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대법제자
【정견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수련한 지 26년이 되었고, 지금은 48세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매일 《전법륜》을 한 강의씩만 배운다면 1,000번을 읽는 데 25년이 걸린다. 나는 2000년 1월에 법을 얻었고, 첫해부터 매일 《전법륜》을 한 강씩 배웠다. 내가 법을 얻었을 때 타이베이에 있었는데, 당시에 보도소에서 자주 국군영웅관에서 법학습 교류 활동을 열었다. 한 번은 내가 참석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저녁 시간 법학습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동수가 나에게 “하루에 적어도 한 강은 공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나는 정말로 하루에 한 강씩 배웠다.
막 법을 얻었을 때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고, 나중에 대학원생이 되었는데, 시간 관리를 잘하지 못하여 자주 하루 종일 바쁘게 지내다 한밤중에 자려고 할 때야 아직 법을 배우지 않은 것이 떠오르곤 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법을 공부하다 졸리면 자고, 깨어나면 다시 계속 배웠으며, 어쨌든 한 강을 다 공부할 때까지 견뎌낸 후에야 침대에 누웠다. 나중에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진상을 알리는 항목을 하면서 역시 자주 매우 늦게야 법을 공부했고, 날마다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매일 한 강씩 읽는 것이 듣기에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는 쉽지 않으며, 늘 갖가지 일들이 생기고 오늘 바쁘거나 일이 많거나 혹은 피곤하고 졸릴 수 있다.
몇몇 시간대는 특히 견디기 어려운데, 예를 들어 섣달그믐날에는 하루 종일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 한밤중에 폭죽이 울리고 다들 자려고 할 때야 비로소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혹은 해외로 나가 수련 심득 교류회에 참석할 때 시차가 있어 매우 졸리고 하루의 길이가 달라지므로, 도대체 대만 시간에 맞춰야 할지 미국 시간에 맞춰 법을 배워야 할지 혼란스러워지기 쉽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아미타불의 법문은 연마(煉)하기가 쉬우며 염불만 하면 된다.” 당신이 한번 염(念)해 보겠는가? 내가 말하는데 그것은 공부로서, 당신은 쉽다고 하나, 쉽지 않으며, 어느 한 법문도 쉽지 않다고 나는 말한다.”
나는 정말 일 년 내내 매일 일정한 양의 법을 배우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고 느꼈다.
나는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안으로 찾는 것을 매우 중시했는데, 당시 명혜망의 교류 문장들이 안으로 찾는 것을 매우 강조했기 때문이다. 나는 안으로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꼈고, 때로는 안으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바로 마음속으로 ‘안으로 찾음(向内找)’이라는 세 글자를 속으로 읊조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계속 속으로 읊조려 대략 십여 번을 읊조릴 때면 찾아내곤 했다. ‘아, 원래 이 마음이었구나, 내게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하고 번뜩 깨달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찾은 후에는 그것을 버려야 하는데, 이때 나는 다시 ‘그것을 배척하고, 그것에 반대한다’라고 속으로 읊조렸고, 계속 읊조리면 계속 그것을 약화시켜 천천히 거의 버리게 되었다.
나 개인의 체회로, 안으로 찾음은 집착을 찾는 것이지 어떤 행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떻게 개선할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떤 마음이 잘못을 저지르게 했는지를 찾아야 하며, 반드시 내면에 집착이 있어야만 그러한 행위로 이어지므로 마음을 찾아야지 행위를 찾아서는 안 된다.
나중에 나는 대략 3~4년 동안 하루에 세 강을 공부하는 것으로 바꾸어, 20년 간 《전법륜》을 천여 번 배웠고, 그 후 법을 외우는 것으로 바꾸었다. 당시 수련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에 세 강 학습으로 바꿨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 한 강을 읽고, 저녁을 먹고 한 강을 읽고, 잠들기 전에 다시 한 강을 읽었다. 나는 한 강을 읽는 속도가 매우 빨라 대략 30~40분 걸렸는데, 천천히 하면 정신이 딴 데로 팔리기 쉬우므로 차라리 조금 빠르게 읽어 정신이 덜 팔리는지 보려 했으나, 여전히 정신이 팔리는 것을 발견했다. 나중에 법을 외우는 것으로 바꾸고 나서야 정신이 딴 데로 팔리는 문제를 해결했는데, 정신이 팔리면 절대로 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법을 외우는 것으로 바꾸었는가 하면, 당시에 어느 단체 법학습 장에 가든 보도원이 법을 외우도록 장려하는 것을 늘 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자주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 나도 법을 외우는 것으로 바꾸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두 시간대를 찾아 매번 한 단락씩, 즉 매일 두 단락을 외웠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돌아가 복습하진 않았다. 어제 외운 부분을 뒤로 돌아가 복습하려고 하면 또 잊어버리고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1강부터 9강까지 한번 외우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대략 3~4번을 외운 후 조금 익숙해졌다고 느껴 한 번에 두 단락씩 외우는 것으로 바꾸었더니, 대략 반년마다 한번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대략 아홉 번을 외웠다. 외울수록 익숙해지고 빨라졌기 때문에 두 단락이 다 짧으면 법을 배우는 시간이 너무 짧아지므로, 지금은 두 단락을 합해 한 페이지가 되지 않으면 한 단락을 더 추가한다.
