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공산주의의 죄악
작자:역천균
【정견망 2008년 3월 31일】
제 5절: 중공이 음모를 꾸민 대약진과 대기근
*중국 대기근의 참극
제 1기 67수
불문:
La grand famine que ie sens approcher,
Souuent tourner puis estre vniuerselle,
Si grande & longue qu”on viendra arracher,
Du bois racine, & l”enfant de mamelle.
영문:
The great famine which I sense approaching
will often turn (in various areas) then become universal.
It will be so vast and long lasting that (they) will grab
roots from the trees and children from the breast.
대기근이 가까워 옴을 느낀다
그것은 각지에서 늘 나타나며 나중에 보편적으로 퍼진다
기근의 지역은 매우 넓으며 오랜 시간 지속한다
나무뿌리조차 먹으며 아이들은 우유가 없다
본시의 제 2구의 원문 중 “vniuerselle”은 영문에서 “wordwide”로 번역했으나 여기서는 “universal”로 환원했다.
이 시는 중국에서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기근을 예언했는데 이 때 대기근으로 4천만명이 굶어 죽었으며 전 세계가 공인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건이다. 2007년 중국 대륙 정부당국의 “염황(炎黃)춘추”라는 잡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년 대약진 운동 기간 중 3천7백5만 명이 아사했으니 동서고금에 가장 큰 재난이었다.”
그러나 대기근을 조성한 원인은 오랫동안 똑바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중공은 처음에는 무슨 “3백년의 자연재해”니, “귀신이 빚을 받는 것” 이라고 했다. 이 사실이 다 부정되자 사람들은 “대약진”, “인민공사운동”과 “반우경운동” 등이 대기근을 조성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완전히 중공이 조성한 인재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택동의 “단독 범행”이며 조급하게 전진하려다 생긴 일이라고 여겼다. 이런 해석은 마치 공산당이 “좋은 마음으로 했지만 나쁜 일을 하게 된”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융이 지은 “모택동,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서는 대기근 중 3천만 명에 달하는 인민의 사망은 음모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오늘 날 우리는 <제세기>의 해독을 통해 1958년부터 1961년 사이의 대기근은 완전히 모택동을 수령으로 한 중국공산당이 고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며 대기근은 모택동이 예상하고 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중공의 사악한 목표와 이익을 위해 수천만명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힘써 저지른 것이다.
본시의 앞 두 구절
“대기근이 가까워 옴을 느낀다 그것은 각지에서 늘 나타나며 나중에 보편적으로 퍼진다”는 것은 50년대 말 중국에서 각지에 기근이 늘 발생하며 또 발전하여 전국으로 퍼진다는 것을 예언했다. 이것은 완전히 중공의 농촌정책으로 생긴 것이다.
중공은 자신을 위한 군수산업을 건립하고자 했고 군대는 중공 사악의 통치기구였다. 하지만 인민의 생사는 모택동의 안중에도 없었다. 1953년 중공은 군수산업을 핵심으로 하는 제 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했는데 이중 군사비용과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 투자가 전체 지출의 61%를 점했다. 그러나 교육, 문화, 의료 위생은 전부 다 해서 겨우 8.2%밖에 안 되었다. 중국에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기업을 “소련원조항목”이라고 했는데 모두 식품을 수출하고 농산품으로 지불한 것으로 이런 것은 완전히 중공이 가련한 중국농민의 손에서 착취하여 빼앗은 것이었다.
중국의 경작지는 세계의 7%이지만 인구는 전 세계의 22%이다. 먹을 것이 부족해 식량은 전통적으로 수입에 의존했다. 중공은 양식을 착취하여 수출하기 위해 실제로 백성의 입에서 먹을 것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중공은 도시와 시골을 차별하는 극대한 호구제도를 제정했다. 엄격히 수량을 정하는 방법으로 도시 인구는 기본 식품을 보장했으나 농민에게는 보장하지 않았다. 도시의 인구를 제한하기 위해 농민들을 시내로 이사 하지 못하게 했고 시내에 들어와 일을 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은 평생 자기의 고향에서 죽게 했다.
농민에 대한 이런 제한과 압박은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중공은 농산품에 대해 “통일적으로 계획하고 일괄 구매한다”는 정책을 정했는데 실제로는 농민의 산물을 전부 빼앗아 가고 그저 생존과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만 남겨놓았다. 모택동이 정한 식량표준은 농촌 전통적인 굶어죽지 않고 배부르지 않을 정도의 수준인 400근인데 이 표준조차도 도달하지 못했다. 도시의 인구의 식량 표준 역시 매우 낮아 배불리 먹지 못하고 굶어죽지 않을 뿐이었다. 공산당의 친구인 미국인 “한소음(韓素音)” 역시 중국에서 1960년에 한 도시의 가정주부가 매일 얻을 수 있는 영양은 1200칼로리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때 독일의 나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매일 한 사람당 배급하는 식량 표준이 1300-1700 칼로리였으니 중국 도시 인구의 식량 정량은 나찌 수용소의 노예에도 못 미쳤던 것이다. 이렇게 중공은 중국 백성들의 입에서 먹을 것을 빼앗아 전체 중국인민은 배불리 먹지 못하는 날을 지내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중국농민들은 설사 수확이 좋은 해라고 해도 1년에 적어도 3개월의 양식이 부족했고 전 가족이 죽을 먹으며 산나물을 끓여먹고 잡곡을 7-8할 섞어 한 끼를 때워야 했다. 그러나 중공은 매년 대량의 양식을 수출하여 군사 공업품목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매년 무상으로 외국에 대량 원조를 했으니 이런 원조는 흔히 전국의 문화교육에 투입하는데 상당하는 양이었다.
