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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의 <제세기>를 철저히 파헤치다 (33)

작자: 역천균

【정견망 2008년 3월 19일】제 5장: 공산주의의 죄악
제 3절: 사악한 군대와 전쟁

* 적군(赤軍)은 죄악의 근원

제 1기 16 수
영문:
A scythe joined with a pond in Sagittarius
at its highest ascendant.
Plague, famine, death from military hands;
the century approaches its renewal.

큰 낫이 가장 높은 위치에 나타난다
사수좌의 별에
군대의 손에 온역, 기근과 사망이 따른다
세기가 재생에 접근할 때에

사악의 중공 군대가 국민들에게 침중한 재난을 가져다 준 것을 말한다. 그들의 손에는 온역, 기근과 사망이 따른다. 특히 삼년 내전 동안 중공의 사악정권을 건립하고 중국 국민에게 무궁한 화란을 가져다주었다.

본시의 앞 두 구
“큰 낫이 가장 높은 위치에 나타난다
사수좌의 별에”
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3년 내전 기간 중국공산당의 무장 폭력투쟁의 도구인 중공 군대의 전쟁폭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공산당은 내전을 통해 정권을 취득하려 했다. 그래서 “큰 낫이 가장 높은 위치에 나타난다”고 한 것이다. 서양의 12궁도에서 사수좌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이 위치는 중국의 12지지의 자(子) 위치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소위
“사수좌의 별”은 중국 12지지 내의 “亥子丑”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겨울과 북방의 군체를 대표한다. 그럼 본 시에서 중국의 3년 내전을 예언한 것이다. 1947년은 “丁亥”, 1948년은 “戊子”년이고 1949년은 “己丑” 이니 딱 맞다. 방위로 말하면 여기에서는 중공군대가 3년 내전 중에 번창하는데 북쪽의 원조에 힘 입었으니 바로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 후 중국동북에 들어왔고 중공은 동북에서 소련군의 원조로 중공내전이 군대의 주력을 형성했는데 이는 아랫 글의 예언에서도 또 나온다.

제 3구
“군대의 손에 온역, 기근과 사망이 따른다”
는 한편으로는 중공군대가 야기한 내전이 중국국민들에게 거대한 재난을 가져온 것을 말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공산당의 군대가 내내 공산주의 온역을 전파하는 주요매개이며 정권을 탈취한 후 또 중공 폭력통치의 “당”을 호위하는 군대가 된 것이다.

제 4구 “세기가 재생에 접근할 때에”는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성경>에서 예언한 사악의 짐승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때에 최후의 정사대전의 날과 접근했으며 중국의 대지에서 우주의 정법 “세기의 재생(renewal)”이 정의와 사악의 전투 중에 서광을 맞이한다는 것을 예언했다.

* 중공에 이용당한 정전협정

제 2 기 80 수
불문:
Apres conflit du Ieffé l”éloquence,
Par peu de temps se tramme faim, repos,
Point on n”admet les grands à deliurance,
Des ennemis sont remis à propos.
영문:
After the conflict by the eloquence of the wounded one
For a short time a soft rest is contrived:
The great ones are not to be allowed deliverance at all:
The enemies will restore at the proper time.

전투 후 부상당한 쪽의 궤변과 말재간에 넘어가
잠시의 회복시기를 도모한다
위대한 군대는 동원이 허락되지 않고
적군은 때 맞춰 원기를 회복한다.

본시의 마지막 한 구의 원래 영문은 They are restored by the enemies at the proper time인데 원문에 의거해 현재처럼 고쳤다.

이 시는 중공이 일본이 패망한 후 발생한 내전초기에 교묘한 말과 속임수로 미국의 군사중재를 이용하고 국공정전협정과 게다가 동북정전협정을 이용하여 숨 쉴 시간을 얻어 원기를 회복한 것을 예언했다.

