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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원만이야기(11) 왕원(王遠)

도가원만이야기(11) 왕원(王遠)

작가: 주월명 정리

【정견망 2002년 9월 30일】
왕원(王遠)은 자가 방평(方平)이고 동해 사람이다. 일찍이 효렴(孝廉)으로 천거 되었으며 낭중(郎中)을 거쳐 나중에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승진했다. 그는 『상서』, 『시경』, 『춘추』, 『예기』 등에 능통했고 또한 천문, 하도, 낙서, 및 각종 도참의 정수에 통달해 천하의 성쇠와 구주(九州)의 길흉화복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예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 관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득도했다. 일찍이 마고(麻姑)와 함께 채경(蔡經)의 집에서 만난 신선 왕원이 바로 이 사람이다.

한나라 효환제(孝桓帝) 유지(劉志)는 왕원이 득도했다는 말을 듣고는 몇 차례나 그를 궁으로 불렀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환제는 또 관리에게 명해 그를 강제로 입경시키게 했다. 그는 환제를 만나 시종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았으며 명령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궁궐 대문 위에 사백여 자를 적었는데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적었다고 한다. 환제는 매우 화가 나서 궁문 위의 글씨를 지워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표면의 글자를 막 지우자 판 위의 글자가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먹은 이미 완전히 나무 판에 침투해들어가 닦으면 닦을수록 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왕원은 자손을 남기지 않았지만 고향 사람들이 대대로 그를 공양했다. 같은 군에 이름이 진탐(陳耽)이란 태위(太尉 역주: 한나라 때 최고위 무관으로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가 있었는데 왕원을 위해 도관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절을 하며 그의 복을 빌었을 뿐 그에게 도를 배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왕원이 진 씨 집에서 40년을 머물렀는데 진씨 집 사람들은 모두 건강하며 아무도 병이 들거나 죽은 사람이 없었고 하인, 노비까지도 무사평안 했다. 또한 그 집은 가축조차 번성했으며 해마다 오곡이 풍성했다.

하루는 왕원이 갑자기 진탐에게 말하기를 “나의 기한이 이미 찼으니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수 없네, 내일 정오에 가야 하네.” 과연 다음날 정오에 왕원은 세상을 떠났다. 진탐은 왕원이 이미 신선이 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땅에 감히 묻지 않고 비통하게 곡을 했다. “선생님께서 저를 두고 가시면 저는 어떡합니까?” 진탐은 관을 만들어 향을 사르고 침대보를 이용하여 시신을 싸맸다. 삼일 째 저녁이 되어 시신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는데 그의 옷은 풀어지지도 않았고 뱀 껍질 마냥 탁자 위에 있었다.

(자료내원: 『태평광기』)

발표시간 : 2002년 9월 30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2/9/30/187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