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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의 <제세기>를 철저히 파헤치다: 문화대혁명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세기>를 철저히 파헤치다: 문화대혁명

작자:역천균

【정견망 2008년 4월 23일】

제 5장: 공산주의의 죄악

제 6절: 문화대혁명

*모택동, 유소기(劉少奇) 타도위해 문화혁명 발동

제 2기 41수

영문:
The great star will burn for seven days,
The cloud will cause two suns to appear:
The big mastiff will howl all night
When the great pontiff will change country.

거대한 별이 7일간 타며 식지 않는다
구름은 대낮에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나게 하리라
흉악한 큰 개가 밤새 짖는다
대 제사장이 국가를 바꿀 때

이 시는 모택동이 1966년, 당시 국가주석 유소기를 타도하기 위해 문화혁명을 발동하여 전 중국 인민에게 심각한 재난을 가져온 것을 예언했다.

본 시에서
“거대한 별이 7일간 타리라 구름은 대낮에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나게 하리라”는 1959년 제2회 전국인민대표회의 제 1차 회의에서 유소기가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어 중국 정계에 두 명의 주석이 출현한 것을 말한다. 하나는 중공 주석 모택동이고 또 하나는 국가주석 유소기였다. 여기서 “거대한 별”이 가리키는 것은 유소기이며 “7일간 타며 식지 않는다”의 7일은 7년을 상징한다. 한편으로는 유소기가 1959년 이후 7년째인 1965년 국가주석으로 재차 당선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1962년부터 1969년 박해로 사망할 때까지 7년 동안 양지가 깨어있는 사람으로 그의 인생 중에서 가장 휘황하게 빛나던 날들이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모택동과 중공의 폭정으로 중국에 수천 만 명이 아사하는 대기근을 조성한 중화대지의 이 참상은 철석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주석 유소기 역시 이 참화에 양심이 깨어났고 중국이 계속 이렇게 지날 수 없다고 여겨 그는 용기를 내어 모택동의 백성들에 대한 미친 듯한 폭정과 가렴주구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1962년 1월의 “7천인 대회”는 중공 당 사상 최대 규모의 대회였는데 1월 27일 이날의 전체 회의에서 내내 신중하고 소심했던 유소기는 모택동이 보는 데서 7천명의 중공간부들에게 중공이 준비한 서면보고를 버리고 진실한 말을 했다.

“형세가 좋지 못합니다. 사람이 먹을 양식과 부식이 부족하고 고기와 기름 등도 모자랍니다. 입을 것도 부족하고 쓸 것도 부족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백성들이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다 부족합니다.” “우리는 원래 농업과 공업에서 이 몇 년간 대약진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많이 퇴보했습니다.”

유소기는 또 말했다. “곤란을 만든 원인은 3할은 천재이고 7할은 인재입니다.” 유소기의 말은 회의 참석자들에게 강렬한 공감을 일으켰다. 유소기가 먼저 두각을 드러내자 중공간부들은 앞뒤를 다투어 발언을 했는데 자기의 진실한 생각을 드러내어 대약진 정책을 계속해나가는 것을 반대했다. 격렬한 음성이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모택동은 부득이하게 자아비판을 했으며 어쩔 수 없이 1962년부터는 곡물 징발을 대폭 낮추도록 용인했다. 이렇게 중국의 대기근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때부터 유소기에 대해 매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장영의 <모택동,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보라)

이후 몇 년간 유소기 등은 일부 정책을 수정하여 인민생활에 유관한 산업에 투자를 대대적으로 증가했으며 농촌의 많은 마을에 “포산도호(包產到戶 가정단위의 도급생산-역주), 책임전” 등을 시행했다. 1년이 안 되어 인민들의 생활은 뚜렷이 개선되었지만 역시 매우 일부 사람은 굶어죽었다. 유소기 등은 또한 1959년 여산(廬山)회의 후에 우경기회주의자로 몰린 1천만 명의 명예회복을 하는 동시에 57년부터 58년간 타도된 우파분자의 누명을 벗기기로 시도했고 문화예술 역시 일부 소생했다.

1965년 1월 3일, 유소기는 다시 당당하게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전국적으로 경축활동을 조직했으며 거리에는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오색기를 든 행진대오가 있었다. 사자춤을 추는 사람, 폭죽을 터트리는 사람, 모택동과 유소기의 초상을 들고 가는 사람 등이 있었다. 신문에는 연일 보도했다. “모주석, 유주석은 모두 우리가 가장 받드는 영도인이다.” 이는 본시에서 말한 한동안 “구름은 대낮에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나게 하리라.”와 같다.

중국에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났는데 이는 모택동이 물론 어떻게 해도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반드시 유소기를 타도해야 했고 동시에 “7천인 대회”의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그러나 유소기 당내의 위신은 날로 올라갔고 당내의 역량으로 유소기를 타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의 소위 “군중운동”을 일으켰다.