내전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일본이 투항한 후 누가 먼저 내전을 일으켰는지 논쟁하는데 사실 중공의 전략은 거짓으로 항일하며 속으로는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내 국민당을 가장 큰 적으로 여겼고 일체는 내전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공은 항전 중 전반적으로 일본에 대해 두 번 좀 크게 싸웠는데 하나는 평형관, 하나는 백단대전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공군 지휘관은 항일하지 말라는 중공 중앙의 명령을 위반했기 때문에 수십년 동안 비판 당해야 했다. 또 신4군 초기에 4지대가 항일을 견지하려 했기 때문에 중공에 의해 소멸되었다. 중공은 종래 정면으로 항전한 적이 없으며 유격을 핑계로 근거지를 점령하고 지방에 중공정권을 건립했으며 군대를 확충하여 자원을 약탈하고 내전을 준비했다. 중공은 항전시대에 재산을 불리고 나라를 키웠다. 소련 연안파의 계산에 따르면 중공은 1943년 4만4천7백60근의 아편을 제조 판매하여 미화 6억 5천만불에 달하는 엄청난 수입을 올렸으며 당시 세계 최대의 아편 판매집단 중 하나였다. 이에 비해 국민당 군대는 정면으로 항일했으며 38차례나 대전을 치렀고 항일 전사 희생자만도 300만이나 되는데 그중 장군이 200여명이 넘는다. 이런 참혹한 희생은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일본에 대한 항전이 가장 곤란한 시기에 공산당은 국민당 주력이 거의 소모되어 일본군에 의해 서남지역에 눌려있는 것을 보고는 기회를 틈타 1939년 말부터 국민당 항일부대를 향해 한차례씩 파상공격을 시작했다. 국민당 통치지역 근거지를 점거하고 “국민당 완고파를 타격”했다고 큰소리쳤다. 1940년 2월 모택동은 소련에 보낸 전보에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내전 중 “승리는 모두 우리 것”이며 “하북에서 6천명, 산서에서 1만 명을 섬멸했다.” 화북지역을 단독으로 통제하기 위해 1940년 3월 중공 팔로군은 갑자기 화북 부근의 국민당 97군과 신5군 등을 습격해 국민당 3개 군부, 총 6만 명의 항일동포를 학살했다.(당시 중국에서 포교하던 영국 신부 레이첸 원이 쓴 회고록 <내전중의 적군>을 보라)

1940년 겨울 신4군의 소위 “황교(黃橋)전투”는 국민당 항일부대 2개 사단 1만 5천명을 섬멸하고 두 명의 군 사령관을 살해했다. 중공이 항일동포를 도살한 이런 내전이 발생한 것은 모두 소위 “환남(皖南)사변” 이전이었다. 당시 국민당은 항전이란 대국을 위해 내전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애써 참고 있었다. 역사적인 자료에 따르면, 소위 환남사변은 사실 모택동이 고의로 항영(項英) 부대에게 국민당 정부가 규정한 노선에 따라 이동하지 않게 하고 2개월 전 중공의 공격을 당한 국민당 사람들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는 국민당 신문을 빌어 “황교전투”의 원수가 와서 중공의 당내 변이분자 항영을 제거했는데 신4군은 3천의 인마(人馬)가 손실 당했다고 주장했다. 중공은 이 기회를 틈타 국민당이 “항전을 파괴”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8년 항일 역사에서 중공이 한 것은 2년 동안 관전하고 6년간 내전한 것이다. 중공이 국민당에 대항한 내전은 일찍이 1940년에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고 9월 경 모택동은 <정전협정>의 회의석상에서 담판을 하기도 전에 항전 후 내전이란 강펀치를 날렸다. “상당(上黨)전투”에서 국민당 군대 3만 5천명을 소멸시켰으며 그 후 또 한단, 평수, 진포 등 3개 전투를 진행해 국군 10만여 명의 국민군을 섬멸했다.

1946년 1월 미국 마샬 장관의 중재 하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에는 국군이 동북으로 진출하여 주권을 접수하기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협정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중공은 동북 대진에서 국민당 군대를 습격했고 마샬이 돌아가는 시기를 틈타 3월부터 4월 사이에 사평, 본계, 장춘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국군은 정예 신 1군과 신 6군을 위주로 반격에 나서 쌍방은 사평에서 격전을 치렀다. 5월 중순 중공이 패전하고 장춘과 사평으로 후퇴하자 국민당군은 승세를 타고 추격했다. 중공 주력을 송화강까지 쫓아가 중공은 이미 궤멸되었고 국군이 하얼빈에 접근했다. 바로 이때 1946년 6월 6일 정전명령이 내려왔는데 이것이 중공의 목숨을 구했다. 이것이 바로 동북 정전협정이다. 본 예언시는 당시의 정황을 예언한 것이다.

