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오(明奧) 정리
【정견망】
제3편 이순풍 원천강의 《추배도(推背圖)》
제31상 갑오(甲午)
참(讖)에 가로되:
권력을 잡은 남은 재앙이요
궁궐을 더럽히는구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 나라를 남의 손에 넘겨주네
當塗遺孽 穢乩宮闕
一男一女 斯送人國
송(頌)에 가로되:
충신과 현사가 모두 침륜하니
하늘이 그 마음을 열어 어지러움이 더해가는구나
비록 가슴에 품은 뜻이 담백하다 하나
건곤은 더 이상 옛 명군(明君)의 것이 아니로다
忠臣賢士盡沉淪
天啟其衷乩更紛
縱有胸懷能坦白
乾坤不屬舊明君
김성탄:
“이 상은 천계(天啓) 7년 동안 요사스러운 기운이 하늘을 덮어 나라의 원기가 상한 일을 주관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내시 위충현과 객씨(客氏)를 가리킨다. 위충현이 객씨를 죽였는데 객씨는 희종의 유모로 봉성부인(奉聖夫人)이라 불렸다”
명조(明朝) 역사에서 ‘궁궐이 가장 혼란(穢亂宮闕)’했던 때는 바로 희종 천계(天啓) 연간이다.
“충신과 현사가 모두 침륜하니 하늘이 그 마음을 열어 어지러움이 더해가는구나” 구절에는 위충현(魏忠賢)의 이름이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조정의 정치가 어두워 충신과 어진 선비들이 모두 가라앉고 환관과 창위(廠衛 동창 즉 비밀경찰)가 권력을 휘두르며 발호했음을 설명한다. 이 구절은 시기가 ‘천계(天啓)’ 연간임을 명시하는 동시에, 이러한 혼란이 모두 하늘의 뜻이며 하늘이 열어준 것임을 암시한다. ‘당도유얼(當塗遺孽 권력을 잡은 남은 재앙이요 )’에서 당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이미 고찰하기 어렵다.
‘일남일녀(一男一女)’에서 남자가 누구인지는 이미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그중 여자는 또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로 정귀비(鄭貴妃)다. 어떤 이들은 주유교(朱由校)의 유모 객씨(客氏)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는데, 그녀는 위충현(魏忠賢)과 결탁하고 간통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이 한 쌍의 남녀가 서로 결탁하여 명나라를 어지럽혔고, 황제를 극도로 음란한 상태에 처하게 했으며 조정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간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백성을 해치게 내버려 두었으니, 이로 인해 명조는 급격히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바로 이들이 나라를 망친 것이다.
“비록 가슴에 품은 뜻이 담백하다 하나 건곤은 더 이상 옛 명군(明君)의 것이 아니로다”이라는 구절은 숭정제(사종)가 즉위한 후 즉시 위충현을 처단하고 정신을 떨쳐보려 했음을 설명한다. 숭정제는 확실히 혼군이라 할 수 없으며 흉금이 담백하다 일컬을 만하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대세를 돌릴 힘이 없었으며, 하늘은 더 이상 명조 군주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제32상 을미(乙未)
참(讖)에 가로되:
말이 북쪽 대궐에서 뛰고
개가 서쪽에서 짖는구나
팔구(八九)의 수(數)가 다하니
해와 달이 빛을 잃도다
馬跳北闕 犬嗷西方
八九數盡 日月無光
송(頌)에 가로되:
버들꽃 지고 오얏꽃 시드니
오색 깃발 나누어 북쪽에서 오네
탄식하노라, 금릉의 왕기가 다했으니
한 가지 봄빛이 장안을 점령하도다
楊花落盡李花殘
五色旗分自北來
太息金陵王氣盡
一枝春色占長安
김성탄:
“이 상(象)은 이자성과 장헌충이 중원을 어지럽히고, 숭정제가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 자결하며, 복왕(福王)이 편안히 지내다 오래지 않아 명나라의 제사가 끊기고 멸망함을 주관한다. 송(頌)의 마지막 구절은 호후(胡後 오랑캐 후예)을 가리키는 듯하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림 속의 문 하나와 문 안의 말은 ‘틈(闖)’ 자를 눈앞에 떠오르게 한다.
“말이 북쪽 대궐에서 뛰고(馬跳北闕)”에서 궐(闕)은 문을 뜻하며, 이는 틈왕(闖王) 이자성의 일을 가리킨다. 실제로 말 한 마리가 북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형상과 같다.
