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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의 <제세기>를 철저히 파헤치다(34)

제5장: 중공 집권 초기의 붉은 공포

작자:역천균

【정견망 2008년 3월 25일】
제5장: 공산주의의 죄악
제 4절: 중공 집권 초기의 붉은 공포

* 제 3의 적(敵)그리스도: 모택동

제 8 제77 수
불문:
L”antechrist trois bien tost annichilez,
Vingt & sept ans sang durera sa guerre,
Les heretiques morts, captifs exilez,
Son corps humain eau rougie gresler terre.

영문:
The third antichrist will be annihilated very soon,
twenty-seven years his war will last.
The unbelievers are dead, captive, exiled;
with blood, human bodies, water and red hail covering the earth.

제 삼의 적 그리스도가 머지않아 훼멸될 것이다.
그가 일으킨 전쟁은 27년간 지속된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음에 처해지거나 감옥, 귀양을 간다.
피, 시체들, 물과 붉은 환호가 대지를 덮는다.

본시의 제 1구 영문 번역은 원문에 근거하면 “제 삼의 적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본시는 중공의 제 1대 지도자 모택동의 “적그리스도”적 본성을 예언했는데 그는 역사상 세 번째 “적그리스도”이다. 중공 자신은 사악의 짐승이며 강택민은 사악의 짐승의 우두머리인데 그렇다면 중공의 제 1대 지도자 모택동은 또 무엇인가?

본시에서
“제 삼의 적 그리스도가 머지않아 훼멸될 것이다. 그가 일으킨 전쟁은 27년간 지속된다”라고 한 것은 모택동이 1976년 거의 죽을 무렵, 다시 말해 “머지않아 훼멸될”시기에 “그가 일으킨 전쟁”이 27년간 지속된 것을 뜻한다. 정권을 탈취한 후 중국공산당이 전 인민에 대해 벌인 전쟁은 1949년부터 1976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 모택동 통치시기에 중공은 전 국민에게 폭력과 압박으로 통치했는데 사실상 전 국민에 대한 전쟁이었다. 그는 먼저 인민의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를 빼앗았으며 최후에는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았다. 이 27년간의 전쟁에서 중공의 잔혹한 통치는 6천만에서 8천만에 이르는 중국 국민들을 비정상적으로 사망하게 했는데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사망자 총수보다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전 국민에 대해 벌인 27년에 걸친 “지구전(持久戰)”이었다.

모택동이 남긴 유명한 말 중에 “하늘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끝이 없고, 땅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끝이 없으며, 사람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라고 했다. 그래서 모택동은 전국 인민들에게 그를 위해 “하늘과 땅에 대해 싸우게” 했으며 노동집약형의 “인해전술”로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얻으려 했다. 이 기간에 무수한 사람들이 사망했다. 예를 들어 모택동은 농민에게 수리 공사를 시키면서 “군중 동원을 크게 한다”는 미명 아래 한 푼의 임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1958년부터 4년간 일억의 농민들이 크고 작은 제방, 저수지, 도랑 공사에 투입되었고 옮긴 토석만해도 950개의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안전은 말할 것도 없고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의료시설도 전혀 없었다.

모택동 역시 자신이 원하는 “건설효과”는 모두 사람들의 목숨을 이용하여 쌓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1958년 4월 수리공사회의에서 모택동은 하남성과 안휘성을 칭찬하면서 말했다. “하남성 서기 오지포(吳芝圃)는 삼백억 평방미터를 한다고 했는데 3만 명이 사망한 것을 보았다. 안휘성 서기 증희성은 2백억 평방미터를 했는데 2만 명이 죽었다.” (『모택동,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보라)

그러나 모택동에게 있어 사람 목숨은 가치가 없었고 또 많은 수리공사는 근본적으로 별다른 역할이 없었다. 단지 한 무더기 백골만 묻었을 뿐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하늘과 땅에 대해 싸우는” 모택동의 요구는 갈수록 심해졌고 갈수록 황당무계했다. 국민들을 동원한 자원과 환경 파괴는 거의 자살에 가까웠다. 백성들의 가마솥을 부숴 “강철을 만든” 결과 60년대 대기근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고 기근이 각지에 퍼졌다. 그러나 모택동 자신은 여전히 “좌우에 미녀를 끼고 즐기며” “그 즐거움이 무궁했다.”