본 시의 앞 두 구
“전투 후 부상당한 쪽의 궤변과 말재간에 넘어가 잠시의 회복시기를 도모한다”” 는 사평에서 전투에 패한 중공이 중미군사 협정팀을 이용하여 국군이 계속 중공의 동북군대를 추격하는 것을 저지하고 “회복시기”를 도모하려고 했다. 중공은 군사행동이 성공할 때는 담판과 <휴전협정>을 휴지조각으로 여기고 군사행동이 실패할 때는 중공은 즉각 담판과 “궤변과 말재주”를 이용하여 속였으며 전반 항전기간과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국은 중공의 교묘한 말과 요리조리 돌리는 거짓에 넘어갔다. 이래서 미국이 국민당에게 동북에서 정전을 밀어부쳤으니 중공으로 말하면 정말 “혁명과 당을 구한”것이었다.

본시의
“위대한 군대는 동원이 허락되지 않고 적군은 때 맞춰 원기를 회복한다.”
는 동북정전 명령으로 국민당 군대가 움직일 허가가 나지 않은 것을 말했으며 중공은 이 기회를 빌려 북만주지구에서 잠시 쉬며 원기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소련의 원조를 받았고 중공은 시기를 보아서 일본 괴뢰군의 인원과 무기로 군대를 재편하여 중공의 각급정권을 건립하고 군대를 확충해 동북 야전군을 만들어 중공이 정권을 탈취하는 주력이 되었다.

중공은 동북에서 실패하고 정전 후 관외의 중공군의 압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관내에서 화북과 중원에서 내전을 일으켜 “관외에서 싸우지 않고 관내에서 크게 싸웠다.” 이때부터 전면적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는데 이때의 미국은 오히려 국민당에 대한 주요 군사원조를 아예 중단했고 소련은 중공에 대한 원조가 끊이지 않아 전쟁의 추는 중공으로 기울었다.

* 동북 야전(野戰)

제 4기 48수
영문:
The fertile, spacious Ausonian plain
Will produce so many gadflies and locusts,
The solar brightness will become clouded,
All devoured, great plague to come from them

비옥하고 넓은 광활한 오소니아 평원
엄청나게 많은 등에와 메뚜기가 나타난다
태양의 광휘가 흑암에 가려지며
모두 다 삼켜지고, 거대한 역병은 그들로부터 온다

이 시는 국공 제2차 합작 내전 시기에 비옥하고 광활한 동북평원에서 수많은 중공 군대가 생기며 그들은 내전 중에 “황충(蝗蟲메뚜기)”처럼 일체를 다 삼켜버려 중화대지에 “공산주의 역병”을 가져다주는 것을 예언했다. 이 시에서 “오소니아”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태리 남부 부락 중 하나를 칭하는 이름인데 이태리 남부는 그리 비옥하거나 광활하지 않다. 그럼 이 말은 유럽 외의 오래된 나라에서 “비옥하고 광활한 평원”을 말하며 바로 중국 동북의 검은 평원이다.

