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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이 관념과 행위를 제거하고, 수련 길을 바르게 걷자

임청(林青)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홍음 6》에서 ‘현대 관념 행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셨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것은 우리가 천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마장(魔障)이며, 전통 관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수련 중에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대 관념 행위란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다. 즉, 현대 관념 행위는 변이된 것이며, 전통 관념과 부합하지 않고 정반대되는 것은 모두 현대 관념 행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과 진화론을 믿고, 신을 믿지 않으며, 선악에는 응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생사는 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다는 것 등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거시적인 측면들은 분별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구체적인 일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명확하게 분별되지 않는다. 예전에 《전법륜》을 읽을 때마다 “현재는 모범사원 노릇하기도 힘들다. “당신은 모범사원이니까 잘하지 않는가. 당신은 일찍 오고 늦게 가면서 이 일을 다 하라. 당신은 잘하고 우리는 안 된다.” 차가운 조소와 신랄한 풍자로 좋은 사람이 되기도 힘들다.”라는 대목을 대할 때, 나는 그저 이러한 심리와 행위가 질투심의 표현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했을 뿐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행위야말로 바로 변이된 관념 행위이며, 그것은 변칙적인 방식으로 선(善)을 억누르고 좋은 사람을 억누르며 악(惡)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느끼게 하고, 늘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만든다. 시간이 오래되면 좋은 사람이 되었던 이들도 마음의 평형을 잃게 되고 더는 좋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으며, 결국 사람의 표준을 낮추고 최종에는 물결에 휩쓸려 아래로 미끄러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도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러한 변이된 현대 관념 행위의 예를 많이 드셨으나, 제자가 어리석어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 몸에 존재하는 변이된 관념과 행위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처음 《정진요지 2》 <더는 참을 수 없다>를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사부님께서는 “참음(忍)은 나약한 것이 아니지만, 온갖 수모를 다 참고 견뎌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대법제자의 참음은 고상한 것이다. 이는 생명이 위대하고 견고하여 꺾을 수 없는 금강부동(金剛不動)의 표현이고, 이는 진리를 견지하기 위한 관용(寬容)이며, 이는 아직도 인성(人性)이 있고 아직도 정념(正念)이 있는 생명에 대한 慈悲(츠뻬이)와 구원이다. 참음이란 이미 완전히 인성이 없고 정념(正念)이 없는 그런 사악한 생명의 무절제한 악행에 대한 무제한적인 방임이 절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단락 법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내가 바로 어릴 때부터 나약하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구세력은 모든 수련자의 인생에 대해 매우 정교한 안배를 했다. 태어난 가정부터 성격과 품성, 그리고 일하고 생활하는 환경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고도 아주 정밀하게 안배했다. 그것들의 목적은 당신이 그들이 안배한 마난(魔難) 속에서 수련해 나오게 하려는 것이며, 그래야만 그것들이 당신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안배한 한 걸음 한 걸음은 사실 당신이 사람을 벗어나 신으로 향하는 것을 막는 마장(魔障)이다. 만약 그들이 안배한 수련의 길을 따라 걷는다면 어느 누구도 성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초에 그 누구도 성취하게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사부님만이, 사부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제도시켜 천상으로 데려가고자 하신다. 대법만이 우리를 하늘로 돌아가게 하는 하늘사다리다.

구세력이 나에게 안배한 가정 환경은 나로 하여금 성실하고 선량하며 효성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매우 나약하고 겁이 많으며 일에 겁을 먹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며, 극도로 열등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뚜렷한 주관이 없는 성격을 형성하게 했다. 결혼 후 시댁은 처세술부터 인생관·세계관·가치관까지 우리 집안과 완전히 정반대인 집안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과 같이 오랫동안 가정의 마난 속에 처하게 되었다. 수련한 후에는 업을 갚는 것임을 알았지만, 법공부가 깊지 못해 심성 제고가 더뎠고 더 깊은 법리를 깨닫지 못했다. 비록 계속 참아왔고 또한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도 해냈지만 마난은 줄곧 존재했다. 사부님의 《도법(道法)》을 보아도 잘 이해되지 않았고, 본성(本性)의 일면이 어떻게 법을 실증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이러한 마난은 더욱 가중되었다. 오랫동안 마난 속에 처해 맹목적으로 순종하다 보니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망심과 혐오심이 더해졌다. 결국 초래된 결과는 가족들이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해 죄를 짓고 가정이 해체된 것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변이된 현대 관념 행위에 독해당한 것이다. 시댁 가족들은 약자를 괴롭히고 강자에게 비굴하며, 선한 사람을 괴롭히고 악한 자를 두려워하며, 성(性)적으로 문란하고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허락하지 않으며, 사람을 나쁜 곳으로 끌고 가 인류의 도덕을 파괴하고 있었다. 나의 겁 많고 나약함, 그리고 맹목적인 순종은 악인이 악을 행하도록 방종한 것이며, 또한 악한 요소를 조장하고 선(善)과 정(正)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해 하늘에 사무치는 큰 죄를 저지르게 결국 지옥에 떨어져 소멸되게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나의 나약함은 일종의 사(私)이자 오직 자신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더욱이 일종의 죄였다. 《구평공산당》에서 말하듯 “동시에 우리들 각자 역시 이로부터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반성할 수 있다. 본래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많은 비극들이 과연 우리의 나약함과 타협으로 인해 성사된 것은 아닌가.”