모택동의 “사람과 싸우는 즐거움”은 더욱 사악하여 반우파 운동, 문화혁명 등 여러 차례 운동을 발동해 사람들을 서로 싸우고 죽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각종 정치운동에 휘말려 동료를 팔아먹고 친구를 팔아먹거나 심지어 부모, 자녀, 부부 사이에도 폭로하고 인성과 인정을 완전히 잃게 만들어 골육상잔의 참극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택동은 오히려 인민이 서로 투쟁하는 중에 무궁한 쾌락을 누렸다.

중국은 마치 고대 로마의 “격투장”처럼 변했고 중국 인민들은 중공 사악의 위협 하에 부득이 “검투사”가 되었으며 매 차례 격투(정치운동) 중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이고 투쟁해야 했다. 실질적인 적그리스도인 모택동은 “격투장” 관람석에 앉아 “그 즐거움이 끝이 없구나” 하면서 웃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웃는 한편 “8억이나 되는 인구에 투쟁하지 않고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모택동을 그리워하는데 마치 모택동이 인민을 위해 헌신했으며 “전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일했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중에 이것은 중공공산당의 최고 종지(宗旨)가 되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산당 최고 종지의 본질은 바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사람은 모두 각종 서비스를 받을 일이 있는데 이 때 소비자로서 당신은 적어도 두 가지의 하늘이 정한 권리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서비스 받을지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발을 산다면 구두를 살지 장화를 살지 스스로 결정하기 마련이다. 둘째는 누가 당신을 위해 서비스 할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예컨대 어느 상점에 가서 신을 사든지 역시 자신이 결정한다. 만약 이 두 가지 “소비자” 권리가 없다면 그럼 무슨 서비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이 “전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서 봉사했다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민의 이 두 가지 기본 권리를 승인하지 않은 기초에서 한 것이다. 먼저 공산당은 인민의 무슨 정부를 선택하여 인민에게 서비스 할 권리를 완전히 빼앗았다.

둘째, 공산당은 인민이 자기가 무슨 서비스를 원하는지 표현할 권리를 빼앗았다. 이는 사람이 큰 상점에 가서 가죽 구두를 사려고 하는데 낡은 상점에 가서 다른 사람이 장화를 억지로 신겨주는 것과 같다. 이것 뿐만 아니라 크기도 당신 발보다 작고 가격도 상의하지 않은 최고가로 했는데 당신은 이 작은 장화를 억지로 신은 뒤 “정말 발에 잘 맞고 편안하니 너무나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서비스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음속으로 크게 욕할 것이다. “정말 강도를 만났군!” 조금도 틀리지 않다. 중국 공산당은 확실히 이런 강도이다.

본시의 나중 두 구절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처해지고 감금당하고 유배당한다”는 말은 그 당시 모택동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이렇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죄명도 번잡한데 무슨 “반혁명, 반동 단체, 반당 분자, 반역 특무, 우파, 자산가” 등이다. 감금하고 유배하는 방식에는 “징역, 노동교양, 노동개조, 학습반, 간부학교, 외양간 재교육” 등이 있었고 사형에 처해지거나 핍박받아 자살하거나 등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사람은 천 만 명이 넘어 피가 강물을 이루었고 시체는 산같이 싸였다. 이런 붉은 공포 중에 모택동은 여전히 “대지에 울려 퍼지는” “만세 만세 만만세”의 붉은 환호를 향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 공개 학살로 공포 조성

제 4기 49 수
영문:
Before the people blood will be shed,
Only from the high heavens will it come far:
But for a long time of one nothing will be heard,
The spirit of a lone one will come to bear witness against it.