본시의 후반 2구 “흉악한 큰 개가 밤새 짖는다. 대 제사장이 국가를 바꿀 때”는 바로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 당시의 정경이다. 여기의 대 제사장은 모택동이 중공사교의 교주임을 가리키며 “국가를 바꿀 때”는 모택동이 당시 중국 권력의 소위 “자본주의 길을 하는 당권파”를 타도하려는 것을 말한다. 여기의 “흉악한 큰 개가 밤새 짖는다”는 것은 1966년 8월 7일 모택동이 <사령부를 비판하다—나의 한 장 대자보>를 써서 중공 8회 11차 전체회의에서 뿌렸는데 이 한 장의 “대자보”는 중공이 또 다른 “자산 계급 사령부”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비판의 창끝을 직접 국가 주석 유소기 등에게 겨눈 것이며 이 날은 마침 “무술(戊戍)”일이므로 개가 밤새 짖는다고 한 것이다.

어떤 예언에서는 <9평공산당>의 발표를 “수탉이 운다”라고 한 것이 있는데 “닭 울음”으로 문장으로 “평론의 소리를 낸 것”을 나타냈다. 그렇다면 모택동의 <대자보> 역시 특히 문장을 써서 “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제세기>에서는 모택동이 “개”의 날에 큰 개의 미친 소리로 표시한 것이다.

“큰 개가 밤새 짖은” 다음날 1966년 8월 8일, 중공중앙 8회 제 11차 중전회의에서 <중공중앙의 무산계급의 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켜 문화대혁명이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늘이 어떤 마음을 품고 모택동을 타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택동의 그날의 문장이 중국 인민들에게 재난을 너무나 크게 가져와서 10년간의 문화혁명의 찬 비바람 중에 전 중국에서 적어도 십분의 일의 가정이 충격을 받았고 수백만 명이 비명에 죽었다.

유소기는 문화대혁명의 제 1호 혁명 대상이었다— 전국에서 자본주의 길을 가는 가장 큰 당권파로서 중공중앙부주석의 직무를 해제 당하고 나중에 잔혹하게 타도되었다. 1968년 10월 중공 8회 12 중전회의에서는 성명을 통과시켰다. “당내 최대의 자본주의 길을 가는 당권파 유소기는 당 내에 숨어있는 반도, 첩자, 귀족이며 죄악이 누적된 제국주의자, 현대수정주의와 국민당 반동파의 주구이다.” 통과 결의안에는 이렇다. “유소기를 영원히 제명하고 출당시키고 당 내외의 일체 직무를 취소시키며 아울러 유소기와 마찬가지의 기타 반당 반국 무리의 죄행을 청산한다.”

중공은 살인을 삼베 베듯이 하는데 그것의 당내 투쟁 역시 특히 잔혹했다. 그것이 당을 조직한 이래 중공이 자기가 죽인 당원은 당의 적이 중공 당원을 죽인 것보다 더 많았다. 중공 중앙부주석과 국가주석 유소기든지, 중공중앙 총서기 호요방이거나 조자양이거나 중공 사교의 “당성”을 위배해 인민에 대해 약간의 “양심”이라도 있기만 하면 곧 중공의 박해를 면할 수 없었다.

1968년 유소기는 장기적으로 침대에 묶여 있었으며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그의 목, 등, 둔부, 발뒤꿈치 등 모두 고름이 흘러 욕창이 생겼으며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그가 고통스러울 때 일단 옷이나 다른 사람의 손, 팔을 잡으면 놓아주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아예 그의 손에 단단한 플라스틱 병을 쥐어 주었다. 그가 임종할 때 두 개의 플라스틱 병이 모두 호리병처럼 움푹 패어있었다.

1969년 10월이 되자 유소기는 이미 온몸에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났으며 장작처럼 여위었고 숨을 몰아쉬었다. 중앙에서 특파한 요원은 목욕을 못하게 했으며 몸을 뒤집어 옷 갈아입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발가벗겨서 침대보로 싸서 비행기로 북경에서 개봉으로 옮겼으며 매우 단단한 보루의 지하실에 감금했다. 그가 고열이 날 때 약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사 간호사들도 모두 보내버려서 임종 시에 유소기는 이미 사람의 모양이 아니었고 헝클어진 백발이 2척이나 자랐다. 이틀 후의 한 밤중에 열성전염병이라고 하여 화장했으며 사용했던 이불, 베게 등도 모두 함께 태워버렸다. 유소기의 사망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성명 :유위황
직업: 무직
사인: 병사 (자세한 내용은 <9평공산당>을 보라)

그러나 유소기는 죽을 때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 거성은 1962년 “7천인 대회”에서부터 모택동을 반대하여 1969년 중공 사당의 알지 못할 박해를 받아 죽을 때까지 7년간 내내 “타며 식지 않았다.”

*홍위병이 일어나 “자본가”를 비판함

제8 기 19 수

영문:
To support the great troubled Cappe;
the reds will march in order to clarify it;
a family will be almost overcome by death,
the red, red ones will knock down the red one.

곤경에 빠진 교황을 지지하기 위해
붉은 것들이 그것을 보위하기 위해 진군하리라.
한 가정은 죽음에 거의 무너지고
붉고 붉은 것들은 또 다른 붉은 것을 타도한다

이 시는 문화대혁명 중에 홍위병이 일어남을 예언했는데 이런 청년 학생들은 홍위병 조직을 만들어 중공투쟁의 도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중공에 이용되어 전통문화를 충격하는 “선봉”과 정치투쟁의 졸개로 충당되었다.