본 시의 제 2구 “엄청나게 많은 등에와 메뚜기가 나타난다” 것은 동북평원에 수많은 중공군대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제세기> 예언 중 인해전술로 작전한 중공군대를 “메뚜기”에 비유했으며 아래에 또 소개된다. 중공사악은 황록색 군복을 입은 사병들에게 그들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혹사시키며 인해전술을 강제로 시키는데 “앞 사람이 넘어지면 뒤 사람이 밀고 가는” 식으로 벌떼 같이 작전한다. 그 상황은 마치 메뚜기 떼의 습격 같으며 중공과 싸워본 많은 사람들은 이런 느낌이 있다. 세계에 다른 어떤 군대도 중공처럼 사병을 생명이 없는 전쟁무기로 여기며 승리를 위해 생명일체를 아끼지 않는 일이 없었다. 중공은 이런 사악한 영은 사병의 생명을 근본적으로 아까워하지 않는다. 대장정 중에 모택동은 들것에 누워 “설산은 기어오르고 초지는 지나가는” 식으로 갔는데 들고 가는 사병이 지쳐서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태연하게 시를 읊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하자 중공은 동북을 점령하기 위해 45년 말 10만 7천의 군대를 파견했고 100단의 간부 약 2만여 명의 당정군 간부와 각종 기술자를 입관시켰다. 그 과정에서 병참보급의 준비가 거의 없는 중공군은 억지로 길거리 백성들의 물자를 빼앗아 유지했다. 그해 12월 17일 중공군 사령관 황극성은 중공 중앙에게 보낸 전보에서 말했다. 부대의 연도에는 “가는 곳마다 빼앗으며 황충처럼 다 먹어 치워버려 인민들의 원성이 길에 넘쳤다.” 그러나 2 년 후 “요심(遙瀋)전투 기간까지 일부 부대는 여전히 어느 집이든 가는 곳마다 다 먹었으며 때로는 영수증도 쓰지 않았다.” (장정륭의 <설백혈홍(雪白血红)>을 보라) “황충”의 습성은 바뀌지 않는데 이것이 중공 군대를 황충이라고 부른 원인이다.

항일 전쟁 후 중공은 동북지구에서 대량의 소련원조를 획득했는데 소련의 자료에 의하면 소총 70만 자루, 기관총 14000정, 포 4000문, 탱크 600량, 비행기 860대, 자동차 2500량, 탄약고 679개였다. 1947년 이전에 또 소총 30만 자루를 제공했었고 이외에도 북한에 주둔하는 소련군은 북한에 있는 일본군의 무기 전부를 중공에게 실어주었다. 1946년 동북 정전 이후부터 1948년까지 중공군대는 끊임없이 확장하여 지반을 확대했고 “요심전투” 이전에 중공은 동북에서 이미 거의 백만이 되는 동북야전군을 건립했는데 장비에는 탱크, 대포, 비행기와 수도 알 수 없는 지방부대와 민병이 있었으며 97%의 검은 대지를 점령했고 통치하는 인구는 동북의 86%를 차지했다. 여기서 중공의 정규군은 바로 본 시에서 예언하는 “메뚜기”들이었으며 “등에”는 중공의 지방 부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본 시의 제 3구
“태양의 광휘가 흑암에 가려지며”는 수량이 엄청나게 많은 중공군대를 예언했으며 인해전술을 채택하여 최종적으로 국민당 정부군을 격퇴한 것이다. 여기의 “태양의 광휘”는 국민당의 “청천백일” 기를 암시하며 이 구절은 중공의 “황충”들이 국민당의 “청천백일기” 를 가린다는 뜻이다. 1948년 9월 중공은 공세를 도발하여 52일 간의 “요심전투”에서 국민당의 동북군대를 섬멸하고 동북을 전부 점령했다.

역사적으로 메뚜기의 습격은 늘 기근을 가져왔고 사람들은 기근에 굶어 길거리에 나돌았다. 그러나 중공의 사악한 군대는 야만적인 전쟁을 발동하였으니 이런 “메뚜기 재난”은 인민들에게 진짜 메뚜기보다 더 한 참혹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1948년 중공 “메뚜기”들은 길림성 장춘시를 5개월 간 포위하여 이십여 만명의 무고한 장춘 백성들을 굶겨 죽였고 인구 50만에 달하던 장춘시는 포위가 끝난 후 겨우 17만 명만 남았다. 당시 <중앙일보>의 기록에 의하면 장춘의 주위에 비적들이 둘러싸서 6월말부터 10월초까지 4개월 간 남녀노소의 시체가 적어도 15만구가 넘었다. 이런 것은 모두 “메뚜기”들에 포위되어 시외에서 산채 굶어죽은 백성들이며 중공군이 입성 후에 또 도처에 아사한 백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나중에 온 성에서 노력동원으로 구덩이를 파서 묻었는데 한달 이상 지난 후에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성안에 있는 동안 어떤 굶은 백성은 부득이 시체를 먹었으며 그 참혹한 정황은 이랬다. 아들딸을 팔려 해도 팔 곳이 없었고 큰 떡 몇 개면 다 큰 처녀를 데려 가도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이를 길거리에 버렸는데 돈 있는 사람이 데리고 가기를 바랐다. 현재의 동성소학교는 그때도 학교였는데 이도하자(二道河子)쪽 아이들이 가장 많았다. 대개 5살 전후였으며 어떤 아이는 막 걸을 수 있었고 작은 손을 내밀며 “엄마, 엄마”를 외치며 찻길을 기어올라 학교에 들어왔는데 너무나 꾀죄죄했다. 불러도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쭈그리고 있다가 천천히 굶어죽었다. 또 살아있는 아이들은 저쪽으로 기어가 쉰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한편 이도하 저쪽에서 버려진 아이는 한바탕 비가 오자 다 빠져 죽었으며 배가 팅팅 불어 있었다.(<설백혈홍>을 보라)