인민의 피가 공개적으로 흐르는 앞에
그것은(원귀) 높은 하늘에서만 멀리 갈 수 있으며
하지만 장기간 동안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며
고독한 원귀는 그것에 반대하여 증언하러 올 것이다.

이 시는 중공 정권이 관용적으로 만들어낸 붉은 공포의 방법을 예언했는데 바로 “공개비판” 투쟁을 하여 시위하여 도살하는 기술이다. “공개적으로 피가 흐르는” 공포로 민심을 떨게 하여 그들이 원하는 적색 공포를 도달했으며 사람들이 중공의 행위에 대해 늦가을 매미처럼 아무 말도 못했던 것이다. 이런 공개처형의 정황은 중공 50년대 “토지개혁”과 “진반(鎮反)” 운동 중에 최고조에 달했고 나중에 “삼반”, “오반”, “숙반(肅反)”에 널리 응용되었다.

본시의 “그것은(원귀) 높은 하늘에서만 멀리 갈 수 있으며”는 중공이 가장 좋아하는 살인방식을 예언했는데 공개재판을 열어 고발하고 비판 투쟁을 하였으며 그 후 즉결처형하거나 시위 후에 형장에 끌려가 공개 총살시켰다. 공개 살인이었고 중공은 조직적으로 사람들이 보게 하여 공포를 조성했기 때문에 공개살인의 현장은 중공이 조직적으로 동원한 “군중”으로 겹겹이 둘러싸였다. 그래서 대중 앞에서 피를 죽음을 당한 후 원귀는 현장의 관중들에게 가로막혀 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높은 하늘에서만 멀리 갈 수 있으며”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중공이 공개적으로 살인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광대한 민중을 핍박하여 장면을 보게 했는데 안보아도 안되었으며 백성들이 중공에 대한 공포를 극대하게 강화했던 것이다.

만인대회를 열어 살인하는 것은 모택동이 가장 좋아하는 살인방식이다. 정강산(井岡山)에 있을 때 홍군이 처음으로 영강현을 점령했는데 모택동은 만인대회를 열어 현장에서 공개리에 현 지사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모택동은 회의석상에서 말하기를 이때부터 만인대회를 열어 살인하는 것은 이곳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했으며 이런 살인 방식은 살인이 제조할 수 있는 공포분위기의 극점에 도달했다. 정강산에 있었던 공비 두목 왕좌와 원문재조차 놀라 두려워하며 얌전하게 모택동에게 정강산의 첫자리에 앉으라고 했다.(『모택동,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사실 공산악당의 소위 “천하와 싸울 수 있고, 천하에 앉을 수 있다”는 말은 바로 다른 사람에 비해 더욱 공포를 만들어 낸데 의지한 것이다.

공개 살인하는 대회를 연 것은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초기에 한 첫 번째 일이며 이로부터 붉은 공포를 만들고자 했다. 이는 중공정권의 본질이 바로 공포였기 때문이다. 이 한 점은 중공이 전국 정권을 건립한 후 조금도 예외가 없었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공은 전국에 “반혁명 진압운동”을 전개했다. 모택동은 “깃발을 치켜 들고 반혁명을 죽이자”라고 호소했다. 그는 전체 인민이 진반(역주: 1950년 3월 중국공산당이 발표한『반혁명 분자에 대한 엄격 탄압 지시』)에 참가하여 겁먹게 했는데 북경 한곳에서만 3만 차례의 공개재판 총살대회가 열려 모두 340만 명이 참가했다. “반혁명 분자는” 민중에 의해 총살되고 뇌수는 주위 사람들에게 뿌려졌다. 중공의 살인은 완전히 공포를 제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문건에 인구의 크기 비례해서 살인할 것을 정해놓았다. 이 비례는 실제로 얼마나 많이 살인해야 전면적인 붉은 공포를 설립할 수 있는지 계산에 따른 것이다.