“개가 서쪽에서 짖는구나(犬嗷西方)”는 장헌충이 서천(西川)에서 난을 일으킨 것을 의미한다. 틈왕 이자성이 명조를 멸망시켰는데, ‘팔구수진(八九數盡)’은 명조 17대 황제의 운수가 다했음을 뜻한다. 8과 9를 더하면 17이 되니 바로 명조 황제의 수와 일치한다.
“해와 달이 빛을 잃도다(日月無光)”는 ‘명(明)’이 망했음을 의미한다(일과 월을 합치면 명자가 된다). 《추배도(推背圖)》의 어떤 상은 그림의 정보량이 많고, 어떤 것은 문자의 풀이가 명확하다.
‘송에 가로되’ 네 구절의 시는 이자성이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북방 민족이 결국 천하를 얻게 될 것임을 예시한다.
“탄식하노라, 금릉의 왕기가 다했으니(太息金陵王氣盡)”는 명조가 애초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했으므로 명의 기수(氣數)가 다했음을 암시한다.
“한 가지 봄빛이 장안을 점령하도다”는 김성탄(金聖歎)이 말한 호후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장안’은 중국을 비유한 것이다. ‘춘색(春色)’은 동북방에서 온 민족의 떠오르는 힘을 가리킨다. 또한 봄(春)은 오행 중 목(木)에 속하며 방위로는 동북방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만주족이 천하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제33상 병신(丙申)
참(讖)에 가로되:
황하 물이 맑아지니
기운이 순응하여 다스려지도다
주인과 손님이 나뉘지 않으니
지지(地支)에 자(子)가 없도다
黃河水清
氣順則治
主客不分
地支無子
송(頌)에 가로되:
하늘 장백산에서 폭포가 내려오니
오랑캐의 기운이 쇠하지 않는구나
번리(울타리)를 많이 거두어 가니
어린 자식이 반이라 가련하도다
天長白瀑來
胡人氣不袞
藩離多撤去
稚子半可哀
김성탄:
“이 상(象)은 만주족의 청이 입관(入關)할 징조다. 객이 도리어 주인이 된 것은 거의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遼)와 금(金) 이후로 호인(胡人)이 두 번 중원을 다스렸으니, 당당한 한족(漢族)으로서 이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황하 물이 맑아지니 기운이 순응하여 다스려지도다”
이 구절에서 황하는 중원 대지를 뜻한다. 이 구절은 만청이 입관하여 순치제(順治帝)로부터 중원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 실로 천의(天意)임을 가리킨다. 이는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한데, 청나라 치하의 중국이 황하의 물을 맑게 하고 기운을 순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주인과 손님이 나뉘지 않으니”는 만청의 통치가 객이 도리어 주인이 된 것임을 말한다.
“지지에 자가 없다”는 말은 청조 황제의 개략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지지는 12개가 있으니 청조에 총 12명의 황제가 있음을 나타내고, 자(子)는 12지지의 첫 번째이니 ‘자가 없다’는 말은 청조의 첫 번째 황제 누르하치가 청이란 국호가 세워지기 전에 사망했음을 암시한다. 누르하치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청 태종 황태극이 대청(大清)이란 국호를 세우고 누르하치를 청 태조로 추존했다.
“하늘 장백산에서 폭포가 내려오니 오랑캐의 기운이 쇠하지 않는구나”
이 구절은 만청이 동북 장백산(長白山) 일대에서 세력을 일으켰음을 가리킨다. 송조(宋朝) 시기 요와 금 이후로 호인(胡人 북방 이민족)이 원(元)과 청(清) 두 차례 중원을 통치하며 그 기세가 쇠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울타리를 많이 거두어 가니(藩離多撤去)”는 청조의 국방이 점차 약해져 말년에 외세의 침략을 받은 것을 비유한다(강희제가 삼번을 철폐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어린 자식이 반이라 가련하도다(稚子半可哀)”는 만청이 입관 후 10명 황제 중 절반(순치, 강희, 동치, 광서, 선통)이 즉위할 때 10세 미만의 ‘어린아이’였음을 암시하며, 이러한 상황이 청조에서 실로 애처롭게 느껴짐을 말한다.