나는 법을 외우는 것이 정신이 딴 데로 팔리지 않는 것 외에도 또 하나의 장점이 있음을 발견했는데, 바로 그날의 관을 그날 넘기게 된다는 점이다. 관을 넘지 못하면 법이 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어느 날 항목의 동료가 내가 자신이 요구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나를 신입 취급하며 대단히 큰 소리로 욕을 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생각 배후의 원인을 전혀 말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만 말해서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매우 화가 났다. 게다가 나는 그의 방식이 틀렸고 내 방식이 맞다고 생각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저녁에 법을 외우는데 도저히 외울 수 없었고, 한 문장을 외우면 정신이 딴 데로 팔려 거기서 화를 냈고, 다시 한 문장을 외우면 또 정신이 팔려 화를 냈다. 심지어 반 문장을 읽고 정신이 팔리기도 했다. 평소에 나는 한 단락을 외우는 데 대략 20분이면 가능했는데, 그날은 40분을 외워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다리가 아플 때까지 서 있었다. 나는 법을 서서 외우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가다간 안 되겠다, 법을 다 외우지 못하면 이따가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 하고 흠칫 놀랐다.
나는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법을 배울 때 떠오르는 생각은 모두 집착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무슨 마음이 있는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화가 나는가, 만약 한 나한이 이런 일을 만났다면 나처럼 이렇게 화를 내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때 한 가지 은폐된 생각이 뛰어나왔는데, “나는 단지 일을 잘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어디가 집착이란 말인가?” 하고 가로막아 안으로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가 틀렸고 다른 사람도 그가 틀렸다고 하는데 내가 무엇을 찾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계속 화가 났고 여전히 법을 외울 수 없어 한동안 더 대치하다가 비로소 생각했다. ‘아니다, 내게 여전히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전혀 전념하여 법을 배울 수 없겠는가?’ 그리하여 더 열심히 안으로 찾았고, 나중에 마침내 찾아냈다. 나는 단순히 ‘일을 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일을 잘하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이 둘은 서로 다르다. 후자의 중점은 ‘나’에 있었기에 여전히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라는 데 집착하고 있었다. 또한 지혜가 부족해서 ‘내 방식대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방식대로 해도 일을 잘할 수 있다’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울러 내게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그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게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것을 보완할 방법이 있어야 했다.
찾아낸 후에는 그리 화가 나지 않았고, 내 방식대로 하지 않고 그의 방식대로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러자 천천히 화가 나지 않게 되었고 법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법을 외우는 것이 스스로 관을 넘기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느꼈다.
또 한 번은 다른 동료와 크게 대립했는데, 그가 늘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나왔으나 집에 돌아와 후회했고, 자신이 어쩜 이렇게 격동할 수 있는지 분명 무슨 집착심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이번에 나는 쟁투심을 찾았는데, ‘아, 나에게 쟁투심이 있었구나, 나는 나에게 쟁투심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이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런 마음이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쟁투심 역시 집착이므로 모두 버려야 한다. 이외에도 질투심, 체면을 차리는 마음 등을 추가로 찾았으며, 매 과정이 수련 속에서 질서 있게 안배되어 내가 그것을 발견하고 버리게 함을 느꼈다.
나는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목이 열렸으나 당시에는 몰랐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상상한 것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본 그 물건이 나의 지식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어서 내가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나서야 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보이지 않던 데에서 장래에 보이게 되고, 똑똑히 보이지 않던 데에서 똑똑히 보이게 되며, 쓸 줄 모르던 데에서 쓸 줄 아는 데에 이르게 되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정말 그렇다고 느꼈으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던 데서부터 지금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고 느끼는데,
첫 번째는 육안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보일 때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이 눈을 움직이면 즉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점인데, 이것은 꽤 어렵다. 처음에는 집착을 일으켜 다른 공간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자랑하고 싶어 했다. 집착을 일으키면 즉시 닫혀 보이지 않게 되고,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까지 수련해야만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세 번째는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즉 볼 때 어떠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더욱 어렵다. 생각이 움직이면 가상으로 변해 버리기 때문인데,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심이화(隨心而化)’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움직이면 더 이상 볼 수 없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보면서도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 데까지 수련해야만 한다.