기왕 공포를 조성하기로 살인을 했으니 누구를 죽이고 죽이지 않느냐는 조금도 이성적일 수 가 없었다. 역대의 정치운동 중에 중공은 종래로 “집단학살” 정책을 채용했다. “반혁명을 진압”하는 것을 예로 들면 중공은 반혁명의 행위만 진압한 것이 아니라 반혁명분자를 진압했다. 설사 한 사람이 단지 붙잡혀 며칠간 국군이 되었었고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로 죽음에 처해져야 했는데 그는 “역사의 반혁명”에 속했기 때문이다.(『9평 공산당』을 볼 것)

“진반”을 하는 동시에 중공은 농촌에서 토지개혁운동을 했는데 그들이 제출한 구호는 “마을마다 피를 흘리고 집집마다 투쟁”하는 것이었으며 방법은 여전히 인구비례로 지주를 구분해놓은 후 “지주” 신분에게는 집단학살” 정책을 사용했다. 어떤 지방에서는 “뿌리를 뽑는” 멸절방식을 써서 지주만 죽인 것이 아니라 지주의 가족들도 모두 죽였다.

사진: 공개도살

중공 정권 초기의 “진반”과 “토지개혁”운동 중에 전국에서 피살된 인구는 500만 이상이며 500 여만 명의 선혈 위에 중공의 적색공포가 건립되었으며 이때부터 인민은 중공의 행위에 대해 아무소리 못하였다. 그래서 본시의 제 3구에서는

“하지만 장기간 동안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며” 라고 했는데 이것이 붉은 공포가 겁을 준 효과였다. 또 이 “장기간”은 반세기를 넘어 『9평 공산당』이 나온 최근에 이르러서야 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중공의 적색공포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선에는 선한 보답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답이 있다. 역사는 중공의 사악한 혈채를 일일이 기록할 것이며 만능의 주는 최후의 심판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독한 원귀는 그것에 반대하여 증언하러 올 것이다.”

중국공산당 이 사악의 짐승은 응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다.

* 신도 학살과 종교박해

제 8기 98수
영문:
Of the church men the blood will be poured forth
as abundant as water in (amount);
for a long time it will not be restrained,
woe, woe, for the clergy ruin and grief.

교회 사람들의 피가 쏟아져 나온다
물처럼 넘쳐날 것이다:
장기간 억제되지 않을 것인데
오호라, 오호라 성직자의 황폐함과 비통함이여!

이 시는 중공이 교도들과 종교계인사를 도살하고 사람의 종교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여 장기적으로 종교를 박해하는 죄악을 예언했다.

과거 사람들은 이 시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종교모순과 박해라고 여겼는데 이런 박해는 그리 장기적이 아니었고 모든 교회에 대한 박해가 아니었다. 그러나 본시의 제 3구에서 이 박해는 장기적이며 억제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그것이 예언한 것은 일종의 정치제도 하에서 장기적으로 모든 종교 신앙에 대해 일관된 박해를 말한다.

공산악당은 공산주의 사상을 유일한 합법적인 사상체계로 확립하고 공산사교가 일체 신앙을 능가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정권을 잡는 과정과 정권을 잡은 이후 미친듯이 종교 신앙을 박해했고 종교 교도는 중공 폭정에 대해 이의가 있었으므로 살신지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교회 사람들의 피가 쏟아져 나온다 물처럼 넘쳐날 것이다”라고 했다.

1946년 12월 중공은 기남(冀南) 천주교회의 크라수 주교와 나머지 20여 명의 신부, 수도사들을 눈밭으로 끌어내 옷을 벗기고 개머리판으로 때린 다음 시크라 신부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산채로 태워 죽였다. 1947년 2월 중공은 차하르 숭례현에서 500여 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했다. 1950년 하북 정정(正定) 천주교 신부 오아각과 다른 3명의 천주교 교우들이 중공에게 모욕을 당하고 구타 심문 후 사형에 처해졌다….