그림 속의 배 한 척에 여덟 면의 깃발과 열 사람이 실려 동북쪽에서 오는 것은, 만청 팔기(八旗)가 동북에서 입관하여 중원을 통치하고 입관 후 대청 역사에 총 10명의 황제가 있을 것임을 비유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며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화제를 논해보고자 한다. 앞서 나온 예언들을 읽고 정말 정확하여 불가사의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추배도》가 혹시 후대 사람이 조작한 것은 아닐까?
예언은 보편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일목요연해지는 특징이 있다. 사건 전에는 예언이 항상 시비가 분명치 않은 느낌을 주는데, 이는 마치 사람들이 너무 명확하게 알지 못하도록 일부러 의도한 듯하다. 그래서 예언은 흔히 암시, 동음, 파자, 심지어 오행팔괘의 술어를 채택하는데, 어릴 때부터 백화문을 배운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어느 면에서 말하자면, 우리 현대 중국인의 사상은 이미 진정한 전통문화와 단절되었다. 서구의 문화 전통은 중국처럼 박대정심(博大精深)하지 않지만, 서양인들은 여러 방면에서 그들의 역사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그 속에서 지혜를 얻으려 노력한다. 우리가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많은 전통 사상은 냉정히 말해 서양에는 있지도 않은 것들이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에 대해 역사는 이미 답을 내놓았으니, 우리가 사상의 틀을 깨고 정좌하여 조용히 생각해 보려 하는가에 달려 있다.
《추배도》에 대한 해석은 많지만,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역시 김성탄의 주해다. 김성탄은 명말청초 사람으로 명청(明淸) 왕조 교체를 직접 목격했다. 조금 전 우리가 청조 건국에 관한 제33상을 풀이하지 않았는가? 33상 이전 부분은 김성탄에게 역사였기에 그는 아주 명확하게 풀이했다. 그가 33상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자.
“이 상(象)은 만주족의 청이 입관(入關)할 징조다. 객이 도리어 주인이 된 것은 거의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遼)와 금(金) 이후로 호인(胡人)이 두 번 중원을 다스렸으니, 당당한 한족(漢族)으로서 이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반면 34상부터는 김성탄 사후의 일이다. 김성탄은 살아생전에 예언 내용에 부합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이 상을 풀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증명하기는 쉬우나 미래의 일을 추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을 증명했으니 장래의 일도 추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다만 이제부터 내가 평치(平治)라고 말한 것이 다행히 맞고, 내가 불평치(不平治)라고 말한 것이 다행히 맞지 않아 내가 죄가 없음을 알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상은 수재나 병란이 천재지변과 함께 나타날 것으로 의심되니, 이것이 하나의 난세다.” 분명히 그가 34상에 대해 단 주석은 본래의 뜻에서 매우 멀리 벗어나 있다.
제51상 갑인(甲寅)
[순서가 뒤섞여 있는데 이 상은 청 초기 예언이다]
참(讖)에 가로되:
음양이 화합하여
바름으로써 변화하니
곤(坤)이 순응하여 감응하매
뒤에 요순을 보리라
陰陽和 化以正
坤順而感 後見堯舜
송(頌)에 가로되:
누가 여자가 강강(剛強)하다 했는가
곤덕(坤德)이 마침내 사방을 감동시키네
중천에 새로운 기상을 다시 보게 되니
점친 해가 16이요 수(壽)하고 강녕하도다
誰雲女子尚剛強
坤德居然感四方
重見中天新氣象
卜年一六壽而康
김성탄:
“이 상은 명군(明君)이 현후(賢后 어진 황후)의 도움을 얻어 교화가 나라 안에 행해지고 다시 태평성대를 보게 되는 또 하나의 치세다. 점쳐진 해가 16년 또는 혹 재위가 70년일 것이다.”
그림 속에서 묘사한 것은 명군이 현숙한 황후를 얻는 모습이다. 이 상은 청 태종 황태극(皇太極)이 효장문황후(孝莊文皇後)의 도움을 얻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씨는 본래 몽골 호르친(Khorchin) 버일러 보르지기트 자이상(borjigit jaisang, 博爾濟吉特 寨桑)의 딸이다. 1625년 겨우 12세의 나이에 오라버니의 전송을 받으며 자신보다 20세 연상이자 고모부인 황태극에게 시집가 복진(福晉)이 되었다. 1636년 황태극이 황제를 칭하며 그녀를 영복궁 장비(莊妃)로 봉했다. 숭덕 3년(1638년)에 아홉 번째 황자인 복림(福臨 훗날 순치제)을 낳았으며 장비를 황태후로 추존하니 사서에서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라 부른다.