나 자신이 변이되고 올바르지 못하여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밝고도 원만”(《전법륜》)함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비로소 중생들이 구도받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내려와 부(負)의 방식으로 나를 성취시켜 줌으로써 내가 수련을 성취하고 그들을 다시 제도하려는 목적에 도달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잘 수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망친 것이다. 수련인이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하면 정말로 중생을 망치는 것이다!

이러한 나약함과 맹목적인 순종이 정법 수련 중에서 수련인에게 파생시킨 가장 큰 마장은 무엇인가? 바로 ‘두려움[怕]’이다! 그런데 ‘두려움’은 말법·말겁의 시기에 더욱 심하게 변이되었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무서워하게 하고, 바른 것이 사악한 것을 무서워하게 하며, 선한 것이 악한 것을 무서워하게 만든다. 완전히 전도되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전반 인류 사회는 부면(負面) 요소가 정의 요소보다 더 크다. 마귀가 우리의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 사부님의 정법은 모든 부정(不正)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대법제자는 사부님을 도와 정법을 행하는데, 자기 자신이 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사부님을 도와 정법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중생을 구도하는 역사적 사명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두려운 마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된 일을 할 수 있게 하며, 두려운 마음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기연을 잃게 하며, 두려운 마음은 사람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생사의 고비이다.”(《정진요지 3》 <생사의 고비(死關)에서 벗어나라>)

그것은 정법 수련 제자를 가로막는 가장 큰 마로 변했다. 많은 동수들이 사람에서 걸어나오지 못하고 감히 나와서 진상을 알리며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두려움’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기억하건대 99년 ‘7·20’이 막 발생했을 때, 많은 제자들이 생사를 내려놓고 의리상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북경에 가서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법을 실증하러 갔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감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할까 두려웠고, 비인간적인 대우와 모욕 및 매도를 당할까 두려웠으며, 인신 자유와 생명을 잃을까 두려운 것 등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사악에 의해 직장 감옥에 연금되어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내가 ‘두려움’을 돌파하여 북경으로 가서 법을 실증하기로 결심했을 때 기적이 나타났다. 직장에서 2000년 10월 1일 예외적으로 내게 며칠간 휴가를 주었고, 나는 마침내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는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에는 법 인식이 깊지 않아 북경에 가는 것을 마치 사형장에 가는 것으로 여겼고, 법을 실증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장한 마음을 품은 채 내내 <보도(普度)> 곡조를 부르며 갔다. 그러나 바로 그 한 번으로 사부님께서는 내게서 많은 ‘두려움’의 물질을 깎아내 주셨고, 나의 향후 정법 수련과 중생 구도를 위한 탄탄대로를 깔아 주셨다.

많은 동수들은 왜 결정적인 순간에 사악을 두려워하는가? 왜 진상 자료를 박해받을 ‘증거’으로 여기는가? 근본 원인은 자신에게 변이된 현대 관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이된 현대 관념과 행위는 마치 금속 속의 불순물과 같아서, 약간만 있어도 우리로 하여금 순금(純金)의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정법 과정에서 모두 우리의 정념의 힘을 약화시킨다. 바르지 않기 때문에 사악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한 수련인으로 말하면, 자신을 견정하게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모두 동요하지 않을 한 가지 견정한 정념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마치 금강처럼 반석같이 견고하여 누구도 움직일 수 없으면 사악마저 보고서 두려워한다. 만약 정말로 곤란 앞에서 염두가 아주 바르면, 사악의 박해 앞에서, 교란 앞에서 당신이 정념으로 단호하게 말한 한마디는, 사악을 즉석에서 해체할 수 있으며, (박수) 사악에게 이용된 사람이 고개 돌리고 도망가게 할 수 있으며, 당신에 대한 사악의 박해를 종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지게 할 수 있으며, 당신에 대한 사악의 교란을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바른 믿음(正信)의 일념을, 누구든 이 정념을 지켜낼 수 있으면, 그는 최후까지 걸어갈 수 있으며 대법이 만든 위대한 신이 될 수 있다.” (《각지 설법 7》 〈미국 서부국제법회설법》)

그리고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법을 많이 배우고, 법을 잘 배우며, 법에 동화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자신의 일체 변이된 관념과 행위를 제거할 수 있고, 구세력의 안배와 박해를 타파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정념 중에서 대법과 당신들은 같이 있는바”(《각지 설법 10》 〈맨해튼설법〉)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면, 그는 곧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전법륜》)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야만 백분이 백 순금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바른 마음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사명을 잘 완성하고 서약을 실현할 수 있다.

현재 개인 층차에서 얕은 인식이니 법에 맞지 않는 곳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로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