그러나 중공 “메뚜기”들은 의기양양하게 온 세계에 “우리 군대는 피를 흘리지 않고 장춘을 점령했다!”고 선포했다. 나중에 평북평원에서 벌떼같이 온 중공 “메뚜기”들은 평북, 천진을 치고 전국으로 향했는데 그들은 일체를 다 삼키고 거대한 역병을 일으켰다.

* 전국을 석권한 야만전쟁

제 3기 82 수
영문:
Freacutejus, Antibes, towns around Nice,
They will be thoroughly devastated by sea and by land:
The locusts by land and by sea the wind propitious,
Captured, dead, bound, pillaged without law of war.

프레저스, 안티브스, 니스 주위의 마을들
그들은 바다와 육지가 완전히 황폐해질 것이다
메뚜기들은 육지와 바다로 순풍을 타고
점령, 죽음, 구금, 약탈, 전쟁의 법칙도 없이

이 시는 제 2차 국공내전 중 중공의 야전군(즉 야만적인 전투를 하는 군대)이 전국 내전을 석권하는 중에 흉맹하고 내전의 승리를 얻는 것을 예언했다.
“프레저스, 안티브스, 니스 주위의 마을들 그들은 바다와 육지가 완전히 황폐해질 것이다” 는 중공군대가 일으킨 내전이 전국을 석권하는 것을 예언했는데 이런 지명은 몇 가지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니스는 프랑스 동남부의 대도시이고 안티브스는 부근의 비교적 큰 항구이며 항구는 중국어에서는 나루터와 같은 의미이므로 “津”으로 쓸 수 있다. 그래서 안티브스가 완전히 황폐해진다는 것은 “평진(平津)” 이므로 이것은 천진(天津) 또한 북경 부근의 항구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평진전투(1948년 12월 5일부터 1949년 1월 31일까지 중국 인민 해방군의 동북(東北), 화북(華北) 야전군이 북경과 천진 지역에서 국민당과 벌인 전투)를 의미한다. 프레저스는 프랑스 동남부에 해변 가까이의 작은 성인데 만일 니스로 중국 동부의 대도시 상해를 나타낸다면 그럼 여기서는 또 회해(淮海) 결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황폐해지는 것은 프레저스와 안티브스인데 서부(徐埠) 결전과 같다. 마지막으로 대륙의 동남연안은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하기 전 최후의 전장이며 중공은 이곳을 타도하자 전쟁은 이미 전국을 석권하여 대륙을 거의 완전 점령했다.