모택동은 농민이 배를 곯을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1953년 4월 21일 그는 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전국에 대략 10%의 농민이 봄, 여름 기근이 있고 식량이 결핍되며 심지어 불조차 때지 못하는데 이런 현상은 해마다 이와 같다.” 1955년 8월 3일 모택동은 또 지시를 내렸다. “농민이 좀 적게 먹도록 교육하고 국가는 가능한 한 판매를 줄여야하며 일반 농민이 식량이 있는 계절에 과다하게 많이 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공이 양식을 강제로 징발하는 행위에 대해 어떤 사람은 공산당에게 관대히 봐줄 것을 기대하며 좀 양심이 있기를 말했는데 모택동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이 사정에 대해 우리는 양심이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좀 흉악하며 양심이 많지 않다.” “양심이 좀 적은 게 좋다. 우리는 이런 동지가 너무나 인자하며 악독하지 못한데 다시 말하면 그다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이 때문에 설사 보통의 수확이라 하더라도 중공이 “대약진 운동”을 하지 않았을 때 중국 농촌의 기근은 “늘 각지에서 나타났던” 것이며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죽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공의 터무니없는 세금은 오히려 갈수록 심해져서 “대약진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1958년 말 각지에서 대기근이 나타났으며 1959년 봄, 하북, 산동, 강소, 안휘 등 15개성에서 봄 기근이 들었으며 그 중 하북, 산동 등 5개성에서는 식량이 매우 부족했고 나중에는 보편적인 재난이 되었던 것이다.
본시의 “기근의 지역은 매우 넓으며 오랜 시간 지속한다 나무뿌리조차 먹으며 아이들은 우유가 없다.” 는 바로 중국대기근의 지역이 광대하며 시간이 길어지고 참혹한 장면을 예언한 것이다.
중공 정부의 통계수치에 따르면 당시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1959년 전국 17개 성급 지역에 622만 명이 기아 및 비정상적으로 사망했고 그 중 도시에서는 95만 8천여 명이 죽었다.
1960년 전국 28개 성급 지역에 1155만 명이 기아 및 비정상적으로 사망했고 그 중 도시에서는 272만여 명이 죽었다.
1961년 전국 17개 성급 지역에 1326만 명이 기아 및 비정상적으로 사망했고 그 중 도시에서는 211만 7천여 명이 죽었다.
1962년 전국 17개 지역에 751만 8천여 명이 기아 및 비정상적으로 사망했고 그 중 도시에서는 107만 8천여 명이 죽었다.
이렇게 4년 동안 도합 3천9백만 명이 아사 내지는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는데 58년 말에 아사한 사람을 합하면 총 4천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중공의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융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960년만해도 전국에서 2천2백만 명이 아사했다.
수천만 명이 아사한 대기근으로 말하면 “나무뿌리조차 먹고 아이들은 우유가 없는” 정황은 알만하고 어떤 사람은 그때를 회억하여 “감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다 생각했으며 먹을 수 있는 것, 심지어 먹을 수 없는 것도 전부 다 갉아먹고 씹고, 삼켰다. 느릅나무 껍질, 버드나무 껍질도 다 벗겨졌다. 버드나무는 껍질은 황련보다 더 쓴데 깎아서 굽고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삼켰다. 메밀 껍질을 태워 물에 타서 마시면 유용했고 목화조차도 파내어 먹었다. 마지막에는 메밀 옷도 먹고 사람이 부어서 사람모양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이 마지막에 먹은 것은 진흙이었는데 “관음토”라고 부르는 진흙이었는데 이것을 먹으면 창자가 아래로 처지며 결국에는 사망한다.
이 대기근에 많고 많은 농촌 마을이 전체가 아사하여 사람이 끊겼는데 하남 신양지구 식현에서만 639개 마을이 전멸했으며 광산현에서는 5천6백 17호가 다 죽었고 고시현에서는 3천4백24호가 죽었다. 안휘성 봉양 전체 현에서는 8404호가 죽었다.
1958년부터 1961년간의 대기근은 중국공산당이 중국 농민에게 범한 “집단학살죄”라고 할 수 있다.
* 대약진이 초래한 대기근
제 2기 75 수
불문:
La voix ouye de l”insolit oyseau,
Sur le canon du respiral estage :
Si haut viendra de froment le boisseau,
Que l”homme d”homme sera Antropophage.
영문:
The voice of the rare bird heard,
Over the pipe of the air-vent on the stage:
So high will the bushel of wheat rise,
That man will be eating his fellow man.
매우 드문 새소리가 들린다
무대 위의 통풍구 위로
밀의 생산이 매우 높아지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이 시는 중궁 1958년에 시작한 “대약진 운동”이 수천만 명의 중국인을 아사시킨 대기근을 일으킨 것을 정확히 예언했다.
본시의 제 1구 “매우 드문 새소리가 들린다”는 대약진 운동이 시작한 시간을 말한다. 동시에 대기근이 시작한 그 해 1958년이다. “매우 드문 새”는 시간의 암호인데 1957년은 음력 “정유(丁酉)년”이며 십이지의 닭 해이다. 닭은 가축으로서 <제세기>예언에서는 “새의 해”이라고 할 수 있다, 양력 1958년 1,2월 음력 정유년 말기이다. 그렇다면 “매우 보기 드문”은 1958년 1월 모택동이 파리와 모기를 소멸하려는 내용인 “4가지 해를 제거하는 위생 운동”을 전개한 시기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그 중 참새 역시 모택동이 제시한 4가지 해 중 하나인데 그래서 참새를 없애는 것이 전 국민의 운동이 되어 나무에서 늘 보이던 참새가 매우 보기 드문 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각지에서는 “4가지 해를 제거하는 위생 운동”의 지휘부가 성립되었는데 당시 인민일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인민의 수도에서는 참새가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3백만명이 늘 동원되어 하루에 8만 3천을 섬멸한다.” 또 신화사 보도는 “상해시 인민은 27일 한바탕 전면적인 참새 포획작전을 전개했다. 이 날 잡은 참새는 다 합해 20만 1624마리이며 참새 둥지를 부순 것이 11만 621개임.” 사실 이 황당한 “인민운동”은 단지 모택동이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붉은 공포와 반우 운동을 경험한 후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리석게 충성하며” 얼마나 따라가는지 보려고 한 것이었다.