효장문황후는 타고난 미모로 청조 초기의 절대가인(絕代佳人)이었다. 그녀는 일을 처리함에 침착하고 과단성 있게 처신하며 황태극을 도와 “내정을 도왔으니” 그야말로 신변의 여제갈(女諸葛 여자 제갈공명)이었다.
1642년(태종 숭덕 7년) 청군이 송산(松山)을 함락하고 명 계요(薊遼)총독 홍승주(洪承疇)를 포로로 잡았다. 황태극은 그의 재능을 중히 여겨 투항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온갖 정성을 다했음에도 홍승주는 투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식 행동을 취하며 두 주인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심을 표했다. 신하들이 손쓸 방도가 없던 때에 장비가 황태극에게 자천하여 직접 나섰다. 이 30세의 젊은 부인은 한족 여인으로 분장하여 유달리 예뻤다. 그녀는 인삼탕을 받들고 감옥으로 들어가 지극히 온화하게 이해관계를 설명했다. 홍승주는 그녀의 간곡한 권유 아래 마침내 청에 귀순했으며 청조가 중원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 황태극은 재위 16년 만인 1643년에 서거했다. 6세의 복림이 제위를 계승하니 이가 순치제(順治帝)다. 북경으로 천도한 후 모친인 효장문황후를 태후로 받들고 황숙 도르곤이 섭정하게 했다. 순치가 어렸기에 도르곤이 제위를 위협하는 것을 없애고자 효장문태후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만주족 습속에 따라 의연하게 도르곤에게 재가했다. 효장태후의 중재 덕분에 도르곤은 순치의 황위를 찬탈하지 않았고 청나라 대권은 점차 순치의 손으로 옮겨갔다.
순치제는 천연두를 앓아 24세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강희제(康熙帝)는 효장문태후의 보살핌 아래 8세에 등극했고 14세에 친정했다. 그사이 보정대신 오배(鰲拜)가 권력을 찬탈할 기회를 엿보았는데 강희제가 지혜롭게 오배를 사로잡아 대권을 되찾은 것도 효장문태후의 도움 덕분이었다. 이 모든 것은 이 태후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여준다.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평정할 때 효장문태후는 전력으로 강희제를 지지했으며 궁중의 금은과 비단을 내어 노고를 치하했다. 효장문태후는 절약을 제창하여 여러 차례 궁중에서 아낀 은전으로 이재민을 구제했다. 그녀의 검소한 가풍은 강희와 옹정 두 조정에 영향을 주었다.
1687년 강희 26년에 향년 75세로 서거했다.
참에서 말하는 “곤이 순응하여”에서 곤(坤)은 땅을 가리키고 음(陰)을 뜻한다[하늘이나 양을 뜻하는 건(乾)에 대응함]. 이는 현숙한 여인이 나타나고 그 후 몇 명의 어진 군주가 출현하여 강건성세(康乾盛世)를 가져올 것임을 의미한다.
“요순(堯舜)”은 효장문황후의 영향을 받은 청조 초기의 명군들을 비유한다. “복년일육수이강(卜年一六壽而康)”은 황태극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 재위 기간이 16년임을 암시하며 또한 효장문황후가 향년 75세로 강희 연간에 서거했음을 암시한다.
제42상 을사(乙巳)
참(讖)에 가로되:
미인이 서쪽에서 오니
조정이 나날이 안정을 찾네
긴 활(長弓)이 땅에 있으니
위태로운 듯하나 위태롭지 않도다
美人自西來
朝中日漸安
長弓在地
危而不危
송(頌)에 가로되:
서방의 여인 비파선(琵琶仙)이라
밝고 깨끗한 옷색깔이 더욱 선명하네
이때에 조정과 저잣거리에 섞여 지내며
군신을 온갖 방법으로 어지럽히다
西方女子琵琶仙
皎皎衣裳色更鮮
此時渾跡居朝市
鬧亂君臣百萬般
김성탄(金聖歎):
“이 상은 한 여자가 나라를 맡아 복색은 흰색을 숭상하고 대권을 독점하여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할 것으로 의심된다. 아마 토끼 해(卯年)에 나타날 것이니 이는 난세가 시작될 징조다.”