본시에서 “곤경에 빠진 교황을 지지하기 위해, 붉은 것들이 그것을 보위하기 위해 진군하리라”는 홍위병 조직이 일으킨 소위 “원인”을 예언했는데 바로 중공 사교의 교황 모택동이 당내에서 곤경에 빠졌고 당내에 “수정주의 분자”가 나타난 것으로서 소위 “수정주의”란 바로 이 작업 중에 모택동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이며 모택동의 의견에 뜻밖에 감히 “수정”을 한 사람들로서 이것은 바로 사교 교주 모택동의 소위 “대곤경”이었다. “수정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당내 당권의 “수정주의 분자”의 반동을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중공의 부추김 하에 홍위병 이 반동조직은 생겨났던 것이다.

1966년 5월16일 중공은 모택동의 수정을 거쳐 문화혁명에 관한 “516 통지”를 발표했는데 모택동은 그 통지에서 말했다: 당내, 국내의 정치 형세는 학술계, 교육계, 언론계, 예술계, 출판계 등 문화영역의 영도권 주도권은 무산계급의 손에 있지 않다. 중앙부터 각 성, 도시 자치구까지 “당 내, 정부 내, 군대 내에 각종 문화계”에 큰 무리의 자산계급 대표인물이 섞여있다. “반 혁명분자 수정주의분자”는 “일단 시기가 성숙되면 그들은 정권을 탈취할 것이며 무산계급의 독재정치가 자산계급의 독재로 변한다.” “예를 들어 후르시초프 같은 인물은 그들은 우리의 옆에 잠을 자고 있다.” “우리를 교대하기 위해 배양되고 있다.”

그래서 문화혁명의 목적은 그들에게 비판을 가하여 “이런 사람을 깨끗이 씻어버려 그들의 영도권을 전출시켜 빼앗아야 한다.” 그 후 중공은 새로운 “중앙혁명 영도소조”를 만들었다. 5월 18일, 임표는 담화를 발표하여 “모주석은 천재이며, 모주석의 말은 구절마다 진리이며, 한마디는 우리의 일만 마디를 초과한다”고 하며 전국 각지에서 개인숭배를 시작했다.

모택동과 중공은 이런 정보를 내보내는 것은 바로 “문화계의 낮은 층” 즉, 소위 “문화계의 무산계급”이 “반역”을 일으키기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고대학생은 바로 “문화계의 낮은 층”의 중요부분이다. 우리는 본장의 제 4절 6기 8수의 반우파운동에 관한 예언에서 제기했다. “구 지식분자”에 대한 중고의 책략은 잔혹하게 타격하고 철저히 규탄하며 그들의 독립사상의 중추를 단절하며 그들은 핍박하여 노예화하는 바로 “노예화정책”이라고 했다. 또 후기가 되어 중공은 중공 정권 건립 후 교육을 받은 신지식분자에 대해 완전히 채취한 방식은 바로 하나의 “우민화 정책”이었다. 그들을 이용하여 중공이 전통문화와 도덕을 소멸하는 졸개로 충당하여 중공의 “문화의 총알받이”가 되게 했다. 1966년 그런 중공의 통치와 우민화 교육 하에 자란 아이들은 중공의 “문화의 총알받이”와 정치투쟁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5월 말, 전국 처음으로 홍위병 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들은 자기를 “모주석을 보위하는 붉은 위병, 모주석은 그들의 붉은 사령관”이라고 칭했다. 이 후 전국 중고등, 대학생들은 분분히 각종 홍위병 조직을 성립하여 반역을 일으켰다. 8월 1일 모택동은 친히 편지를 써서 홍위병의 반역에 대해 지지를 표시했다. 8월 7일 모택동은 8회 제 11차 중전회의 상에서 <사령부 타도>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였다. 8월 18일 모택동은 제일차로 천안문 성루에서 전국 각지의 홍위병을 접견했는데 중공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 홍위병은 수도 중, 고, 대학생이 무산계급문화 대혁명운동 중에 창건한 혁명군중 조직이다. 그들은 일평생 모주석을 보위하고 중국공산당을 보위하며 조국의 홍색첨병을 보위한다. 그래서 본 시에서는 “붉은 것들이 그것을 보위하기 위해 진군하리라”고 하여 홍위병의 일어남을 예언했다.

모택동은 중공 사교의 교주이며 중공 지도하의 홍위병 활동에는 중공의 “사악한 근성”이 침투했다. 먼저 북경의 홍위병은 학교에서 자기의 선생과 학교의 교장 등을 비판했다. 북경 여자사대 부속중학교의 교장 변중운은 산채로 맞아죽었는데 문화대혁명에서 제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투쟁당하여 죽은 교육자이다. 그러나 사람을 때려죽인 흉수 송빈빈(宋彬彬) 등은 오히려 모택동의 접견 지지를 받았으며 또한 “빈빈(彬-문채날 빈)이란 이름은 좋지 않다. 요무(要武)로 하라”는 말을 들었다.

중공이 보기에는 자기의 스승에게 흉악하게 손을 써서 때려죽인 학생이라만 비로소 중공이 필요로 하는 사교를 이어 받을 사람이었다. 이어서 중공의 지지 하에 흉악한 홍위병들은 학교에서 사회로 향했으며 “네 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궐기가 고조되었다. 일체의 전통문화유산을 파괴했으며 아울러 중공이 계획한 “지주, 부자, 반동, 나쁜 자, 우파, 지식분자”등 소위의 “잡귀신” 들에게 야만적인 가택수색과 잔혹한 박해를 진행했다. 임의로 비판하고 구타하며 심지어 고통을 주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많은 사람이 집안이 기울고 재산을 탕진했으며 다 망했다. 8월 24일부터 9월 10일까지 북경에서만 3만3천6백95호의 집에 수색을 당했고 거의 십만 명이 집을 떠나야했으며 1천7백72명이 홍위병에게 맞아 산채로 죽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생과 교장이었으며 북경에는 “붉은 공포”가 조성되었다.