본 시의 “무대 위의 통풍구 위로”는 대약진 운동 중에 “대련철강(大煉鋼鐵-철강을 크게 생산하자)”의 정황이다. 더욱이 도처에 “토법련강(土法煉鋼-민간의 제련방법)”의 황당한 장면이 있었으며 여기서 무대의 통풍구는 바로 “대약진 운동” 중의 “토법련강”의 연통이었다(사진을 보라).
8월 중공 중앙정치국은 북대하 회의에서 하루에 농업생산의 지표를 확정하여 1958년 철강 생산량을 갑절로 만들 것을 제의했으며 대약진 운동의 중요 단계로 삼아 1070만 톤에 도달하도록 하는 <전당 전민은 1070만톤 생산을 위해 분투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회의 후 전국에서는 전 국민이 철을 만들고 인민공사화의 고조가 형성되었다. 중공은 “이강위강(以鋼爲綱)-철을 기간 산업으로 한다”는 구호를 제출하여 전 국민에게 철을 만들 것을 호소했으며 농촌조차도 고로를 만들어 밭에서 강철을 제련하며 많은 사람의 집에는 쇠 솥 내지는 기타 철기 등의 금속을 헌납하여 강철을 만들도록 했는데 만들어 낸 것은 모두 못 쓰는 폐철이었다.
본시의 마지막 두 구
“밀의 생산이 매우 높아지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는 중공이 한 농업생산의 “대약진운동”이 중국 대기근을 조성한 것을 정확히 예언했다. 또한 사람이 사람을 먹는 현상이 나타남도 예언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밥을 먹지 못해 심지어 사람을 먹었다. 이 점은 서방사람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인데 이 역시 수백년 전에 <제세기> 예언시에서 말한 대기근을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던 원인이다. 그러나 중국인으로 말하면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기근 동안 밀값이 뛰어 사람이 사람을 먹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1958년의 인민공사화(농촌조직) 운동의 “공산풍(共產風)”과 “사람이 담이 크면 대지도 생산이 커진다”는 농업을 과장하는 바람(浮誇風)이 바로 전국의 대기근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1958년 모택동은 일년 식량 생산을 배로 증산한다는 구호를 제출하여 중공은 전국에서 무슨 “사람이 담이 크면 대지도 생산이 커진다”, “땅의 생산은 사람의 담이 결정한다”, “만근의 사상이 없으면 만근의 수확이 없다”는 등의 선전을 하였고 그래서 각개 인민공사는 “높은 생산 위성”을 큰소리 쳤는데 이 예언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의 “밀의 생산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1958년 6월 호북성 광화현에서 전국을 놀라게 하는 한건의 큰 뉴스가 터졌는데 최영향 행복사 제 2생산대대의 11묘에서 밀의 평균 생산이 3215근이어서 “최영향 3215위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정상적인 밀의 생산은 일묘당 평균 그저 700-800 근 정도인데 묘 생산량이 3215근이라는 것은 평소의 4배이다. 이때부터 농업생산의 위성은 부단히 나타났다. 7월 경 호북성 장풍 농업생산 회사에서는 이른 벼생산이 한 묘당 15361 근이며, 10월이 되자 <천진일보>에 보도에 의하면 천진시 동부 교외의 신립수도 시험 밭에서 뜻밖에 생산이 12만 근이 되어 벼 위에 사람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을 참관시켰고 모택동은 친히 이 책임전을 시찰했다.
감숙성 통위현에서 1958년 전현의 실제 식량 생산량은 8,300여만 근인데 허위보고는 1억8천만 근이어서 정부가 사들이는 양이 3,800여만 근이 되니(전 생산량의 45.6%) 일인당 평균당 200근밖에 안되어 대량의 인구가 굶어 죽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59년 11월부터 연말까지 죽은 사람이 많았다. 백성들은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을 흘린다. 어른이 아사한 사람들, 아내가 죽은 사람들, 날을 지내기가 흐리멍덩했다. 사람을 삶아먹고 살을 잘라 먹었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저 먹고 살려 했다. 자기가 낳은 아이도 잡아먹었다. 또한 밖으로 도망나 온 사람을 잡아먹은 경우도 있었다. 자기의 아이를 잡아먹고, 부어서 중독이 되어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병으로 죽고 또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 아이를 잡아먹고 마음이 부끄러워 먹은 후 후회하고 자기의 한이 된 사람도 있다. 마을에는 살지 못하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않았고 더럽다고 싫어했다”(“50년대 말 대기근의 놀라운 기록”)
하남 신양(信陽)지역에서는 전 지역 실제 생산량이 20여억 근인데 허위로 72억근이라 보고했다. 그 결과 16억근을 바쳐야 했다. 농민의 식량, 종자도 모두 바쳐야 했다. 추수가 막 끝나자 많은 곳에서 군중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 당시 신양지구의 “한 촌락 한 촌락씩 차례로 사람이 굶어 죽었다” 근식현에서는 639개 마을이 다 굶어죽었다. 고시현에서는 “전 현에서 사람과 연기가 없는 마을이 400 여 곳이나 되었다.” “사람이 다 죽은 집은 광산현에는 5천6백47호, 식현에 5133호, 고시현은 3424호였다.” 신양지구에 전반적으로 죽은 사람이 1백만이 넘었다. 기이한 것은 당신 신양지구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식량이 없어 굶어죽었는데 대소 양곡 창고는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차라리 백성들이 아사하도록 내버려두었지 창고 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이 시에서 예언한 것처럼 중국의 대기근은 중 “사람이 사람을 먹는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하남 고시현에 90만 인구에 정부의 기록에 의하면 200 여건의 사람을 먹은 사례가 있으며 당내 문건에는 봉양의 한사람 하나의 인민공사에는 63 가족이 사람을 먹은 안건이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사람을 먹은 사건은 사천, 감숙, 청해, 티벳, 협서,영하, 하북, 요녕에도 있어서 거의 전국에 보편적으로 다 있었다.( “아귀-모택동 시대 대기근의 비밀 폭로”)
관련된 기록에 의하면, 1958년 3월 중공중앙은 농업생산량의 역대로 풍년, 평년이 교체 하는 사실을 무시하고 상해회의에서 그해의 징수는 1,150억근으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58년의 표준이며 실제로는 59년은 전국의 식량이 대폭 감산되었으나 중공은 조금도 계획을 삭감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계획보다 200억근 더 많은 1,350억근으로 결정하여 대기근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전국 농민의 평균 남은 양식은 59, 60년 이 년간 급격히 감소되어 57년의 250근에서 174근이 되었다.