1950 년부터 중공은 “삼자(三自) 애국운동”을 일으켜 큰 무리의 신부, 수녀, 목사를 비판하고 감금하며 교회를 폐쇄하고 간행물을 폐간했다. 중국에 있는 거의 모든 천주교기구는 중공에 의해 겁탈 당해 텅 비었으며 중공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점거하고 선교사, 수녀가 고아원의 고아의 심장과 간을 먹고 고아를 의약 시험을 하는데 사용했다고 모욕했다. 대륙의 성직자들은 “지주”, “악질토호”등의 죄명을 쓰고 살해된 것이 8천8백 40인에 달했고 노동개조를 당한 사람이 3만9천 720명이었다. “반혁명”의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인 것이 2450명이고 노동개조는 2만 4천8백명이다.(『중공 종교탄압의 이론과 실천』)

기독교 신도들의 기초적인 조사에 의하면 1957년 이전까지 1만1천여 명의 교인이 피살되었고 대량의 교인이 임의로 체포되거나 벌금을 물렸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공포 하에 기독교 교도들은 자기의 진정한 신앙을 포기하고 “당 영도하의 삼자교회”에 가입했는데 일부 신앙을 견지하며 “삼자교회”에 가입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가정교회를 하다가 중공에 불법조직으로 발견되면 수시로 박해를 받을 위험에 처해있었다.

중국의 다른 종교에 대한 박해 역시 매우 심했다. 불교에 대해서는 절의 재산을 몰수하고 승려들에게 마르크스 사상을 강요하며 세뇌를 강화하여 노동에 참여하도록 강박했다. 절강 영파에는 “불교공장”이 있는데 그 안에는 승려 2만 5천명이 노동착취를 당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중공은 승려에게 결혼을 격려하여 불교신앙을 와해시키려했다. 1951년 3.8절 전에 호남 장사 부녀연합회에서 전 도시의 비구니에게 명을 내려 며칠 내에 결혼을 하도록 했다. 이외에 젊고 건장한 남자 스님은 강제로 군대에 참여하도록 하여 전쟁에 보내어 희생시켰다. 티벳에서 중공은 97%의 절을 훼손하고 신도를 학살했다. 1959년 티벳 학살, 1989년 살육, 2008년에 이르러 내가 이글을 쓰고 있는 중에 중공은 또 티벳에서 학살을 진행하고 있다.

도교에 대해 중공은 50년대 이미 “반동 회도문”이라는 명의로 전국에 3백만 교도, 방회 구성원을 살해했으며 회교에 대해서도 중공은 신강에서 120만 명을 살해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공의 종교신앙에 대한 박해는 여전히 잔혹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박해는 갈수록 심해지고 광범위해져 중공의 “진선인”을 신앙하는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박해는 “생체장기적출”과 “산 사람의 뇌를 먹는” 등의 지구상에서 있어본 적이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헝가리 사건

제2 기 90 수
영문:
Through life and death the realm of Hungary changed:
The law will be more harsh than service:
Their great city cries out with howls and laments,
Castor and Pollux enemies in the arena.