예언속의 “붉은 것들이 진군”은 동시에 홍위병의 “대관련(大串聯)-차례로 연락함” 활동을 예언했다. 각지의 홍위병들은 북경에 와서 “경을 가져갔다(取經 수법을 배웠다는 뜻-역주).” 북경의 홍위병은 즉 도처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불을 질렀으며 문화혁명의 “붉은 공포”가 전국으로 밀려갔다.

본 시에서 “한 가정은 거의 죽음에 무너지고 붉고 붉은 것들은 또 다른 붉은 것을 타도한다”는 것은 모택동과 중공이 주도한 홍위병의 “자본주의파”에 대한 대 투쟁을 말하며 더욱이 국가주석 유소기에 대한 잔혹한 비판을 가하고 최후에 중공이 유소기를 박해해 죽인 것을 말한다.

1966년 10월, 홍위병 운동의 주요 내용은 “자산계급반동노선”을 비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당내의 자본주의 노선인 당권파를 투쟁하는 것이었다. 간략하게 “주자파(走资派)”라 한다. 방식은 대자보로 공격하는 것이며 공개비판대회를 열어 때리고, 모욕을 주며 길거리에 군중들에게 보이는 등등이었다. 모택동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많은 중공간부들이 비판을 받았는데 모택동이 가장 비판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유소기였다.

1966년 12월 25월, 모택동은 다음 날인 자신의 73세 생일을 위해 최후의 예물을 안배했다. “중앙문혁”의 지시 하에 청화대학의 괴대부(蒯大富)가 반역파 학생 5천명을 이끌고 북경에서 행진을 하고 전단지를 뿌리며, 구호를 외치고, 트럭에 장치한 고음 나팔로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타도 유소기!” 이것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12.25” 대 운동이었다. 모택동은 홍위병을 이용하여 “타도 유소기!”의 구호가 전국에 울려 퍼지게 했다.

이때 이후 한번 씩 군중비판대회는 유소기의 일가에 강림했다. 1967년 4월 1일 <인민일보>에서는 문장을 발표했는데 별 이유 없이 유소기를 “당내 최대의 자본주의 당권파”라고 선포했으며 그날 30만 명의 비판대회를 열어 유소기의 아내 왕광미를 비판했다. 8월에 중남해에서는 유소기의 비판대회를 열었다. “유소기는 맞아서 땅에 넘어졌으며 한 무리의 사람이 그를 밟고 차고 했다.” 비판대회는 사진을 찍어 모택동에게 감상하도록 보냈다. 그는 자기의 적이 사람에게 비판당해 맞는 장면을 보고 가장 즐거웠다. 1969년, 유소기는 중공의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문화혁명 중 어찌 한 가정만 무너졌겠는가. 전국의 수천만의 가정이 충격을 받았고 수백만 명이 해를 입어 사망했다.


* 전통문화를 훼멸시킨 “네 가지 낡은 것 파괴”

제 8기 11 수
불문:
Peuple infiny paroistra à Vicence
Sans force feu brusler la basilique
Prés de Lunage deffait grand de Valence,
Lors que Venise par mort prendra pique.
영문:
A multitude of people will appear at Vicenza
without force, fire to burn the Basilica.
Near Luna age, the great one of Valenza defeated:
at a time when Venice takes up the quarrel through custom.

많은 사람들이 비센자(Vicenza)에 몰려든다.
강제적이 아니라, 바실리카를 태우려고 불을 던진다
달의 시대에 가까워질 때 발렌자(Valenza)의 위대한 인물이 타도된다.
베니스가 전통문화에 논쟁을 전개할 때에

본시의 제 3구 원문의 Lunage는 앞뒤 문장에 근거하면 지명이 아니라 시간이다. 우리는 예언의 뜻에 근거하여 “Lune age-달의 시대”로 고쳤다.

이 시는 문화혁명 시기에 중공이 발동한 중화전통문화를 소멸하는 “파사구(破四舊)운동-네가지 낡은 것을 파괴하는 운동”을 예언했다.

우리는 먼저 본 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비센자에 몰려든다. 강제적이 아니라, 바실리카를 태우려고 불을 던진다”를 보자.

비센자(Vicenza)는 이태리 북부의 고성인데 유명한 역사문화 유적지이며 비센자의 중심은 1994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그것은 이태리의 문예부흥시기의 유명한 건축가 팔라디오(Palladio)와 그 제자들의 작품이며 팔라디오의 작품은 문예부흥시기의 화려한 전통을 타파하고 일종의 고대 로마 고전주의 스타일의 기회를 형성했으며 그는 세계건축사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 비센자의 바실리카 팔라디나 (Basilica Palladiana)는 팔라디오가 초기에 만든 명작이다. 바실리카는 고대 로마의 일종의 공공건축이며 장방형의 복도 기둥이 있는 대청이다.