제 3구
“메뚜기들은 육지와 바다로 순풍을 타고” 눈 중공 야전군이(여기서는 메뚜기들)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국민당 정부군에 진격하여 “순풍을 타고” 승리를 얻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점령, 죽음, 구금, 약탈, 전쟁의 법칙도 없이”는 중공 군대의 야만성을 예언했다. 여기서 “전쟁의 법칙도 없이”는 <제세기>에서 말하는 메뚜기가 진짜 메뚜기가 아니며 바로 야만적인 군인임을 드러낸다. 즉 중공 야전군의 메뚜기인 것이다. 우리는 제 1장에서 제갈량의 <마전과>에서 중공에 관한 예언을 해독했는데 그 중 중공의 “4가지 야전군”이 돌연 공격해 들어오는 정황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중공 군대의 특징은 바로 이 “야성(野)”에 있으며 야만적인 “야전군”인 것이다. 여기서 “점령, 죽음, 구금, 약탈, 전쟁의 법칙도 없이”는 중공군이 전쟁의 법칙도 없는 전법을 말하며 사병의 생명도 돌보지 않는 인해전술, 도시에 있는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돌보지 않고 집을 폭파하여 길을 여는 전술 등을 포함한다. 그래서 중공의 매 한차례의 전쟁은 모두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 보편적인 전쟁에 비해 더욱 큰 손실을 낳았던 것이다.

*한국전쟁에 끼어들어 이국에서 목숨을 잃어

제5 기 85 수
영문:
Through the Suevi and neighboring places,
They will be at war over the clouds:
Swarm of marine locusts and gnats,
The faults of Geneva will be laid quite bare.

쉐비와 이웃의 지방을 통과하여
그들은 구름 위에서 전쟁을 한다
바다의 메뚜기와 모기가 벌떼처럼 몰려들고
제네바의 실수가 명백히 드러난다.

이 시는 중공이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예상과 달리 출병하여 미군이 전쟁 초기에 손을 쓸 수 없게 한 것을 예언했다.

제 1구는 “쉐비와 이웃의 지방을 통과하여”에서의 “쉐비”는 소비에트, 즉 소련을 가리키며
“이웃의 지방”은 중국의 이웃 한국을 말한다. 이 한마디는 중공군이 소련의 도움으로 인근국가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1950년 말에 중공군이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에 개입한 것을 말한다.

본시의 제 2 구 “그들은 구름 위에서 전쟁을 한다”는 중공이 북한군대와 미군의 교전 지점이 “구름 위” 인 “운산(雲山)전투”이다.

운산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하여 최초로 전선에 출현하였을 때, 한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구룡강 연안의 운산 지역 일대에서 중공 제39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1주일 동안에 걸쳐서 전개한 방어전투이다.

최초에 한국군 제1사단이 청천강을 건너 한.만 국경선의 수풍 발전소를 목표로 진격작전을 전개하던 중 운산 북쪽에서 중공 제39군과 조우하여 교전을 벌이다가 뒤로 밀리게 되자, 당시 미 제8군의 예비였던 미 제1기병사단을 투입하여 한국군 제1사단을 초월, 한만국경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으로 실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으나 결국에는 방어에 실패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잃은 채 영변과 용산동 지역으로 철수하게 되었으며, 특히, 미 제8기병연대는 운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과반수의 병력을 손실하였다.

이 전투로, 미 제8군은 진격작전을 중지하고 청천강 연안으로 병력을 철수시켜 방어태세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은 전과를 확대하여 구장동-영변-용산동 선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역주: 운산전투의 주요인물
(1) 한미연합군 : 미 제1군단장 소장 Frank W. Milburn
제1사단장 준장 백선엽
제11연대장 대령 김동빈
제15연대장 대령 조재미
배속부대 : 포병 제17대대장 소령 박영시
지원부대
미 제10고사포병단장 대령 William H. Hennig
미 제6전차대대장 중령 John S. Growden, C. D중대
미 제9야포대대
미 제6박격포대대

(2) 중공군 : 중공 제39군장 오신천
제115사단장 갈성
제116사단장 왕양
제117사단장 뇌천윤]

1950년 11월 1일, 중공군은 미군이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정황에서 39군 주력이 미군 기병 제 1사단의 기병 8연대를 포위하여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첫 번째 전투였다.

