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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의 <제세기>를 철저히 파헤치다(11)

작자: 역천균

【정견망 2007년 12월 27일】

제 2장: 역사습유

제 2절: 왕실편

<제세기>의 예언시 중 유럽국가의 왕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해독되었다. 특히 프랑스 왕실에 관련된 각종 예언은 모두 역사적으로 매우 정확함이 입증되었다. 본 절에서는 단지 몇 수를 보충하여 과거 해독하지 못했던 스페인 왕실과 포르투갈 왕실 관련 몇 가지 예언을 해독하고자 한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제 4기 86수
불문:
L”an que Saturne en eau sera conioinct,
Auec Sol, le Roy fort & puissant,
A Reims & Aix sera receu & oingt,
Apres conquestes meurtrira innocens.

영문:
The year that Saturn will be conjoined in Aquarius
With the Sun, the very powerful King
Will be received and anointed at Reims and Aix,
After conquests he will murder the innocent.

토성이 물병좌와 만나는 그 해
태양과 함께 떠오른 매우 강대한 국왕이
램스와 아익스에서 맞이하여 기름 부은 자가 된다
정복한 후 그는 무고한 자를 도살할 것이다.

이 시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왕인 펠리페 2세(1527년 5월—1598년 9월)를 예언하고 있다. 그의 재위 시기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시대였다. 펠리페 2세의 통치 하에 스페인의 국력은 최고봉에 달했다.

본 시의 시간 암호는 첫 구절에 있다. 물병좌는 오행으로 보면 수(水)이며 이 해는 “水土”년으로 역사상 계축년인 1553년이다. 물병좌의 시간은 1월 20부터 2월 18일 까지 이며 주로 음력 축월(丑月)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계축년 1553년 축월은 실제로 1554년 2월 정도 된다. 펠리페 2세는 가장 강력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아들로서 1554년 초, 부친에 의해 나폴리와 시실리 국왕으로 봉해졌다.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하자 펠리페 2세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계승해 가족이 기원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외에 대부분을 이어받았다. 이것이 본 시의 제 2구에서 말하는 “태양과 함께 떠오른 매우 강대한 국왕”인 것이다. 태양은 제 첫 구의 토성과 함께 시간을 나타내는데 1556년은 “丙辰”년, 즉 “火土”년이다.

제 3구의 “램스와 아익스에서 맞이하여 기름 부은 자가 된다”는 펠리페 2세가 신성로마 제국의 황족이면서 프랑스의 왕족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익스는 독일 황제가 면류관을 쓴 곳이며 램스는 프랑스 국왕이 즉위한 곳이다. 이것은 펠리페 2세의 결혼 때문이다. 1554년 펠리페 2세는 나폴리와 시실리 왕으로 봉해졌고 그곳에서 영국의 메리와 결혼했으나 메리가 사망한 후 1559년 프랑스 앙리 2세의 딸을 아내로 맞아 “램스에서 기름 부은자”가 되었다. 본 시의 불문에서도 볼 수 있는데 불문의 “태양과 함께 일어난다” 는 토지와 함께 일어난다고 번역해도 되는데 1559년은 “기미-己未”년 즉,바로 “土土”이다. 그래서 이 시는 세 개의 시간의 암호를 그 속에 포함하고 있어 매우 기묘하다.

“정복한 후 그는 무고한 자를 도살할 것이다.”는 1559년 이후 펠리페 2세가 신교도를 잔혹하게 탄압한 것을 말하며 중세의 종교심판과 이단 박해가 그의 통치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더욱이 그는 유명한 장군인 알바 공작(톨레도)을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해 네덜란드 사람들의 저항을 심하게 탄압했고 약 8000명을 죽였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의 운명

제 6기 15수

영문:
Under the tomb will be found a Prince
Who will be valued above Nuremberg:
The Spanish King in Capricorn thin,
Deceived and betrayed by the great Wittenberg.