생명과 사망을 통해 헝가리 왕국의 영역은 변한다
법률은 서비스보다 더 가혹해진다
그들의 위대한 도시는 울부짖음과 통탄으로
캐스터와 폴룩스의 반목이 광장에

이 시는 1956년의 헝가리 사건을 예언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사회주의 국가진영”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본시의 제 1구에서
“생명과 사망을 통해 헝가리 왕국의 영역은 변한다”는 헝가리 사건에서 헝가리 시민들이 지불한 생명의 댓가를 말한다. 그러나 헝가리는 여전히 소련에 의해 통제되었다. 1956년 10월부터 11 월 사이에 헝가리의 지식인 학생 노동자들은 스탈린 체제에 도전하여 공산당의 지도부 개혁을 요구했으며 소련의 통제하의 바르샤바 조약의 탈퇴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헝가리 시민이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인 운동을 한 것이다. 결과는 소련이 출병하여 진압하였고 헝가리 시민은 무기를 들고 침략을 저항하다가 마침내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2800명의 헝가리인과 700명의 소련병사가 희생되었으며 그 외에 2만 명의 참가자가 처벌을 받았고 20만 명이(당시 헝가리 인구는 9백만) 고국을 등졌다.

본시의 제 2구
“법률은 서비스보다 더 가혹해진다” 는 헝가리 국민이 공산당 통치에 대한 반항을 예언한 것이며 동시에 이런 반항은 소련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의 원인이 되었다. 공산당은 그들의 “공산주의 원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법률”은 근본적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공산당은 1949년 이후 다른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제도와 법을 참조하여 일당독재를 했으며 계급투쟁을 확대하여 1949년부터 1952년 봄까지 15만명의 “정치범”을 강제수용소에 밀어 넣어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없게 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너지가 총리가 되어 일련의 개혁을 진행했는데 “경제상 긴축하고 중공업에 투자 발전속도를 늦추고 경공업과 농업투자를 늘린다. 정치적으로 당정관계를 정확히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잘못 처리된 사건을 바로잡는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너지는 나중에 “수정주의노선”으로 얻어맞아 당에서 쫓겨났다.

1956년 10월 22일 헝가리 대학생 연합회와 페두베클럽은 각자 “16가지 요구”와 “10가지 요구”를 제출하여 정치 경제체제 개혁을 요구했다. 23일 오전 시민과 노동자가 끊임없이 몰려왔으며 오후 3시 페두베 광장에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 민주개역 요구를 하는 행진을 했다. 24일 소련의 탱크가 부다페스트에 진입하여 헝가리 시민과 군부대의 저항을 받았고 소련의 지지 하에 친소 공산당 좌파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과 소위 헝가리 농민개혁정부는 헝가리를 점령했다.

본시의 나중 2구
“그들의 위대한 도시는 울부짖음과 통탄으로 캐스터와 폴룩스의 반목이 광장에” 는 소련군대의 침략으로 헝가리의 위대한 도시 부다페스트는 “울부짖음과 통탄”으로 가득 찼다. “캐스터와 폴룩스”는 그리스 신화의 쌍둥이 형제인데 그들의 반목은 원한이 되었다. 이것으로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대 가정”의 소위 “형제우의”의 허위를 풍자했으며 한편으로는 소련군이 헝가리에 침략은 민족과 정당의 분열을 가져다 준 것을 말한다. 나중의 노디를 교수대에 보낸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 총서기 카다르는 바로 노디가 당초 잘못 처리된 사건을 바로잡아 석방되어 나온 사람이었다. 거의 30년 후 중공은 개혁적인 총서기 호요방 역시 바로 그가 잘못을 바로잡아 석방시켜준 노간부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쫓겨났고 연금당해 죽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산당이 말하는 “인간성”이다.