59년 식량 생산이 11% 줄었음에도 징발량은 오히려 14% 증가했다. 당시 농업생산 능력으로 보면 농촌양식의 상품율은 거의 100 분의 29이다. 그러나 59년 전국에서 징수한 양식의 전체의 40%롤 점유했다. 그중은 상당 일부분은 중공이 말하는 농민이 스스로 낸 남은 양식이 아니라, 각 성, 지구, 현, 공사 각급 당조직에서 모택동의 지시인 “반(反)만산사분–만산사분(瞒产私分)-생산량을 속여 몰래 나눠 갖는일-역주”을 집행한 것이며 층층이 서로 핍박하고 전적으로 정치적인 방법으로 강제로 농민이 먹을 양식을 빼앗은 것이었다.
농민의 먹을 양식을 빼앗은 이점에 대해 모택동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59년 7월 5일 양식을 징수하는 간부에게 지시하기를 “농민들에게 말해라. 겨와 나물로 반 년치 양식을 회복하라고 하라.” 그의 논리는 “1년 고생하면 2,3년이면 이면 편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는 각 당조직에게 강행 농민의 입에서 식량을 강제로 뺏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양식을 반을 빼앗아 농민들은 겨나 채소로 대체하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1959년 전국 농민의 평균 양식의 점유량은 겨우 58년의 77%였다. 1958년 11월부터 시작하여 각지 인민공사의 식당에는 늘 양식이 떨어졌다. 1960년도 초가 되자 “비정상적인 사망”이 전국 농촌에 보편적이 되었으며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 대기근은 사악한 중공의 인재
제 4기15 수
불문:
D”où pensera faire venir famine,
De là viendra le rassasiement :
L”œil de la mer par auare canine,
Pour de l”vn l”autre donra huille froment.
영문:
From where they will think to make famine come,
From there will come the surfeit:
The eye of the sea through canine greed
For the one, the others will give oil and wheat.
어느 한 곳에서 그들은 기근을 오게끔 만들려고 한다
그곳에서 음식을 폭식할 것이며
(중남)해의 눈은 개같은 탐욕을 통해
그것을 위해 모든 사람들은 기름과 밀을 줄 것이다.
본 시의 제 4구의 원래 영문은 “the other”인데 원문에 근거하여 “the others”로 고쳤다.
이 시는 급소를 찌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직접 1958년부터 3년간의 대기근은 완전히 모택동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공이 음모한 것임을 지적했다.
본 시의 제 1구는 직접 어느 곳에서 기근을 제조하려 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바로 중국이며 기근을 오게 하려는 사람들은 바로 중국공산당이다, 우리는 제 2구에서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다.
“그곳에서 폭식할 것이며”라고 했는데 세계상 기타 어느 곳에서 “폭식하여” 기근이 오는가?
그러나 1958년의 중국이 인민공사를 크게 일으킨 후 “공공식당”을 크게 열었으며 인민공사의 “공공식당”에는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고 선전했는데 이런 대기근 전에 폭식하는 기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본 시의 “(중남)해의 눈은 개같은 탐욕을 통해 그것을 위해 모든 사람들은 기름과 밀을 줄 것이다.” 는 1958년부터 1961년간의 수천만 중국인이 아사한 대기근을 조성한 근본원인은 개같이 탐욕스런 중공이며 고의로 고율의 세금으로 양식을 빼앗아가며 잔혹하게 하여 중국 백성들의 입에서 양식을 탈취하여 조성된 것이다. 역시 중공이 고의적으로 “가렴주구”하여 몇 년의 대기근을 조성한 것이다. 이는 마치 <아귀> 라는 책을 쓴 작자 구스바 베이커가 말한 것 같이 “이것은 실제로 인위적인 대재난이며 중국 공산당의 반인류적 죄악이다.”
우선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중국에는 대기근을 조성할 자연재해가 없었다. 다음에 1957년 농업은 풍년이었고 그 다음 3년은 풍년은 아니었지만 농업수확은 적어도 평작은 되었으며 과거의 정황에 근거하면 대기근이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하남 신양지구처럼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 양곡 창고에는 양식이 가득했으며 이 때문에 대기근의 발생은 양곡이 없는 문제가 아니라 공산당이 고의로 양식을 빼앗아 가고 백성들에게 주지 않아서 백성들이 아사하게 된 원인이었다.
만약 농업생산량의 과장하는 풍조 때문에 양식을 많이 징수하는데 착오를 일으켰다면 그 착오는 쉽게 고칠 수 있으며 많이 징수한 양식은 백성들에게 돌려주면 되는 것이지 어찌 사람을 굶어죽게 하는가? 그러나 공산당은 눈을 빤히 뜨고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서도 식량을 돌려주지 않았으니 답안은 한가지 밖에 없다. 고의적으로 양식을 많이 징수하는 것이 공산당이 미리 정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공산당이 미리 정한 정책이 아니라면 왜 58년 59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사했는데 중공은 여전히 높이 징수하여 60년 61년에 더욱 많이 아사했는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지방간부가 농업의 과장바람을 일으켜 중앙을 속여 모택동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여 착오를 범하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도 수백만이 굶어죽은 뒤에야 이해했으며 어찌 수년의 노력을 들여 수천만 명이 굶어 죽지 않으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사실, 모택동은 농촌의 상황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중공중앙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친 중공은 어떤 사람도 진상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 1959년 여산회의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영웅(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도운 영웅-역주)”인 국방부장 팽덕회 원수는 농촌에서 아사하는 진상을 말했기 때문에 즉각 타도되었고 이 뿐만 아니라 전국에 천여 명의 “우경 기회주의자”가 비판을 받았고 천여 명의 간부들이 “우경분자”로 몰렸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는 간부의 상당수를 점유하는 비례인데 그것은 전국적으로 간부가 “사람이 굶어죽는” 문제에 대해 진상을 말하면 안 되고 양심을 말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었다.