묘지 아래에 하나의 왕자가 발견될 것이다.
그의 가치는 뉴렘버그를 초월한다
스페인 국왕은 얇은 염소좌에
위대한 위튼버그에 속고 배신 당한다

이 시를 해석한 모든 해설자들은 “묘지 아래에 하나의 왕자가 발견될 것이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독하기 힘들었다. 사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죽은 왕에게 유복자가 발견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1886년 5월~1941년 2월)를 말하는데 그는 알폰소 12세의 유복자이며 알폰소 12세가 살았을 때 아들이 없었다. 1885년 11월 그가 사망하고 묘지에 묻힌 이후 그의 유복자가 1886년 5월에야 비로소 출생했다. 그래서 무덤 아래서 왕자나 나타난다고 한 것이다.

이 유복자는 스페인 왕실에게는 한 도시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다. 알폰소 13세는 출생하자마자 스페인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친이 대신 섭정했으므로 2구에서 “가치는 뉴렘버그를 초월한다”고 한 것이다. 제 3구의 “얇은 염소좌”는 시간의 암호이다. 염소좌는 12월 21부터 1월 19일인데 주로 음력 자월(子月)이며 오행으로는 물-水이다. 얕은 물이므로 수극화의 화 또는 토와 천간지지를 조합하면 바로 정해(丁亥)년과 무자(戊子)년이다. 즉, 1887년과 1888년에 해당하는데 부친이 없는 2살짜리 알폰소 13세의 외로운 모습을 나타낸다. 알폰소 13세의 운명이 “수”라면 그의 출생년도인 1886년 병술(丙戌)년은 화토(火土)년이며 더욱이 “얕은 물”의 해이다.

제 4구 “위대한 위튼버그에 속고 배신당한다”는 알폰소 13 세의 불행한 혼인을 말하는데 그는 1906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Victoria Eugenie of Battenberg를 왕후로 취하는데 “위대한 위튼버그”는 그의 왕후 Battenberg를 말한다. Battenberg는 위튼버그Wittenberg와 자모 두 개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속고 배신당한다”고 했는가? 왕후 Battenberg 가족은 유전병이 있었다. 그녀의 오빠는 혈우병 환자였는데 알폰소 13세는 이 점을 결혼 전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속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결혼 후 5남 2녀를 낳았는데 두 공주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다섯 아들은 모두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혈우병 환자였고 둘째는 어릴 때 귀머거리가 되었으며 셋째는 낳자마자 죽었고 다섯째도 혈우병 환자였다. 단지 넷째만 건강하여 나중에 후안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지금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이다. 또 알폰소 13세가 결혼한 1906년은 바로 “병오-丙午”년,”火火”년이며 “水”의 운명인 국왕으로 말하면 얕은 물이다. 결혼식 후 같은 날 국왕과 왕후는 폭탄 암살미수 사건을 당했다.

1930년 말도 국왕으로 말하면 또 다른 얕은 물이었다. “火土”년 “기사(己巳)”년 연말에 알폰소 13세의 통치는 비바람에 흔들렸고 다음 해 스페인은 제 2공화정이 성립되었다. 알폰소 13세는 퇴위 당해 망명을 떠났다. 나중에 그는 왕후와 이혼했는데 이것이 바로 “위튼버그에 속고 배신 당한다”는 의미이다.


포르투갈의 태양왕-존 5세

영문:
The year that Mercury, Mars, Venus in retrogression,
The line of the great Monarch will not fail:
Elected by the Portuguese people near Cadiz,
One who will come to grow very old in peace and reign.

수성, 화성의 그해에 금성이 쇠퇴한다
위대한 왕조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카디즈 부근에 포르투갈 국민에 의해 선출되며
어느 국왕은 평화로 통치하며 오래 산다.

이 시에서 말하는 것은 1706년부터 1750년까지 재위한 포르투갈의 존(John) 5세(1689년 10월– 1750년 7월)를 말한다. 1706년 12월, 존 5세는 부친인 피터 2세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 해는 병술(丙戌)년이었다. 이전은 갑신(甲申)년과 을유년(乙酉)으로 모두 금목상극(金木相克)하는 해이다. 그래서 금성이 쇠퇴한다고 했다. 이 두 해에 국왕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비록 존 5세가 1706년 12월 그 부왕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등극을 선포한 것은 1707년 1월 1일이며 1707년은 “정해-丁亥”년 즉”火水” 바로 수성, 화성의 해이다,

제 2구 “위대한 왕조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는 존 5세의 부친인 피터 2세가 적자가 없다가 41세 무렵에야 비로소 존 5세라는 보배같은 아들을 얻었음을 말한다. 존 5세는 국왕이 된 후 44년간 재위하며 거의 70세까지 살았다. 카디즈는 포르투갈에 가까운 스페인의 항구도시인데 존 5세 재위 시에 다른 “火水”년, 즉 1713년 “계사 癸巳” 년 프랑스 왕과 우호조약을 맺고 1715년 스페인과 우호조약을 맺어 존 5세의 재위 기간 포르투갈은 “평화로 통치” 한 것이다. 그래서 존 5세는 포르투갈의 태양왕이라고 불린다.