이 상은 서태후로 알려진 자희태후(慈禧太後)에 응험한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보더라도 명백히 한 여자가 나라를 맡은 것이며 더욱이 대권을 독점한 상태다. 김성탄 선생도 이와 같이 말했다. 근대사를 통틀어 청대 이후 그녀처럼 조정을 독단적으로 다스린 여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강청(江青 모택동의 처로 문화혁명을 주도한 인물)도 그렇다고 여기지만 강청은 단지 모택동의 바둑돌일 뿐 결코 대권을 독점한 적이 없으며 나라를 맡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녀는 그저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뿐이다.
서(西) 자가 두 번 나오는데 자희태후는 흔히 서태후(西太後)로 불렸다.
“미인이 서쪽에서 오니 조정이 나날이 안정을 찾네”는 구절은 강청이 아니라 더욱더 서태후를 가리킨다. 당시 청조는 혼란 속에 있었는데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나서야 조정의 정사가 기본적인 질서를 갖추게 되었다.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사실 그녀에게도 공로는 있다. 반면 강청은 조정을 안정시킨 적이 없다.
나라를 맡은 이 여인의 미모를 형용하는 말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히 정확하다.
또 다른 토끼 한 마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김성탄은 이를 묘년(卯年)으로 풀이했다. 그렇다면 함풍제가 집권하던 1855년인가 아니면 동치제가 재위하던 1867년인가, 그것도 아니면 서태후의 생년과 같은 또 다른 해인가? 이는 독자들의 고찰에 맡기기로 한다.
“긴 활이 땅에 있으니 위태로우나 위태롭지 않다”는 구절에서 가장 명백한 점은 그녀가 해군 경비를 들여 원명원(圓明園)을 건조함으로써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 했으나 나라가 전복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긴 활보다 비파(琵琶)를 더 사랑했음을 말해준다. 사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문화 예술을 더 중시해야 하며 과도하게 군비를 확장하고 전쟁을 준비해서는 안 되지만 그녀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못 타고났을 뿐이다.
“군신을 온갖 방법으로 어지럽히다(鬧亂君臣百萬般)”는 구절은 그녀가 조각상의 용과 봉황의 위치를 뒤바꿔 봉황을 위로 가고 용을 아래로 가게 한 것을 말한다. 그녀 본인은 측천무후처럼 황제를 칭하지 않았기에 신하의 신분이었으나 군주의 자리에 거처하며 수천 년간 이어온 군신의 질서를 모두 어지럽혔다.
송(頌)에서 말한 “이때” 조정과 저자에 섞여 있었다고 한 것은 그녀가 아직 대권을 얻기 전의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상을 함풍제가 열하(熱河)로 피난 가기 전의 순서에 배치했다.
제34상 정유(丁酉)
참(讖)에 가로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있고
옷은 흰색을 두려워하네
태평한 때에
왕이 왕을 죽이도다
頭有發 衣怕白
太平時 王殺王
송(頌)에 가로되:
태평한데 또다시 피꽃이 날리니
오색의 장식으로 겉옷과 안감을 삼았네
홍수(洪水)가 하늘을 덮으나 싹(苗)이 피어나지 못해
중원에서 일찍이 본 꿈이 모두 어긋나도다
太平又見血花飛
五色章成裡外衣
洪水滔天苗不秀
中原曾見夢全非
김성탄:
“이미 지나간 일을 증명하기는 쉬우나, 미래의 일을 미루어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을 증명했으니 장래의 일도 미루어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단지 이로부터 이후에 내가 평온하고 다스려진다고 말한 것들은 다행히 적중하고, 내가 평온하지 못하고 어지러울 것이라 말한 것들은 다행히 적중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 그러면 내가 죄가 없음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상은 아마도 수재를 만나거나 병란과 천재지변이 함께 나타날 것으로 의심되니, 이는 하나의 난세다.”
사실 이 상은 후대 사람들에게 아주 명확하다. 글자를 한눈에 훑어보아도 역사와 예언에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로 말이 나올 것이니, 이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을 말하는 것이다!
“머리에 털이 있다(頭有發)”는 것은 태평천국 민중들이 머리를 길게 기르되 만청(滿淸)의 규정에 따라 변발을 하지 않았음을 가리키며, 이들은 장모(長毛)라고 불렸다.
“옷은 흰색을 두려워한다(衣怕白)”는 태평군의 복식을 형용한다. 어떤 이들은 태평천국의 천경(天京) 내홍 중에 백기를 든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가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清)과 그의 온 가족 및 부하와 군사 2만여 명을 도륙하여 일대가 피비린내 나는 공포에 휩싸였던 것을 비유한다고 여긴다.