비센자의 바실리카 팔라디나는 세계문화유산이며 이태리 건축의 진귀한 보물인데 “많은 사람들이 비센자에 몰려든다”, “강제적이 아니라”는 외력의 압박이 없는 상태에서 “바실리카를 태우려고 불을 던진다”는 것은 자기 민족의 “역사문화유적지”와 “문화유산”을 소멸하는 것을 말하며 이런 미친 행위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역사상 기타 어떤 나라에서도 있어본 적이 없는 일이며 중공사교의 통치하에 중국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했다. 이는 바로 문화혁명의 “파사구운동(破四舊運動)-네가지 낡은 것을 파괴하는 운동”이다. 이 예언의 황당한 사건은 중국에서 발생했다. 시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비센자에 몰려든다”는 민족문화유산을 스스로 소멸하는 일은 “대규모적 군중 운동” 임을 말해준다.

본 예언시의 두 구절 “달의 시대에 가까워질 때 발렌자의 위대한 인물이 타도된다. 베니스가 전통문화에 논쟁을 전개할 때에” 는 중국의 “파사구운동”이 발생한 시간과 배경을 예언했다. <제세기>에서의 “달의 시대”는 우주대법의 정법시기이며 역시 중공이 파룬궁을 교란 박해하는 시기이다. 그렇다면 본 시에서 말하는 “달의 시대에 가까워질 때”는 아직 파룬궁이 출현하지 않은 중공의 통치 시기이다.

“발렌자”는 이태리 서북부의 작은 도시인데 여기서는 중국 서북의 연안을 대신 가리켰으며 그렇다면 “발렌자의 위대한 인물이 타도된다”는 것은 바로 연안서북파(延安西北坡) 시기의 중공 5대 서기중 하나인 유소기가 타도된다는 말이다; “베니스가 전통문화에 논쟁을 전개할 때에”는 북경의 중공당국이 전통문화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을 것임을 예언했다. 우선은 65년 말 북경시 부시장 오함이 60년에 발표한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에서 논쟁이 있었으며 북경시 장팽진은 “문화혁명 5인 소조”를 만들어 논쟁을 학술범위 내로 제한하려고 했다. 모택동은 오히려 문화예술계가 자산계급에 의해 점령당한다고 여겨 “문화대혁명”을 발동했는데 이것으로 유소기를 타도하고자 함이었다.

공산당은 왜 전통문화를 파괴하려고 했는가? <9평공산당> 제 6장에는 상세한 설명이 있다. 공산당의 “철학”과 중국의 진정한 전통문화는 절연히 상반되며 전통문화는 하늘과 신을 존경함을 강구하고 “인의예지신”을 말하며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다.” 공산당은 이런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당의 이익”,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임금, 아버지, 사부는 모두 부자지간 같다는 옛말-역주)” 이면에는 중공의 폭군만 있을 뿐이며 기타의 무엇도 있을 수 없고 모두 “문화대혁명”중에 타도되어야 했다. 그래서 중고 사교본질상 반 중화전통이며 반 중화민족이며 반인류적이다.

모택동은 66년 8월 7일, “개의 날”에 대자보가 붙은 다음날 중공중앙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결정에 관해>라는 것을 공포하여 “자산계급은 비록 이미 뒤집혔지만 그들은 계급의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이용하여 군중을 부식시키고 인심을 정복하려 하며 그들이 회복하려는 목적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라고 제기했다.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을 친견했으며 다음날 홍위병은 “일체의 낡은 사상, 문화, 풍속, 관습을 박살내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로 진출하여 일체의 “네 가지 낡은 것”을 박살내는 것을 목표로 하여 북경성 내외에 널리 부셨다.

공산당은 마치 중화전통문화와 깊은 큰 원한이 있는 듯 했다. 이화원(頤和園) 만수산 꼭대기의 천 개의 유리부조 불상은 한 때 팔국연합군의 약탈을 모면했는데 오히려 중공의 “파사구”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고 홍위병에 의해 전부 박살났다; 홍위병은 청화원의 패방(牌坊)을 박살내었고 고궁을 “피눈물 궁”으로 바꾸었다. 홍위병은 명나라 시대의 정릉(定陵)을 부수었고 만력황제와 황후의 세 구의 시신을 능침에서부터 메고 나가 뼈를 부셔서 가루로 만들었다. 북경시가 1958년 제일차로 문물을 전면적으로 조사했을 때 보존해 내려온 6843 곳의 문물고적 중 4922곳이 훼손되고 각종 문물 53만 8천 건이 훼손되었다.

중공의 뜻대로 홍위병은 오래된 것을 수색하여 지주, 부자를 비판하고 반우 등의 명의로 북경에서 대규모의 가택수색을 진행하였는데 수색당한 집이 11만 4천호였으며 문화물품은 약탈하여 다 때려 부수었고 일천여 명을 때려죽였고 10만 명이 집을 쫓겨났다.

청화대학 패방의 “청화원” 제자(题字)가 박살나고 있다
고궁이 홍위병들에 의해 “피눈물 궁”으로 바뀌다

중공이 홍위병을 이용하여 전통문화를 파괴한 폭행은 대해 전국 각 큰 신문은 다 같이 각 면의 톱기사로 보도하기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파도는 수도의 길거리를 석권했다.” 인민일보는 더욱 <매우 좋다!>라는 사설을 실어 마구 선동했다. 그래서 전례가 없는 “파사구” 운동은 신속히 전국의 도시로 번져갔고 중화문화의 진귀한 보물은 중공 사교에 의해 마구 소탕되고 파괴되었다.