큰 사무소의 공공식당에서는 양식을 낭비했고; 강철을 연마하여 노동력을 빼내어 농번기를 놓쳤고; 불합리적으로 “깊이 갈고 빽빽하게 심는” 등은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비록 기황의 재난을 더욱 심해지게 했지만 기근의 주요원인은 아니었다. 기근의 주요원인은 바로 공산당이 고의적으로 양식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양식을 탈취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의 양식을 탈취하기 위해 탈취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유를 찾지 못하면 “가상”을 만들어 이유를 창조했다. 폭력과 유언비어는 중공사악이 늘 쓰는 기술이었다.
천진 신립촌의 한 묘(亩)당 12만근을 생산한 실험전의 경우 농민 출신인 모택동이 설마 가짜임을 모른단 말인가? 이지수의 회고록에 의하면 1958년 11월 “대약진은 정말 떠들썩했다. 그 역시 식량생산량에 대해 그렇게 높을 수 있는지 회의적이었다. 그는 늘 말했다. :”나도 양곡 생산이 한 묘당 만근이 넘는다는 것을 안 믿는다.” 재래식 고로연강에 대해서는 그는 더욱 의심과 우려가 깊었다. “이런 고로로 강철을 만들면 쓸모가 있을까?””
모택동의 “농업을 과장하는 바람”은 근본적으로 사기극이었다.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농업의 과장풍만 사기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반 농업 “대약진”이 바로 일대 사기극이었으며 이 대 사기극은 모두 모택동과 중공에 의해 연출된 것이다: 이 사기극을 만든 목적은 단 한가지 이다. 농업 “대약진”의 가상을 만들어 식량을 크게 징발하는 “대약진”을 하고 이는 바로 백성들이 생산한 양식을 빼앗는 이유를 만든 것이다. 모종의 각도에서 말하면 소위 공업 “대약진” 운동은 바로 농업 “대약진” 운동을 덮기 위한 가상이었던 것이다.
중공의 본질은 바로 한 떼의 강도이다: 중공의 소위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 재산을 공산당 손안에 넣는 중공의 “공유제”인 것이다.
장융은 그녀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5년 중반 전국 농촌은 합작화를 실행했다. 합작화 없이는 개체 농민은 먼저 수확하고 국가에 세금을 낸다. 이렇게 하면 농민은 양곡을 저장할 수 있다. 중국 농민은 수억인데 하나하나 검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합작화 후 논에서 수확한 것을 직접 국가 손에 가져가고 다시 국가에서 농민에게 분배하여 국가가 수확에 대해 완전히 통제 할 수 있었다.”
“합작화는 모택동에게 다른 좋은 점은 농민의 노동을 감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개체 농민은 출퇴근하며 일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자기 일이었지만 합작화한 후에는 자기 일이 아니었다.” 자발적이 아니었다.
중국은 농촌을 인민공사화 하여 전국의 수억 농민을 2만6천여 공사에 집중했다. 모택동은 공사화의 좋은 점을 이렇게 말했다: “크면 관리하기 좋다.” 인민공사는 공동식당을 운영하고 농민의 식량은 공사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하면 농민은 양식을 숨길방법이 없고 공산당은 백성의 양식을 탈취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인민공사에게 지시만 하면 되었다. 가가호호 일일이 빼앗을 필요가 없었다. 공사사원은 공공식당에서만 밥을 먹을 수 있고 집에서 밥을 짓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솥, 화로조차도 모두 부수었고 출근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백성의 양식을 빼앗으면 대량의 농민이 아사하고 대기근이 나타날 것을 중공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1958년 11월 21일 모택동은 중공 고위층에게 말했다: “큰 수리공사”를 하는 외에도 “또한 각종각양의 임무, 즉 철강, 아연, 동, 석탄, 운수, 가공공업, 화학공업은 많은 사람이 소요되는데 이렇게 하여 내가 보니 중국은 반이 죽지 않으면 안되고 반이 죽지 않으면 않아도 3분의 1, 혹은 10분의 1인 5천만 명의 사람이 죽어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이 많은 사람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이 할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공은 오히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국인민의 사활은 상관하지 않았으니 마치 흑심을 품은 강도가 인질의 사활을 상관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국제적으로 “대약진”운동의 정의는 1958년부터 1960년 상반기에 중국 공산당의 영도하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발생한 중국대륙의 풍족한 군중을 이용하고 동유럽과 소련에 대량으로 농산물을 수출하는 방법으로 재빨리 군사공업화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한 한바탕의 운동이다. 중국의 식량 수출은 바로 이기간 절정에 달했고 그 중 1959년 중국의 의외로 420만 톤의 식량을 수출했는데 풍년이 있었던 1957년 식량수출의 두 배보다 많았다. 동시에 중국에서는 수천만의 아사한 대기근이 이 몇 년에 있었고 대기근의 원인은 중공이 군사공업화를 위해 힘껏 백성의 양식을 빼앗아 수출하여 수천만의 백성을 아사하도록 한 것이며 중공 역시 이렇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은 본래 이미 소련의 수 백가지 공사공업항목을 수입했는데 본래 이미 식량에 높은 세율 정책을 취하여 중국농민은 배불리 먹지 못했으며 중국에는 본래 매년 굶어죽는 사람이 있었는데 중공은 왜 1958년 돌연 “대약진”을 했는가?
이는 마치 <제세기> 예언시에서 말하는 (중남)해의 눈의 개같이 빨개 탐욕스런 눈”과 같았다. 중공이 현재의 수백개의 군사 공업 항목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은 원자탄을 가져 세계를 재패하려고 몽상했다. 1957년 10월 15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중공과 “국방신기술 협정” 조약을 맺고 소련은 중공에게 원자탄모형을 주었다. 소련의 각부에서는 이런 지시를 받았다: “중공에게 일체 것을 그들이 원자탄을 만들 수 있도록 제공한다.” 그래서 한 무리의 유도미사일 전문가가 중국으로 갔다. (“모택동,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중공은 원자탄과 핵공업을 발전시킬 기회가 도달하였다.