본 시의 제 3구의 “바다의 메뚜기와 모기가 벌떼처럼 몰려들어” 는 한국전쟁 중에 중공군대는 여전히 “인해전술”로 벌떼처럼 몰려와서 미국을 위주로 한 유엔군에게 공격을 했으며 여기의 “바다의 메뚜기”는 “중남해에서 보낸 메뚜기”인데 우리는 제 1장 1절에서 10기 68수의 중공의 “6.4 도살”에 대한 예언 중 “바다의 군대”는 바로 “중남해의 군대”임을 가리킨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므로 여기의 “바다의 메뚜기”는 중공군대의 “메뚜기”이다. 또 여기의 “모기”는 “북한인민군”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0월 19일 중공군 4개 군은 비밀리에 한반도에 들어와 참전했으며 10월 25일 남한 군대와 교전하여 온정(温井-청천강 부근의 도시)을 점령했다. 11월 1일부터 3일까지 중공군대는 미 기병 제 1사단의 제 8 기병 연대를 섬멸하였고 5기병 연대의 증원군을 퇴각시켰다.

제 4구의 “제네바의 실수가 명백히 드러난다.”에서 제네바는 연합국 안보이사회가 있는 곳으로서 미국을 위주로 하는 유엔군은 안보리에서 파견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유엔군”이 한국전쟁에서 실수를 했다는 것을 예언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 유엔군에 대해 선전포고 하지 않고 출병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중공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정보를 수집하지 못해 손을 쓰지 못하고 싸운 것이다. 설사 이렇더라도 운산전투 후 유엔군의 지휘관 맥아더는 여전히 중국 출병이 단지 상징적이라고 생각하여 결과적으로 또 1950년 11월부터 12까지 중공군대의 제2차 전투의 공격들 당했고 유엔군은 그저 38선 이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엔군은 명백한 실수를 했는데 이는 바로 중공과 중공군대의 사악성을 과소평가 했던 것이다. 이 글에 3기 82 수에서 이미 중공군대는 “전쟁의 법칙도 없는 메뚜기”이며 “선전포고 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을 그들로 말하면 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종래 중공의 속임수와 사악성에 그리 뚜렷하게 알지 못했다. 항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지금의 인권문제에 이르기까지 내내 중공에게 속아왔다.

사실 모택동은 한국전 이전에 김일성에게 출병을 약속했는데 왜 그랬을까? 하나는 중공은 테러로 정권을 유지하기에 “큰 적이 눈앞에 있는 것”은 적색공포를 조성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들은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 내고 “이십만을 죽여서” 정권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당내 자본주의 파” 부터 “6.4 학생사건” 다시는 “파룬궁”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은 공포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적이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중공은 이 시기를 빌어 “특무를 체포하고 반혁명을 진압” 했다. 국내에서 총살되고, 맞아죽고, 핍박당해 자살한 사람의 수효가 대략 3백만 명 정도였다. 북경 한곳에서만 3만 차례의 공개심판과 총살처형이 있었고 모임에 나간 총 인원이 3백 40만이었다. 북경 중심에서 일차 대회를 열면 2백 명을 공개심판하며 연후에 총살 시켰고 내장을 옆에 사람의 몸에 뿌렸다. 그래서 전국을 적색 공포로 덮었다.

두 번째는 한국전이 터지자 소련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해군, 공군 각종 군수기업 또한 경제중심은 국방산업에 둘 수 있어서 현대화된 군수공업이 있게 되어 공산당의 통치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중공은 중국인민들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하는지 인민의 생활이 어떻게 개선되는지 전혀 생각지 않았다.

세 번째, 중공은 신정권의 두가지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나는 “포로”가 너무 많은 문제였다. 국공내전의 국민당 의병부대, 중공군대 안의 “해방전사”들이 너무 많아 처리하기 힘들었는데 한국전에 보내기가 딱 적합했다. 그래서 부작의(傅作義), 진명인(陳明仁)의 부대는 “지원군”이 되었다. 둘째는 “공신처리문제”였다. 임표의 4야전군은 “통제할 수 없는 부대”로 불렸는데 한국전선에 보내어졌다. 그러나 오히려 임표의 지휘를 허락하지 않고 고의로 “해방전쟁” 중 “3대 전투”에서 지휘한 적이 없는 팽덕회에게 지휘하게 하였고 임표는 집에 돌아가 “요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임표의 “통제할 수 없는 부대”는 북한에서 적지 않게 소모되었다. 한바탕 전쟁이 끝나자 일백여 만 명의 중국 사병이 다치거나 죽었으며 이국땅을 선혈로 붉게 물들였다.

발표시간 : 2008년 3월 19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8/3/19/517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