신강 투루판 부근에 천불동(千佛洞) 동굴 내 벽화는 진귀한 예술품인데 모두 파괴되었다. 염제릉은 주전(主殿)과 그 부속건축이 엄중히 파괴되었고 능묘를 제외하고 전부 평지로 변해버렸다. 공자묘도 파헤쳐졌고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의 대 비석도 훼손되었다. 티베트 대소사 주봉 석가모니 8세 등신상도 면목이 부서졌다. 전국 최대의 도교 성지, 노자가 도덕경을 강의한 강의대와 주위의 거의 백개의 도관이 부셔졌다….

공자묘에 있던 “만세사표(萬世師表)”란 현판이 불타다

대소사(大昭寺)를 부수는데 참가한 일부 홍위병이 단체 촬영하다

“파사구” 운동 중에 전국에서는 합해 약 일천만 명의 집이 수색되었고 흩어져 남아있던 각지 민간의 진귀한 그림, 책, 기물, 복식, 고서적이 얼마나 불에 타 없어졌는지 모른다. 책을 불태우고 그림을 태우는 짓은 일본군보다 더 했으며 민간문학은 싹쓸이 되고 문고사료는 다 사라졌다.[정서(丁抒)의 <얼마나 많은 문물이 불에 탔는가>를 보라]

사실이 증명하듯 중공 이것은 서양에서 온 사교조직으로 근본적으로 중화민족의 큰 적이며 중화문화를 파괴한 원흉이다.


* 모택동의 개인숭배

제 9기 71 수
영문:
At the holy places animals seen with hair,
With him who will not dare the day:
At Carcassonne propitious for disgrace,
He will be set for a more ample stay.

털이 있는 짐승이 성스러운 신단에서 보인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햇빛을 두려워한다.
카르카손에서 불명예스러운 것이 길조가 된다.
그는 충분한 시간동안 머무를 것이다

이 시는 문화혁명시기에 모택동이 중국에서 개인숭배를 크게 하고 또한 중공 사교의 세뇌교육을 통해 모의 숭배는 몇 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예언했다.

본시의 두 구절
“털이 있는 짐승이 성스러운 신단에서 보인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대낮을 두려워한다” 는 모택동이 문화혁명시기에 개인숭배를 크게 일으키고 중공 사교가 선전한 신격화를 예언했다. 여기서 “털이 있는 짐승”은 바로 모택동이 짐승임을 가리키며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바로 전쟁 시기에 부상을 입은 “햇빛을 두려워하는” 임표를 말한다. 임표(林彪)는 햇빛뿐 만 아니라 물, 바람도 두려워한다. 문화혁명 때의 구호는 “모주석 만수무강, 임부주석 영원건강” 이었는데 실제로는 모두 허튼소리였다.

모택동의 개인숭배는 유래가 오래되었는데 그는 이를 위해 중국역사와 중공역사를 고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민의 사활을 볼보지 않는 짐승을 “인민의 수령”으로 분장하였고 또 그의 개인숭배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가 바로 문화혁명이다.

1966년 중공은 <516 통지>를 발표하여 문화대혁명이 정식 개시됨을 표시했고, 5월 18일 임표는 담화를 발표하여 “모택동 주석은 천재이며 모주석의 말은 구절마다 진리이며 한마디가 우리의 만마디를 넘는다”고 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에 대한 개인숭배를 시작했다. 전국에서 대량으로 “홍보서(紅寶書)”라고 불린 <모주석 어록>을 인쇄했다. 8월 12일 북경 각 고교에서는 성대한 “보서 영접회”를 열었으며 매 사람마다 무료로 한권씩 받았고 전국 각지에서는 <모택동 선집>을 구매하는 열풍이 일었다.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 성루에서 홍위병 대표를 친견했으며 사람들이 그에 대한 숭배는 새로운 고조가 형성되었다. 천안문 광장에는 수십만이 넘는 홍위병이 손의 “홍보서”를 휘두르며 “만세”의 구호를 외쳤고 천안문 광장을 메웠다. 그 후 모택동은 또 계속 1100만 명의 홍위병을 회견했다.

천안문 광장의 공포의 “붉은 바다”

문화혁명중 모택동 개인숭배는 미친 듯한 지경에 도달했는데 과학논문을 포함하여 모든 문장은 모두 <모택동 어록>에 의거한 서문을 포함하였으며 모택동의 책에서 온 말은 책에서 모두 두꺼운 글씨로 돌출하여 표시했다. 한 단락 시기에는 모두 대회에서 발언하기 전 먼저 <모택동 어록>을 외워야 했는데 “모주석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로 말문을 열어야 했다. 심지어 큰 길거리에서 사람끼리 말을 할 때도 우선 <모택동 어록>을 외워야 했다. 사람마다 “충자무 忠字舞-모택동을 찬양하는 춤-역주”를 추었고 위대한 수령 모주석에 대해 무한히 충성을 표시했다. 매 가정의 대청에는 모의 초상을 걸어야 했다. 중공은 문혁 기간에 한 모택동 개인숭배는 히틀러의 나치스 당이 무색케 했다.