그러나 원자탄과 핵공업의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많은 식량을 수출하는 길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공은 이미 건설한 군사공업을 멈추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량은 어디서 오는가? 그저 이미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오는 수밖에 없다. 바로 “중국인의 반이 죽지 않으면 삼분의 일이나 혹은 십분의 일인 5천만 명이 죽어야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 역시 원자탄을 얻으려고 했으며 그래서 고의적으로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이는 대약진 운동을 전해하여 조금도 인성이 없는 중공 공산당이 획책해 낸 것이다. 대기근 중 가장 처참한 정경은 바로 사람이 사람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당시 계획적으로 순서로 “사람을 먹었다” 허울 좋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목적은 그저 그들의 폭력공구와 전쟁무기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진정 사람을 먹는 야수와 마귀였다.
사실은 바로 이렇다. 원자탄과 기타 핵무기 등 대규모 살인 무기를 얻기 위해 중공은 고의적으로 4천여만 명을 아사시키는 대기근을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인민은 중공의 비인도적인 핍박 하에 이같이 지출한 생명의 댓가는 히로시마 원자탄에 300 여개의 상당하는 원자탄을 중국 본토에 터트린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중국공산당의 눈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1957년 11월 모택동은 모스크바의 공산진영 최고회의에서 말했다. “가정해보자. 만일 전쟁이 발발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 전 세계 27억 인구에서 3분의 1이 손실을 입을지도 모른다. 좀 더 많아봐야 반일 것이다….. 내 말은 극단적으로 반이 죽는다 해도 여전히 반이 남는데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전 세계가 사회주의화되면 몇 년이 지나면 또 27억인 되는데 더 많아질 것이다.” 모택동의 “사람을 죽이는데” 것에 대해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 강연은 다른 사람의 눈을 멍하게 하였다.
이 대회 이후 중공은 또 소련에게 “핵잠수함” 기술을 요구했다. 중국공산당은 사람이 죽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모택동은 소련에게 말했다. “중국은 기꺼이 독자적으로 미국의 핵무기 공격을 막을 수 있기를 원한다.” “최후의 승리를 위하고, 제국주의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첫 공격을 감당할 생각이 있으며 이 과정에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그래서 1959년 2월 4일 “신기술 원조협정”인 중소협정을 맺었다. 여기서는 소련은 중국이 선진무기, 군함 동력탄도 잠수함, 잠대지 탄도탄 등을 포함한 선진무기를 중국이 제조하도록 돕는다. 이 조건하에 중국의 대기근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불쌍한 중국인은 매년 천만명 이상 아사해야 했으며 해마다 늘어갔다.
풍자적인 의미는 중국에서 대기근이 발생한 이후 소련의 “수정주의분자들”은 실제로 중국 공산당에 비해 더욱 중국 인민의 사활에 관심이 있었다. 소련은 여러 차례 중국에게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원조가 필요하지 않은지 물었으나 중공은 늘 부인하며 대량으로 소련에게 식량을 수출하기를 견지했다.
기황이 더욱 전개되자 당시 소련대사가 말했다. “비행장 주변 나무들의 잎이 하나도 없는데(사람이 다 먹어버렸기 때문) 기근이 심한 정도는 조사할 필요도 없다.” 그는 소련 무역관리를 만나 명령했다. “중공이 수출하는 양식을 받지 말라.” 하지만 중공은 수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소련은 이를 받지 않고 식량을 돌려보내 재난을 구하라고 했으나 중공이 받지 않자 소련의 항구에 쌓인 채 썩어버렸다. 후르시초프는 할 수 없어 중공의 소련에 대한 환율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하여 중공의 채무는 100분의 77로 감소했다.
가련한 것은 중국인민은 오히려 소련 수정자본주의자들의 호의를 향수하지 못했고 중공은 주동적으로 본래 16년간 상환하는 부채를 5년이면 다 갚을 수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왕 채무는 원래 5분의 1만 있었으므로 그럼 차관을 갚는 시간을 원래의 3분의 1로 단축한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강도 논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고 그들은 기왕 이미 애써 중국인의 양식을 빼앗았으니 돌려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수출해야 했으며 기왕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이기로 계획했으니 그들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게 나았다고 생각했다. 1961년 2월 소련은 중국에게 백만 톤의 식량과 50만 톤의 쿠바 설탕을 주겠다고 했다. 모택동은 설탕만 받고 식량을 거절했다. 설탕을 남겨놓은 원인은 소련이 미그기 21 생산기술을 주기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1월 중공은 오히려 알바니아에게 5억 루불을 주었다.
확실한 것은 만일 소련의 후르시초프가 모택동과 중공이 미친 무리라는 것을 똑똑히 보지 않고 1960년 7월 소련이 중국에 있는 1천여 명의 전문가를 전부 철수하고 중국에서 아직 미완공의 150여 항목의 원조를 중단하기로 선포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대기근”은 절대 1961년에 천천히 멈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욱 계속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갈수록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정말 모택동이 말한 “중국인의 반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대기근”의 종식은 우선 소련의 “수정 자본주의자”에게 감사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대량적으로 아사하는 동시에 중공은 대량의 돈과 식품을 외국으로 보냈다. 2천2백만 명이 아사한 1960년 중공은 외국원조를 전문으로 종사하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숫자와 액수에 있어서 그해에 급증했다. 1963년 12월 4일 주은래는 제 3차 인민대회 1차 회의에서 <정부작업보고>를 써서 나타냈다.
“이 시기 우리는 한 푼의 외채도 없을 뿐 아니라, 과거의 외채를 거의 다 갚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시기에 상환한 외채 액수보다 더 많은 자금과 물자를 사회주의 국가와 민족주의 국가에 지원했다.” 중국인이 수천만이 아사할 때 중공은 오히려 “외채 액수보다 더 많은 자금과 물자를” 주었던 것이다.