“태평한 때에 왕이 왕을 죽인다(太平時,王殺王)”는 구절은 태평천국이라는 명칭을 직접 언급함과 동시에 마지막에 서로 잔혹하게 죽이는 운명을 언급했다.
“태평한데 또다시 피꽃이 날리니(太平又見血花飛)”에서 태평은 태평했던 시절의 종결을 뜻함과 동시에 태평천국이라는 명칭을 암시한다.
“오색의 장식으로 겉옷과 안감을 삼았네(五色章成裹外衣)”는 이 구절은 태평천국이 오색기를 상징으로 삼았고, 또 많은 강령으로 유명했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원도구세훈(原道救世訓)》,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와 《자정신편(資政新篇)》 등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겉치레일 뿐이며 진정한 태평천국의 본질은 매우 어두웠다.
“홍수(洪水)가 하늘을 덮으나 싹(苗)이 빼어나지 못해 중원에서 일찍이 본 꿈이 모두 어긋나도다”는 홍(洪)수전의 반란이 마치 홍수나 맹수와 같음을 가리킨다.
“싹이 피어나지 못해(苗不秀)”에 수(秀) 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외에도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뜻이 있다. 수(秀)는 꽃이 핀다는 뜻이니 홍수전이 승리하지 못할 것임을 가리킨다.
“중원에서 일찍이 본(中原曾見)”은 증(曾)국번이 호남에서 상군(湘軍)을 조직하여 그가 중원을 볼(즉, 평정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또한 태평천국이 한때 중원을 점령했으나 결국 증국번의 상군에 패배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꿈이 모두 어긋나도다(夢全非)”는 태평천국이 한때 중원의 장려한 강산을 차지했으나 결국 한바탕 꿈이었음을 말한다.
그림에서 묘사한 것은 하늘에 넘치는 홍수와 갈대밭 가의 해골 몇 구다. 이는 홍수전의 이름을 암시함과 동시에 태평천국이 중국에 가져온 비참한 운명을 암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비록 명확하게 설명하고는 있으나,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아무리 추측하더라도 단지 수재, 병란, 천재지변의 부류로만 여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김성탄 선생의 말속에서 우리는 그가 이미 이 상(象)이 무엇을 예언하는지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제35상 무술(戊戌) (제2차 아편전쟁과 원명원)
참(讖)에 가로되:
서방에 사람이 있어
신주의 도성(神京)을 밟으니
황제는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삼태(三台)가 기울어짐을 붙드네
西方有人 足踏神京
帝出不還 叄台扶傾
송(頌)에 가로되:
검은 구름이 어둑어둑 서쪽에서 오고
황제의 아들이 강가에 금대를 쌓네
남쪽엔 병란이 있고 북쪽엔 불길이 일어날 때
중흥에 일어난 기재(曾)를 보았도다
黑雲黯黯自西來
帝子臨河築金台
南有兵戎北有火
中興曾見有奇才
김성탄:
“이 상은 몽진하는 일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니, 또한 어지러운 징조다.”
그림 속에서는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두 명의 병사(뒤쪽 멀리 또 한 명의 병사가 뒤따르고 있다)가 성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다.
김성탄 선생은 천조(天朝)의 도성이 장차 이러한 큰 변동을 겪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위풍당당하게 북경 성안으로 들어와 황제를 도망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원(園) 중의 원이라 칭송받던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으니,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는 국치로 기억되고 있다.
“서양에 사람이 있어 신주의 도성(神京)을 밟으니” 구절은 이해하기 매우 쉬운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에 진입한 것을 가리킨다.
“황제는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帝出不還)”는 황제가 쫓기듯 성을 나갔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음을 뜻한다(함풍제는 열하로 피난한 후 그곳에서 병사하여 다시는 북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삼태(三台)가 기울어짐을 붙든다(三台扶傾)”는 세 명의 대신이 보좌하여 정권이 전복되지 않았음을 뜻한다(필자가 그 시절 역사를 잘 알지 못해 이 구절은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다).
“검은 구름이 어둑어둑 서쪽에서 오고(黑雲黯黯自西來)”는 서구 침략자들이 먹구름처럼 공격해 온다는 뜻이다.
“황제의 아들이 강가에 금대를 쌓네(帝子臨河築金台)”는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쳤고 그 아들 또한 열하에서 즉위했음을 뜻한다.