물에 들어가 수영하기 전에도 “홍보서”를 먼저 읽어야 한다.

홍위병이 “충자(忠字)무”를 추다

1967년 봄이 되자 모택동의 개인 숭배는 정점에 달했다. 중공은 전국에서 “삼충우, 사무한(三忠于四无限)” 의 구호를 선전했다. “삼충우”는 소위 모주석에 충성, 모택동 사상에 충성,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 노선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사무한”은 소위 모주석, 모택동 사상, 모주석의 혁명 노선에 대해 무한히 열애하고 신앙하며 숭배하고 충성하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일종 공산사교의 미친 표현으로서 바로 중국인민에 대한 일차의 미친 세뇌이며 남녀노소는 강제로 “매일같이 홍보서”를 읽어야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아침에 지시를 물어보고 저녁에 보고하는” 일종의 종교의식이 되었다.

소수민족 초등학생들 역시 “아침에 지시를 청하고 저녁에 보고”해야 했다.

만일 문화혁명 중에 모택동에 대한 미친 듯한 개인숭배가 당시의 “형세가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면, 문혁이 지난 수십 년 후 여전히 중공산당에 세뇌된 큰 무리의 중국인이 아직도 “털이 난 짐승”인 모택동을 숭배한다는 것은 바로 매우 슬픈 일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에서 예언하는 일이다.

“카르카손에서 불명예스러운 것이 길조가 된다. 그는 충분한 시간동안 머무를 것이다””

카르카손(Carcassonne)은 프랑스 남부의 일개 보루의 소도시이다. 시에서는 불명예스러운 것이 길조가 된다고 했는데 여러 해가 지난 후 모택동의 사진 등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길한 물건”으로 여겨 집안이나 자동차 안에 걸려있으며 일부는 공산당에 세뇌된 중국인은 모택동에 숭배에 약간의 카르카손의 보루처럼 완고하다. 그래서 “그는 충분한 시간동안 머무를 것이다”, 즉 비교적 장시간 동안 중국인이 모택동에 대한 숭배가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다른 방면으로 카르카손(Carcassonne)은 Carcass 와 sonne 두 글자로 나눌 수 있는데
Carcass 는 짐승의 시체이며 sonne 은 sonner가 변한 것으로 음성을 낸다는 뜻이므로 제 3구는 제 1구와 대응되어 두 가지 일을 예언한다. 하나는 모택동 이 “털이 있는 짐승”이 죽은 후 그의 시체는 본래 “불명예스러운 것”인데 오히려 “길한 것”으로 남겨져 왔으며 중공은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은 하나의 큰 “전시당(陳屍堂)-시체 진열장”을 건설했으니 천안문광장은 하나의 시체 진열장이 된 것이다. 둘째로는 모택동 사후에 이 죽은 짐승의 음성, 즉 소위 “모택동사상”이 중공의 보배로 “계승”되어 내려왔고 중공의 지도사상이 된 것이다. 이점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데 중공 자신은 바로 “사악한 짐승”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짐승의 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한다.


* 시골로 쫓겨난 지식청년들

제3 기 60수
불문:
Par toute Asie grande proscription,
Mesme en Mysie, Lysie, & Pamphylie :
Sang versera par absolution,
D”vn ieune noir remply de felonnie.

영문:
Throughout all Asia great proscription,
Even in Mysia, Lycia and Pamphilia.
Blood will be shed because of the absolution
Of a young evil one filled with felony.

아시아에는 거대한 유배가 있고
미시아, 리시아와 팜필리아에서 조차도
석방을 위해서는 유혈이 흐를 것이다.
중죄를 가득 짊어진 사악한 청년의 피가

본시의 최후의 일구 중 불문의 “noir”는 검은 색을 가리킨다. 그래서 원래의 영문 번역은 “black”으로 했다. 그러나 “noir”는 “사악(evil)” 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나중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면 구절 중 “중죄를 가득 짊어진”것과 비교적 뜻이 잘 맞는다.

이 시는 문화혁명기간에 중국에서 발생한 “지식청년이 산으로, 시골로 가는” 운동을 예언했다. 문화혁명기간에 중국인이 모택동의 진정한 면목을 똑똑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임표의 아들 임립과도 그 중 하나인데 그는 <571 공정, 그 요점>에서 당시 중국의 현상을 기술했다.

청년지식분자는 산으로, 고향으로 갔는데 노동개조의 또 다른 형태였다…. 홍위병은 초기에 속아서 이용당했고 이미 총알받이로 충당되었으며 나중에는 억눌려 속죄양으로 변했다. 본시에서 말하는 “아시아에는 거대한 유배가 있고” 에서 가리키는 것은 노동개조나 다름없는 “청년지식분자의 산골행, 시골행”이었다. 왜냐하면 역사상의 기타 유배는 본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석방을 위해서는 유혈이 흐르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범죄”로 유배된 사람은 규칙을 준수하면 석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피를 흘리고 싸운다면 죄가 가중되어 노동개조나 다름없는 “시골로 간 지식청년”은 “석방되어 도시로 돌아올 수”있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투쟁” 해야 하는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 마지막 한 구는 예언 중에 유배된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것을 예언한다.