왜 중공은 소련이 중국의 외채를 경감한 후 오히려 돈과 식량을 알바니아 등 국가에 주며 재난을 구호하는데 쓰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대기근 기간 식량이 감산하여 이미 수천만 명의 아사했으니 일단 대량의 식량으로 구하면 백성들은 물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가에는 기왕에 식량이 있는데 왜 일찍 재난을 구하지 않았는가? 중공의 착오와 자연재해라는 유언비어는 덮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중공은 국제적으로 “위대하고 광정한” 형상을 위해 국내에 기근이 있음을 부인했으며 소련의 일백만 톤 식량을 포함하여 외국의 일체 원조를 거절했는데 사실은 중공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며 중공이 보기에 : 수천만 백성이 아사한 것은 작은 일이며 만일 외국의 원조를 받는다면 백성의 마음에 자본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한 감격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며 그것은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가련한 중국백성은 오로지 감사할 뿐인데 사람을 먹고 뼈를 토해내지 않는 중공이 아직 그들을 전부 아사시키지 않은 것만 감사해야 했다.
이 예언을 해석하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나는 대기근 중의 그런 비참한 사실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굶어서 숨을 헐떡이던 부친이 자기의 아들을 잡아먹은 얼마 후 또 굶어 헐떡이며 이미 철이 든 딸을 손짓으로 불렀다. 가련한 딸은 놀라서 온 몸을 벌벌 떨며 문밖으로 피하며 큰소리로 울었다. 부친은 또 그녀를 불렀다. 아이는 울며 말했다. “아빠, 절 잡아먹지 마세요. 제가 풀을 긁어모아 불을 지필게요. 저를 잡아먹으면 아무도 아빠에게 일을 해 줄 사람이 없어요.” (“50년대 말 대기근의 놀라운 기록”)
나는 중공에 의해 굶어죽은 수천만 명의 원귀를 보는 것 같으며 온 들판에 들린 그 원귀는 허공에서 함께 울며 두 마디를 외치는 듯하다.
모택동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이다!
중국공산당은 사람이 아니라 야수(野獸)이다!
* 처참한 인민과 사악한 당
제 6기 81 수
영문:
Tears, cries and laments, howls, terror,
Heart inhuman, cruel, black and chilly:
Lake of Geneva the Isles, of Genoa the notables,
Blood to pour out, wheat famine to none mercy.
눈물, 울음, 통탄, 울부짖음, 공포
비인간적인 심장, 잔혹하고 시커멓고 냉혹한
제네바의 호수와 섬들, 제노아의 귀족들
도살로 피가 흘러나오고 밀은 기근이 들어도 연민이 조금도 없다.
이 시는 <제세기> 예언시 중 가장 처참한 한 수의 시이다. 그것이 제일 처음으로 “밀의 기근”을 예언했으며 아사하는 인민들이 도움을 구하지 못해 울부짖는 소리이며 시커먼 야수의 잔혹함 때문에 조성된 … 이번의 “밀 기근”은 윗글의 제 2기 75수의 “밀의 생산이 매우 높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가리키는 중국대약진의 기근이며 기근을 만든 검은 야수는 중국공산당임을 말한다.
“눈물, 울음, 통탄, 울부짖음, 공포”는 단지 처참하다는 두 글자로 형용할 수 없는 장면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단어를 사용했다. 그 수년간의 대기근 기간 가련한 중국 농민의 생활을 묘사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자기가 먹고 살아야 할 양식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양식은 반년치 밖에 안되고 중공의 탐욕스런 눈빛은 만족하지 못하고 중공 간부의 “생산량을 속여 탈세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집집마다 양식을 빼앗았으며 고문하고 수색했으니 백성들의 고통의 “울부짖음” 속에 마지막 남은 약간의 곡식조차도 빼앗았다. 가련한 사람들은 그저 배고픔 속에 그저 소리 없이 흐느껴 울 뿐이고 그들은 굶어 온 몸이 부어오르고 숨을 헐떡였으며 마침내 그들의 눈은 자기의 가족이 한명씩 아사하는 것을 보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족의 시체 옆에서 울부짖는 일 뿐이었다. 마침내 숨을 헐떡이며 흐릿한 중에 사망의 공포가 충만했고 살아남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잡아먹기도 했다.
그러나 기황을 만든 마귀 모택동과 중공은 “비인간적인 심장, 잔혹하고 시커멓고 냉혹한” 것이었다. 살인하여 무기와 무기제조의 공업을 위해 악의적으로 “대약진”의 음모를 꾸며 인민의 식량을 빼앗고 수천만 명의 산사람을 굶겨 죽였다. 이 역시 “비인간적인 심장”인 중공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대약진을 시작한 중공 “8대”이차 대회에서 모택동은 사망은 “좋은 일”이라고 대담하게 말했으며 “장자가 아내를 죽인 후 노래를 불렀다는 말이 정확했다.” “사람이 죽으면 경축회를 열어야 한다.” 58년 12월 6차 6중 대회에서 모택동은 “사람이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멸망에는 좋은 점이 있는데 비료로 쓸 수 있다.” 팽덕회가 농촌에서 사람이 죽는 정황을 반영했을 때 모택동은 얼렁뚱땅 “탁아소에서 몇 명의 어린애가 죽어도 양로원원에서 몇 명의 노인이 죽어도… 아무도 죽지 않으면 사람은 생존할 수 없다. 공자 이래로 사람이 죽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한마디도 “사람이 산다”는 표현이 없었다.
58년 식량생산의 과장 바람은 <인민일보>에 특등기사로 1묘당 수천근을 생산했다는 소식을 실었다. 누가 이것이 거짓이라고 하면 비판을 받았다. 하남 신양지구에서만 이 때문에 비판을 당한 사람이 12,000여 명이 된다. 58년의 식량은 실제로 11%가 감산되었지만 징수하는 양은 오히려 14.7%나 증가 했으며 생산량의 40%에 해당했다. 모택동은 59년 7월 5일 양식을 징발하는 간부에게 지시하며 말했다. “농민들에게 겨와 나물로 반년치 양식을 회복하라고 말해라.” 이는 각 당 조직에게 강제로 농민의 입에서 식량을 강제로 뺏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양식을 반을 빼앗아 농민들은 겨나 채소로 대체하라는 것이었다.