“남쪽엔 병란이 있고 북쪽엔 불길이 일어날 때(南有兵戎北有火)”에서 남쪽의 병란은 남방에서 태평천국이 모반한 것을 가리키고, 북쪽의 불길은 서구 열강이 침입하여 원명원을 불태운 것을 가리킨다.
“중흥에 일어난 기재(曾)를 보았도다(中興曾見有奇才)”는 다행히 이 기재(증국번)가 있어 대청의 강산을 보존했음을 뜻한다[구절 중 증(曾)은 증국번의 성씨를 암시한다]. 증국번은 당시 사람들에게 대청 중흥의 명신(名臣)으로 불렸다.
제55상 무오(戊午)
참(讖)에 가로되:
두려워하면 경계가 생기니
어떤 원(遠)도 돌아오지 못했네
물가에 여자가 있으니
해를 향해 스스로 절하네
懼則生戒
無遠勿屆
水邊有女
對日自拜
송(頌)에 가로되:
신기를 엿보아도 결국 소용이 없으니
조심조심 따르는 신하들이 많도다
위기를 넘겨 안정을 찾으니 절개가 보이나
강산을 내 손으로 보낸 것은 아니로다
覬覦神器終無用
系翼小心有臣眾
轉危為安見節義
未必河山自我送
김성탄(金聖歎):
“이 상은 석(石) 씨 혹은 유(劉) 씨 성을 가진 이가 중원을 통일하고, 여(汝) 씨 성을 가진 자가 찬탈을 꾀하나, 다행히 대신이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경계하며 힘써 정진하여, 모든 외세의 침략이 멸하지 않아도 스스로 멸망하니, 비록 혼란스러우나 또한 다스려지는도다.”
이 상은 갑오년 청일전쟁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의 한 사람이 쓰러지는 나무를 붙들고 있는 것은 정여창(丁汝昌)이 기우는 청을 붙잡은 것을 비유한다. 이는 정여창이 비록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려 힘썼으나, 청 조정의 멸망은 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광서(光緖) 연간, 청 조정은 서양에서 구입한 군함으로 오랑캐를 제압(이이제이)하기 위해 강력한 해군을 창설하려 시도했다.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이홍장은 어명을 받들어 북양(北洋)해군을 건립했다. 서기 1888년, 북양함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고 정여창이 제독에 임명되었다. 서기 1894년 5월 일본이 조선에 출병했다. 7월, 일본군은 아산만 풍도 앞바다의 북양 수군을 기습 공격하고, 아산 인근의 중국 수비군을 공격했다. 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8월 1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조서를 내렸다.
“두려워하면 경계가 생기니(懼則生戒)”는 이홍장, 정여창 등이 북양함대의 실력이 일본 함대에 미치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보수적인 전략을 취했음을 의미한다.
“어떤 원(遠)도 돌아오지 못했네(無遠弗屆)”에서 ‘원’은 북양함대의 군함들을 지칭한다. 북양함대의 군함들은 대개 정원(定遠), 치원(致遠), 진원(鎭遠) 등 ‘모(某)원(遠)함’이 불렸다. ‘무원불계’는 북양함대 전군의 전멸을 의미한다.
“물가에 여자가 있다(水邊有女)”는 말은 ‘여(汝)’를 뜻하며,
“해를 향해 스스로 절한다(對日自拜)”는 ‘창(昌)’을 뜻한다.
이 구절은 청일전쟁에서 중국 측 주인공인 정여창을 암시한다.
“신기를 엿보아도 결국 소용 없으니(覬覦神器終無用)”에서 ‘신기’란 북양함대의 군함을 지칭한다. 이 구절은 청 조정이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여 이이제이를 도모했으나, 결국 전군이 함락되어 끝내 소용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조심조심 경계하는 신하들이 많도다(翼翼小心有臣眾)”는 이홍장, 정여창 등이 전략 수립에 있어 대단히 신중하고 보수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위기를 넘겨 안정을 찾으니 절개가 보이나 강산을 내 손으로 보낸 것은 아니로다(轉危為安見節義, 未必河山自我送)”는 정여창이 황해해전과 위해위(威海衛) 해전 초기에 위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안정을 찾으며,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한 의로운 절개를 의미한다. 동시에 북양함대의 전멸이 어쩌면 정여창의 전략 수립이나 전술 지휘상의 실수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김성탄 선생의 주석은 명백히 적중하지 못했다.
(계속)
원문위치: http://big5.zhengjian.org/node/42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