* 반우파 운동으로 지식인 공격

제 6기 8수
영문:
Those who were in the realm for knowledge
Will become impoverished at the change of King:
Some exiled without support, having no gold,
The lettered and letters will not be at a high premium.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국왕이 바뀌어 처량하게 될 것이다.
허다한 사람들은 유배되고 무일푼이 된다.
학자와 학문은 고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 시는 중공이 50년 대부터 반우 운동을 개시하여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규모적인 지식인과 독립사상과 인격에 대한 교살을 예언하였다. 목적은 중공사교주의 사상을 유일한 권위와 통치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 시의 앞 두 구절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국왕이 바뀌어 처량하게 될 것이다” 는 이번의 지식인에 대한 박해를 예언했으며 일개국가 정권의 변천 이후이며 동시에 이 박해는 의 근원은 새로운 국왕 즉, 모택동임을 말한다. 또한 이번 반우운동의 주요 박해 대상은 중공이 소위 말하는 “구 지식분자”이며 중공 정권건립 이전에 교육을 받은 지식분자를 말한다. 중공은 “구 지식분자”에 대한 책략은 매우 가혹하고 철저히 나쁜 마음을 먹고 그들의 독립사상의 중추를 잘라버려 그들을 노예화 시키고 즉 “노예화 정책”이었다, 나중의 문화혁명에 와서 중공은 완전히 중공정권 수립 후 교육받은 “신지식분자”에 대해 채택한 것은 또 다른 한조의 정책인 “우민화정책”이었다. 그들을 이용하여 전통문화와 도덕을 소멸하는 데 쓰는 졸개로 충당하여 중공의 “문화의 희생물”이 되게 했던 것이다. “노예화”와 “우민화”는 바로 중공이 지식분자에 대한 핵심정책이었다.

중공은 정권 건립 후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원조함” “토지혁명”부터 “반혁명진압”, 나중의 “삼반오반”과 “숙반”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의 비린내 나는 운동은 이미 전국에 붉은 공포를 형성했고 인민은 중공의 행위에 대해 일찍이 “감히 노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중공의 사교는 세계의 어떤 사악의 세력보다 더 사악한 “사악의 짐승”으로 그것의 인민이 그것에 대해 “감히 노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여도 불만이 있어도 그것은 사람들이 “달게 원하도록”, 그것들의 노예가 되도록 원했는데 그들의 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기 위해 “구 지식분자”의 독립사상과 인격을 필수적으로 토벌했다. 그래서 반우운동은 중공사교가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으며 이미 통치의 순서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 무슨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 지식분자”를 박해하기 위해서 바로 취한 것은 바로 “말로 죄를 얻는” 방법이었는데 붉은 공포 하에서 “구 지식분자” 들은 이미 “감히 노하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하는가? 중공은 사교의 양대 특성, 하나는 폭력공포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과 사기이다. 그래서 속임수로 사용처를 찾는 것인데 바로 모택동의 음모였다.

1957년 4월 모택동은 “인민일보”에 사설을 발표하게 했다.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에 대한 방침-계속 손을 놓고 있을 것」 4월 27일 중공중앙은 또 <정풍운동에 관한 지시>, 5월 2일 <인민일보>에 발표된 <왜 정풍하는가> 등이 있었다. 이 사설에서 모택동은 매우 간절하게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공산당의 정풍운동을 돕도록 했는데 실제로는 중국 지식인을 유혹하여 침입하는 전략인 “뱀이 굴에서 기어나오게” 한 것이었다. 5월 15일 모택동은 당내의 고급간부에게 쓴 <사정은 변화하고 있다>는 문장 중에서 “민주당파와 고등학교에서 우파의 표현이 가장 견결하고 미친듯하다. 우리는 그들이 한 동안 더욱 미치게 하고 그들이 정점에 도달하게 한다. 그들이 미칠수록 우리들에게 유리하다. 적군을 유혹하여 집결시켜 섬멸한다.”

과연 5월 19일부터 시작하여 북경 각 대학의 “대명대방(大鳴大放-누구든지 자유롭게 의견을 이야기함)”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하루에 1만장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학생들은 “특권을 반대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민주와 헌법제도”를 요구했다. “뱀이 굴에서 기어 나오게 하는” 수법은 성공했다. 6월 8일 중공 중앙은 모택동이 친히 기초한 <우파분자의 미친듯한 진공에 반격하는 조직에 관한 지시>를 발표했는데 중공은 지식분자에 대해 “말로 죄를 얻는” 것으로서 반우운동을 규탄을 철저히 시작했다.