여산회의에서 유일하게 지나친 식량징수에 대해 반대했던 팽덕회는 타도되었고 한바탕 “우경기회주의자 반대” 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대다수의 타격대상은 농민에게서 양식을 빼앗는 것을 저지한 마음이 약한 말단간부였으며 그들을 교체한 것은 마음이 간악한 사람들이었다. 8월 19일 모는 친히 성위원회 서기에게 명령을 내려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진시황을 합”하여 ” 명령을 강제했다.” 그래서 전국 시골에서는 곳곳에서 “양식을 강제로 받아내는 모임”을 열었으며 도처에서 잡아가고 때리고 매달았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잔혹”하다는 두 글자로 표현했다.
“양식을 강제로 받아내기”위해 이유로 모택동은 재삼 농민과 말단간부에게 “만산사분(瞒产私分)-생산량을 속여 몰래 나눠 갖는”일 을 질책했다.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생산 소대는 보편적으로 만산사분을 일치하는데 지하실에 깊이 감추고 보초를 세운다.” 농민은 “낮에는 무청을 먹고 밤에는 쌀을 먹는다.”
“양식을 강제로 받아내기”위해 감숙성 통위현에서는 “천인(天人) 정사단(整社團)”, “만인투쟁대회” 등을 하였고 현지(县志)를 편찬한 장상질의 회고에 의하면 “그 “천인정사단”, “만인투쟁대회” 등은 얼마나 함부로 하고 미친 짓이었는가! 그들은 백성의 집에 가서 궤짝을 뒤졌으며 땅과 벽을 파서 식량을 수색했고 그들은 완전히 한 무리의 야수로 변했다. 식량을 내놓지 않는 부녀를 의복을 벗겨 노끈으로 음모를 묶어 거리에 보내어 군중에게 보였다. 괴롭혀 죽던, 굶어죽던 그들에게는 이 양자 간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산채 묶여 죽었고 목 매달려 죽고, 맞아 죽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식량이 있어도 감히 먹지 못했으며 채소가 있어도 감히 캐내지 못했고 길이 있어도 도망가지 못했다. 그저 고분고분 죽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고금에 없던 일이다! 그것은 바로 인성이 멸절한 악행이며 당시의 공작조는 이런 일을 128 가지를 기록했다!”
그래서 천만도 넘는 중공에게 양식을 빼앗겨 농민들이 산 채 아사하고 59년 9월말부터 60년 초까지 중국농촌은 기근이 온 들에 깔렸다. 안휘에는 중공 공사 당서기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이끌려 산더미 같이 쌓인 시체를 보고 이 산 같은 시체에 대해 모주석의 어록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하늘 아래 둘 데가 없다.. … 사람이 있으니 죽는 것이고 저 사람을 보호해봐야 어느 날那个人保就哪天不死! 죽지 않는가!”
그러나 “심보가 고약하고 냉혹한” 중공은 무수한 사람이 아사하는 정경에 대해 명백하게 “크고 작은 곳간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사해도 창고를 열지 않았고” 더욱 고약한 것은 소련이 중국의 외채를 줄여 중국의 부담을 경감해주었을 때 중공은 국내 도처에 아사하는 정황 중에 부채를 갚을 것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거액의 원조를 해준 동시에 외국의 원조를 거절했다는 점이다.
“제네바의 호수와 섬들, 제노아의 귀족들 도살로 피가 흐르고 밀은 기근이 들어도 연민이 조금도 없다.”는 중공이 전국에서 수천만 명을 아사하는 정황 하에서 여전히 인민에 대해 잔혹한 통치와 진압을 하는 것을 예언했다. 여기의 “제네바의 호수와 섬들”은 북경의 “호수”인 중남해에서 일하는 중공의 각 지도기관이며 제노아는 이태리 북부의 도시인데 “제노아의 귀족”은 북경의 중공지도자와 고관들을 가리키며 대기근에 백성들에 대해 “연민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인민들이 굶어 죽는 중에도 여전히 잔혹한 계급투쟁을 하며 백성을 도살한 것을 말했다.
이 시기 도살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양식을 빼앗은 것”으로서 “반(反) 만산사분”의 운동중에 혹형으로 무수히 무고한 농민을 때려죽인 것이다. 또 하나는 중공 자신이 의도적으로 대기근을 조성한 것이며 아무런 근거 없이 “법을 빠져 나온 지주, 부농들이 파괴했다”, “반혁명을 복원했다”고 하며 소위 “민주혁명보과” 운동을 전개하여 전국 농촌에서 큰 무리로 “그물을 빠져나간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분자”를 보충해서 찾아 비판했으며 중공은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 앞에서 여전히 무고한 농민을 도살하고 있었으며 공포를 만들어 책임을 회피했다.
이것이 예언시에서 말하는 “도살로 피가 흘러나오고”, “연민이 조금도 없다”에서 가리키는 것이다. 또 다른 방면의 도살은 중공이 1959년 티베트 인을 도살한 것인데 당시 중공은 티벳에서 역시 기근을 만들어 “향포대 내의 식량과 참파(糌粑-밀가루와 향으로 만든 경단의 일종으로 티베트 주식-역주) 역시 거두어갔다.” 티베트 인들은 참다못해 봉기를 했으며 중공은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했는데 거의 10만 명의 티베트 인을 도살했다. 인구가 많지 않은 티베트에서 대기근 기간에 적어도 7-80만 명이 아사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역사를 회고하며 이 시에서 예언한 중공의 본질을 묘사한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비인간적이고 잔혹하며 심보가 고약하고 냉혹”할 뿐만 아니라 “학살로 유혈이 낭자하고” “기근이 들어도 조금의 연민도 없다.”
대약진 시기의 대기근은 중공이 사악이 저지른 반인류적인 하늘까지 닿는 죄악이며 중공이 음모한 중국인민에게 멸절적인 대 살육의 음모이다.
발표시간 : 2008년 3월 31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8/3/31/520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