포르투갈 내전과 페르디난도 2세

제 6기 24 수
영문:
Mars and the scepter will be found conjoined
Under Cancer calamitous war:
Shortly afterwards a new King will be anointed,
One who for a long time will pacify the earth.

화성과 왕의 지팡이가 교차할 것이다
큰 게자리에서 비참한 전쟁에서
얼마 후 새 국왕이 세례를 받으며
오랫동안 대지에 평화를 가져온다

이 시는 1834년 포르투갈의 내전 이후의 일을 말한 것이다. 제 1구는 시간의 암호이다.
화성은 “火”,왕의 지팡이는 “木” 즉, 1834년 갑오(甲午)년을 말한다. 1828년부터 1834년 까지 포르투갈은 전제주의 파와 입헌파 사이의 내전이 있었으며 이 재난의 전쟁은 1834년 큰 게자리, 즉 7월 경에 끝난다. 또 포르투갈 내전의 몇 차례의 전투는 모두 7월에 발생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826년 포르투갈 국왕 존 6세 (1767– 1826)가 서거한 후 왕위 계승분쟁이 발생했다. 그의 큰 아들 페드로 4세는 1822년 이미 독립 입헌국가인 브라질의 황제가 되어 브라질의 페드로 1세가 되었으며 그의 작은 아들은 모반으로 유배되었다. 비록 1826년 3월 페드로 4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를 이미 브라질 왕으로 여겨 그가 포르투갈 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2개월 후 그는 왕위를 그의 7살 난 장녀인 마리아(즉 마리아 2세)에게 양위했고 그의 동생 미구엘을 섭정으로 임명해 마리아를 아내로 맞게 했다. 1828년 미구엘은 포르투갈 왕이라 자칭하고 미구엘 1세라고 했다. 미구엘 1세는 전제주의자로 자유당 사람들은 진압을 당하여 처결당하거나 도망갔다. 1831년 브라질 반(反)전제주의 시위가 발생하자 브라질 황제 페드로 1세는 압박을 받아 황위를 아들 페드로 2세에게 내어주고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동생인 미구엘 1세가 마리아 2세의 왕위를 찬탈하고 자유당 인사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페드로는 자유당 사람의 일을 영도하는 중임을 맡았다. 그는 자유당의 기지인 아조레스 군도로 돌아와 정부의 영도권을 이어 받았으며 수천 명의 원정군을 조성하여 1832년 7월 포르토 부근에 상륙하여 전제정부의 군대는 당황하여 싸우며 후퇴했다. 나흘 후 자유당 사람들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포르토를 점령했다. 페드로는 자칭 포르투갈의 섭정왕이라고 불렀다. 미구엘 1세는 군대를 조직하여 포르토를 일 년 동안 포위하였다. 안토니오가 이끄는 군대가 알가브에 상륙하고 영국의 용병이 해상에서 미구엘 1세의 함대를 공격하고 자유당 사람들이 포르투갈로 진격하여 1833년 7월 24일 리스본을 점령하였다. 1834년 5월 말 미구엘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해외로 도망갔고 마리아 2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페드로는 포르투갈의 섭정왕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2세는 1836년 독일의 페르디난드 왕자에게 시집갔으며 1937년 페르디난드는 포르투갈의 페르디난드 2세가 되었다. 이것이 제 3구에서 말하는 “얼마 후 새 국왕이 세례를 받으며”이다. 페르디난드 왕실은 마침내 안정되었고 오랫동안 평화적인 시기를 형성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대지에 평화를 가져온다”고 한 것이다. 페르디난드 2세의 통치는 1853년까지 계속 되었으며 그의 뒤를 계승한 두 아들도 뛰어난 학식과 업적이 있었다.

발표시간 : 2007년 12월 27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12/27/498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