본시의 “허다한 사람들은 유배되고 무일푼이 된다. 학자와 학문은 고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는 반우운동이 시작된 후 중국의 광대한 지식분자는 비참하게 되었는데 그뿐 아니라 “허다한 사람들은 유배되고 무일푼이 되었다.” 1957년의 “반우운동”과 1958년의 “반우보과”에서 전 중국의 지식분자는 반우운동에서 사람마다 고비를 넘겨야 했는데 그 중 공산당이 인권을 정리하는데 사용한 네 가지 조목이 있었다.
1) 뱀이 동굴에서 기어나오게 함
2) 죄상을 모해하고 갑자기 습격하며 한마디로 단죄하기
3) 병을 고쳐 사람은 구한다고 하면서 실제상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4) 사람을 핍박하여 자아비판을 시키고 이것을 빌미로 무한히 비판함

결과적으로 전국에서 55만 명이 우파로 체포되었으며 실제로 “중도 우파분자”, “우파분자로 의심되는 사람”과 “우파의 행동이 있는 사람”까지 더하면 전국에서 200여만 명이 체포되었다. 수십만 명이 “유배되었으며” 변방, 농촌, 감옥 등으로 쫓겨 가서 육체노동을 당했고 많은 사람이 박해당해 죽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파분자는 노동교양 농장에서 비참한 경우를 당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이 감숙 협변구 노교 농장의 참혹한 사건이었다. 3천여 명의 인원 중 400여 명만 살아남았다. 중공은 우파가 박해당하여 죽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의사를 이용하여 2천600명의 “병으로 사망했다”고 조작했다. 반우는 수백만명의 지식분자의 가정에 수십 년의 고난을 가져왔다.

1958년 모택동은 8대 2차 대회에서 지식분자를 조롱하는 말을 했다. “진시황이 무엇인가? 그는 그저 4백 60여명의 유생을 파묻었는데 나는 4만 6천여 명을 파묻었다. 우리의 반동 진압은 아직 일부 반혁명 지식분자들을 죽이지 않았다. 나는 민주인사와 변론했는데 당신이 우리를 진시황이라고 욕하는데 그건 옳지 않다. 우리는 진시황의 백배가 넘는다. 우리를 진시황이라고 욕하고 독재자라고 욕하는데 우리는 모두 인정한다. 애석한 것은 당신들의 말은 충분치 않으며 왕왕 우리가 보충해야 한다(큰 웃음).”

모택동의 큰 웃음은 내심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또 한 번 “사람과 싸우는” 중에 “그 무궁한 낙”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참혹하면 할수록 모택동은 더욱 즐거워지며 마귀의 심리는 이와 같다.

반우파 운동의 철저한 규탄을 통해 중국지식인의 독립사상과 인격은 거의 완전히 죽어버렸고 중공사교는 구 지식분자에 대한 노예화를 완성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반우파 운동을 경험한 후 중국은 전반적으로 이미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함” 하는 사회로 변했으며 아무도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저명한 작가 파금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반우파 운동 후 중국인들은 그저 감히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히 거짓말도 못했다. 어쨌든 반우운동 후 지식인은 마침내 당에 복종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20년 후 중공은 또 지식분자를 이용하여 건설할 때가 되어 중공은 99% 우파에게 오명을 벗겨주겠다고 선언했으며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친다”고 자기 자랑을 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20년간 비참한 세월을 다시 오게 할 수 있는가? 십만 명이 넘는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는가? 중공은 반우운동이 99% 잘못했다고 승인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우운동은 필요했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일당 독재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중공은 “반우운동이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20년 후 지식분자를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것이 필요했다. 중국인의 운명은 바로 이렇게 중공의 손안에 장악되어 있고 당이 원하면 죽이고 당이 이용하려면 이용한다. 단지 당의 영도 하에 영원히 노예가 되는 것이다.

발표시간:2008년 3월 25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8/3/25/519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