내가 가족들과 유럽으로 여행을 갔을 때 많은 웅장한 대성당들을 보았다. 조그마한 날개 달린 용이 성당의 큰 기둥을 감싸고 높은 곳 천장에 가까운 곳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는데, 물론 그 날개 달린 용은 동양의 용과는 다른 것이었다. 성당이 흙색이었기에 용의 신체도 흙색이었고 기둥 위에 둥지를 틀고 있기도 했다. 몇몇 높은 탑을 참관할 때도 가장 위층에 가까운 곳에서 작은 천사들이 탑을 둘러싸고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작은 천사는 르네상스 회화에 나오는 것처럼 아기의 몸에 작은 날개 한 쌍이 달린 매우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그림들은 모두 볼 수 있는 화가가 본 다른 공간을 그려낸 것이었다.
또한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천국을 보았는데, 성당 위쪽에 떠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매우 밝고 하얗고 그 안에서 즐겁고 유쾌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중세 시대 성당의 화가들이 성당 천장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고개를 들었을 때 천국 세계를 보았기에 천장에 그것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아시아에서도 나는 많은 사찰 밖의 하늘 위에 연이어 끝없이 이어진 사찰 건축물, 회랑, 누각 등이 무한히 확장되어 끝이 보이지 않는 매우 웅장하고 장관인 모습을 발견했다.
대만에서는 매년 연말 자유광장에서 배자(排字 글자 만들기) 활동을 하지 않는가? 내가 배자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제자리에 앉기를 기다릴 때 이리저리 둘러보곤 한다. 한 번은 다른 공간의 금빛 큰 빛기둥(大光柱)이 배자에서 동수들이 이룬 도안 속에서 위로 솟아올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금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또 한 번은 배자 도안 속에서 금룡 한 마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용의 몸이 거대하고 금빛이 찬란하여 매우 장관이었다. 또 어느 해인가 양쪽의 국가음악청과 국가희극원 지붕에 커다란 황색 기와지붕이 덮여 있는 위에 수많은 신들이 줄지어 앉아 우리의 배자를 구경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신선들이다! 정말 좋다, 나중에 내가 수련을 잘 해서 올라가 저들과 함께 앉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들이 나에게 “당신이 우리를 부러워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당신들을 부러워하는데!”라고 응답했다. 나는 비로소 활연히 깨달았는데,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법을 실증할 수 있는 것을 너무나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어느 해인가, 나는 중정기념당 쪽에 가까이 앉아 있었는데, 다른 공간은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어 하자 한 줄의 큰신(大神)들이 배자 장소 주변을 둘러싸고 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한 큰신은 표정이 격동되어 마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도대체 무엇에 감동했는지 궁금해했는데, 이내 알게 되었다. 즉 그가 보기에 우리가 이쪽에서 이렇게 고생스러우면서도 능히 법을 실증할 수 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비록 나 자신은 단지 햇볕이 조금 강하고 날씨가 조금 덥고 목이 조금 마르다고 느꼈을 뿐이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고생 중의 고생 같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생스러운 상황에서도 계속 법을 실증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너무나 대단했던 것이다. 발정념을 시작한 이래 나는 매번 발정념을 할 때마다 늘 광경을 보았고 게다가 중복된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거의 꺼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자 잊어버렸을 뿐이다. 사실 본 것도 아직 그리 또렷하지는 않다.
나는 《전법륜》이 정말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라고 느낀다. 나는 매일 법을 외우지만 매일 심성 고험이 있는 것은 아니며, 어떤 날은 아무일 없는 듯 순탄하게 지나가기도 하지만 여전히 제고되었음을 발견하는데, 나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고험이 없는데 어떻게 제고했는지 생각하곤 했다. 알고 보니 법을 외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법을 공부하는 것은 천제(天梯·하늘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착실하게 올라가기만 하면 착실하게 제고할 수 있다. 어디 이렇게 좋은 일이 있단 말인가! 지금 나는 어떤 동수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안달이 나서 그에게 “하루에 적어도 《전법륜》 한 강은 공부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법을 외워보세요, 하루에 한 단락을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보도원이 어떠한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수련은 자신을 닦는 것이지 남을 닦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보고 남을 보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두 사람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을 보면 그에게 “이것은 수련 중에 안배된 고험입니다. 편안하기만 해서야 어떻게 공(功)이 자라겠습니까? 일거사득(一舉四得)이니 당신은 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때로는 아내 동수와 갈등이 생길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므로 매우 억울하고 이치를 말해도 통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나는 “나는 연공인이니 안으로 찾아야 한다”라고 속으로 읊조린다. 계속 속으로 읊조리다 보면 읊조림이 습관이 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갑자기 문제가 나타났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연공인이니 안으로 찾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이 몇 글자가 모두 사부님께서 수련인에게 하사하신 것으로 위력이 거대하다고 느낀다.
이상은 현재 층차에서의 개인의 작은 수련 심득으로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동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26년 대만 파룬따파 수련 심득 교류회 발표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