 심지어 프로젝트를 맡는 많고 적음이나 크고 작음을 수련 경계로 삼아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은폐된 청고(淸高)와 우월감이야말로 고만(孤傲), 오만, 그리고 질투심이 싹트는 온상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경계하지 않고, 나아가 눈에 거슬리는 사람과 일을 습관적으로 모두 ‘구세력의 간섭’ 탓으로 돌려버린다면, 겉보기에는 법을 수호하고 정념을 유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강한 인심과 인념이 뒤섞여 있는 것이며, 신성한 형식을 빌려 자아를 실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수련은 법리를 얼마나 높이 깨달았는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얼마나 충분히 낮출 수 있는가에 있다.
손오공은 여래불에게 오행산 아래 눌려 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손행자(孫行者)’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행(行)’ 자에는 극히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능력이 아무리 클지라도 발걸음마다 도장을 찍듯 취경의 길을 걸어서 마쳐야 하고, 깨달음이 아무리 투철할지라도 관문마다 난관마다 실수(實修)하여 자신을 닦아야 한다.
‘오공(悟空)’에서 ‘행자(行者)’로의 전화는, 본질적으로 사상 속의 고원함에서 생명 깊은 곳의 착실함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안다’는 법리에서 ‘실수(實修)’의 승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수련은 낮은 지위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운 것은 영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다. 마치 경건하고 겸손하게 부처를 믿는 티베트인들의 얼굴 모습처럼, 조금의 과시나 오만함도 없고 오직 순수한 겸허와 진실함, 순선(純善)함만 가득하다. 그것은 결코 유약하고 무능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진정으로 침전된 후에 우러나오는 순정하고 바른 힘이다.
수련은 ‘오공’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더욱이 매 걸음 심성상의 ‘행자’로 낙착(落着)시켜야 합니다.
사람을 용납해야만 진정한 자비가 생겨날 수 있고, 일을 용납해야만 모든 모순을 해소할 수 있으며, 자아를 내려놓아야만 전체 속으로 녹아들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체를 더욱 낮추고, 자아를 더욱 작게 보며, 매 걸음을 더욱 착실하게 내디뎌야 한다. ‘안다’에서 ‘행한다’로, 다시 ‘행한다’에서 진정한 ‘동화’로 나아가는 것, 그 사이의 거리가 바로 실수(實修)의 길이다.
지극한 정성(至誠)은 수련의 기초이며, 겸손과 포용은 자비의 뿌리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감당하고 포용하며 내려놓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소위 ‘오공’이란 결코 자신을 높은 곳에 두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사심 없이 포용할 수 있는 광대하고 너그러운 흉금을 닦아내는 것임을 말이다.
개인의 층차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약간의 깨달음을 동수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 격려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