임립과(林立果)는 모택동에게 “B-52” 폭격기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모택동의 배는 매우 큰데 이 안에 든 것은 모두 나쁜 생각이며 하나의 생각이 바로 하나의 폭탄이며 떨어뜨리면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년지식분자의 산행, 시골행”은 바로 모택동이 홍위병을 다 이용한 후 그들을 무정하게 포기한 나쁜 생각이었다. 1968년 12월 모택동은 “청년지식분자는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농촌의 재교육을 받아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모택동의 이 지시는 전반 도시의의 청년과 수천만의 가정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1966, 1967, 1968년 중, 고등학교 졸업생은(나중에는 “노삼회”라고 불렀다) 중공의 의해 시골로 쫓겨 갔으며 나중에 내려간 청년을 더하면 이런 청년은 전국에서 1600만 명에 달했다. 그래서 예언에서는 “아시아에는 거대한 유배가 있고” 라고 했다.

소위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농촌의 재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중공이 “지식청년”을 다스리는 구실에 불과했다. 예언에서는 “미시아, 리시아와 팜필리아에서 조차도”이런 유배가 있다고 했는데, 미시아는 고대 소아시아 서북부 지구이며, 리시아는 당시의 서남부 지구이며 팜필리아는 섬으로서 이 구에서 말하는 뜻은 당신이 아무리 편벽한 곳에 있어도, 가령 서북지방이나 서남지역거나 아니면 섬이거나 간에 당신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지식분자이기만 하면 설령 어려서부터 이미 가난한 농촌에서 교육을 충분히 받았더라도 역시 가난한 농촌에 가서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서성 궁산구 덕안현의 중고등학생들 역시 시골로 가야했다.

중공은 일종의 사교이어서 다른 사람을 세뇌하여 이용한 후 무정하게 버렸다. 중공은 소위 “토지혁명”시기에는 농민을 이용하여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게 하여 정권을 탈취하고 그 후에 농민을 포기했으며 도시와 농촌을 차별하는 극대한 호구제도를 제정했다. 농민은 평생 자기의 고향에서 죽어야 했으며 단지 양식과 부산물을 수탈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졌고 어떠한 보장도 해주지 않았다. 중공은 일부러 턱없이 무거운 세금을 물려 대기근을 조성했으며 수천만 농민을 아사시켰다. 중공은 “민주인사”를 이용하여 장개석을 반대했으며 이용한 후 바로 반우운동과 문화혁명 중 그들을 전부 죽이다시피 했으며 중공은 팽덕회를 이용하여 하룡(贺龙), 진의(陈毅) 같은 선생을 타도했으며 유소기, 팽진(彭眞) 등 이런 혁명 원로를 이용해 대기근 후의 경제를 회복했으며 이용한 후 그들을 죽게 만들었다. “산으로 시골로” 가는 것은 바로 홍위병들이 다 이용당한 후 즉각 중공이 포기한 결과이다.

불쌍한 것은 중공에 세뇌된 이용당한 후 버려진 지식청년이었다. 어떤 사람은 중공이 버릴 때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호소에 응답했으며 무슨 “광활한 천지에 할 일이 많다”, ” 큰 포부를 품고 농촌에 왔다”, “총수 모주석을 따라잡아 광활한 천지에 충성심을 연마한다” 등등이었는데 명백히 중공산당에 의해 그 청춘이 매장 당했으며 그들은 오히려 청춘을 당에 헌납했다. 그 평생은 공산당에 의해 죽다시피 했는데 최후에는 오히려 “당에 대해 시종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중공 사교의 사악함은 일부 볼 수 있다.

본시의
“석방을 위해서는 유혈이 흐를 것이다. 중죄를 가득 짊어진 사악한 청년의 피가”
는 지식청년들이 “중죄를 가득 짊어지고” 중공에 의해 유배된 후 70년대에 농촌에서 석방되어 도시로 돌아오기 위해 “머리가 터지게 피가 흘리며” 투쟁을 한 것을 예언했다. 7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일하러, 고시 보러, 직장을 찾으러, 대학을 가기 위해, 군에 참가하는” 등등 도시로 돌아오는 경로는 하나도 정원에 한계가 없는 것이 없었고 각종방법으로 투쟁해야 비로소 가능했다. 70년대 말기가 되어 대규모의 항쟁이 나타났는데 지식청년들은 청원, 파업, 철로에 드러눕거나 심지어 단식하는 방법 등으로 도시로 돌아올 것을 강렬히 항쟁했다.

문화대혁명의 “산으로 시골로 가는” 운동은 중국의 전반 한세대의 사람을 훼손시켰으며 사회에 큰 혼란을 조성했고 지식이 단절된 세대였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산으로 시골로 가는” 이 일세대의 사람은 우롱당한 일 세대이며 그것은 “노동개조의 다른 방식”으로, “산으로 시골로 가는” 방식은 지식청년을 우롱한 것이며 현재의 사람들이 보면 이런 우롱은 너무나 뚜렷하다. 그러나 중공은 사교 세뇌의 이런 방식으로 또 어찌 한 세대의 중국인만 우롱했겠는가? 매 중국인 만일 진정 독립적인 사고를 해본다면 중공이 우롱하고 속인 것은 거의 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중국 사람들아, 우리는 중공의 이러한 무뢰한 우롱을 얼마나 오래가도록 두어야 하는가?

발표시간 : 2008년 4월 23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8/4/23/5249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