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아혜(雅慧)
【정견망 2007년 1월 15일】
머리글
중국 이 대지는 자고로 또 “신주(神州)”라고 불리는데 그 배후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신주란 명사의 뜻은 신선이 있는 곳이고 신선이 인간세상이란 첫 정류장으로 내려왔음을 가리킨다. 신주라고 불리는 것은 이 토지가 잉태한 문화는 “신전문화(神傳文化)”임을 뜻하고 신이 세인에게 문화를 전해준 것임을 뜻한다. 신에서부터 온 문화는 물론 신기하고 오묘한 내포가 있다. 때문에 중문에서는 “신(神)”의 용법이 많고도 넓다. 예를 들어 예술은 “신운(神韻)”이라고 하고 “요사여신(料事如神 신처럼 일을 이해한다)”은 “신기묘산(神机妙算)”이란 뜻이며 “조심하다(留神)”, “기색(神色)” 등등 신전문화의 특징은 반신(半神)문화로서 하늘과 신을 존경하고 수련의 전통을 중시함이다. 문명이 시작되어 지금의 현대까지 지속되면서 여러 가지 영역에 관통되어 있는데 물론 또 역사의 도시와 읍속에서도 펼쳐진다.
신주대지가 잉태한 중화문화는 상하로 5천년을 관통하고 있고 도시 읍은 인류의 번성에 따라 발전했고 수십 왕조의 각가지 다른 건설을 겪어 그것들 각자의 특색을 형성했다. 도시와 읍은 역사를 위해 무대를 제공하는 동시에 자기의 존재와 예전의 휘황함을 위해 증거를 남겨놓았다. 단지 역사 대극의 무대만으로도 세인들은 많이는 단지 극중의 인물과 사건이 연관된 국부의 일면에만 주의하고 그 나머지 일체는 늘 역사의 탐조등 밖으로 떨어져 사람에게 소홀하게 되는 것이 유감이다. 도시 읍은 인류의 유기적 생명체와 같아 그것의 생로병사가 있고 자기 운명의 흥망성쇠도 있다. 본문에서는 신전문화의 각도에서 중국 도시 읍의 발전과 건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상고시기
중국의 역사단계 이전에 신주대지는 한 단락의 상고시기를 겪었다. 여기서 가리키는 삼황(三皇) 오제(五帝)가 천하를 다스리던 연대이다. 사료와 고고학 유물의 부족으로 이 시기에 나타난 인물사들은 대다수 신화전설로 여겨진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화전설”이 글귀를 “믿을 수 없다”의 동의어로 여기지 않고 실사구시적으로 글의 본의에서 본다면 사실 이런 논법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신화(神話)”가 가리키는 것은 신이 말한 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류가 대대로 구전으로 전해온 것은 “전설”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당시의 중국은 확실히 사람과 신이 공존하는 연대였다. 모습이 특이하고 천부적 재능을 지닌 전기적 인물은 본래 인류의 문화를 다져놓기 위해 신주대지로 와서 사람들에게 특정한 기능 혹은 진실을 전수한 상계 생명들이다. (주 1)
반고(盤古)가 하늘을 열고 여와(女媧)가 사람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반고는 신체를 산천하류로 변화했고 여와는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선조들의 사상에서 사람과 만물은 거의 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사람과 천지 만물 그리고 상계생명 간에는 반드시 모종의 연계가 존재한다. 신의 뜻에 따를 것을 희망하거나 혹은 자연의 규율을 모방하여 이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이는 인류 마음 속의 갈망이다. 중국인은 자고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란 사상이 있었는데 아마도 신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가장 먼저 인간세상에서 행한 신은 유소(有巢)씨라고 존칭되는 신이었다. 글자의 뜻은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의 사명을 표시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나무 가지로 간단한 집을 만들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 후부터 인류는 동굴에서 거주하는 생활환경과 활동범위의 제한에서 벗어나고 평원지역으로 이주했다.
3황은 일반적으로 수인(燧人)씨, 복희(伏羲)씨, 신농(神農)씨를 가리키는데 이 씨(氏)는 유소(有巢氏)씨의 씨와 같으며 모두 후세사람들이 존칭한 것이다. 씨의 원시적 의미는 신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삼황의 출현은 인류가 세 개의 부동한 문명단계로 진입한다는 뜻이다. 수인씨를 통해 사람들은 불 사용을 배웠고 더 나아가 익은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복희씨는 사람들에게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야수를 길들여 사람을 위해 일하게 했다. 신농씨는 사람들에게 농작물 재배, 독초와 약초를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후로 인류는 농업사회로 진입했고 사냥과 야생과일을 채집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어 음식 원천이 안정되지 않았던 생활상태서 벗어나게 되었다.
관련된 고적기록이 모자라, 이때의 취락 상황은 그저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적에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 고고학의 사전시기에 대한 분류로 볼 때, 3황이 나타난 연대는 중, 신석기 시대이다(1만년에서 5천년 전). 이 시기의 문화 특징은 집 건축의 기술을 발명하고, 개, 돼지, 양을 길들이는 법을 배우고 물고기 그물을 만들고 검과 화살촉 등을 제작하는 사냥공구를 만들고 도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굴생활을 벗어난 선조들은 평지에서 끊임없이 옮겨 다녔고 하류연안의 대지에 모여 살았다. 많은 군락지들이 고정적인 촌락을 형성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허난 치수이 연안에는 지금 15개의 현대촌락이 존재하는데 11개는 신석시기대의 유적 위에 건립되었다. (주 2) 황허 중류의 노관태(老官台)문화와 앙소(仰韶)문화, 저장의 허무두[河姆渡]문화 등은 전부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다.
현재 출토된 이 시기의 취락지 면적은 보편적으로 크지 않고, 연도가 오래된 취락지는 대다수가 원형 혹은 불규칙한 환형을 이뤘다. 후에는 점차적으로 장방형으로 변했고 장방형의 마을은 이로부터 중원의 가장 보편적인 도시형식으로 되었다. 마을이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변한 원인은 선조들의 “천원지방(天圆地方)”의 우주관에서 해석을 얻을 수 있다. 중국은 자고로 “천원지방”이란 논법이 있고 “하늘은 둥글기로 덮개 같고 땅은 장방형으로 바둑판 같다”(주 3)라고 여겼다. 5천년의 량저(良渚)문화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옥종, 옥벽은 “천원지방”의 관념이 문명의 초기에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고대 사람들은 땅이 장방형이라고 여기고 “천인합일” 관점의 영향 하에 지상에서는 마을이 장방형으로 형성되었는데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때 취락지의 변두리에는 아직 다 쌓지 않은 견고한 담벽이 있었는데 도랑과 도랑에서 파낸 흙더미로 만든 간단한 방어시설만이 있었다. 취락지 내에는 기능에 따라 토지사용을 분리한 흔적이 나타났고 일반적으로 거주지, 공용지, 묘지, 작업지 등이었다. 그 당시 취락지는 마을의 규모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는 도시 계획과 기능으로 구분한 흔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지난 80년대는 안후이 성에서 출토된 5500년 전의 릉가담 유적지가 있다. 릉가담의 총면적은 1.6평방킬로이고 한 갈래 대형 도랑을 도시를 보호하는 강으로 하였다. 도시 속은 3개의 토대를 경계선으로 하였고 세 가지 부동한 사용기능에 따라 나눴다. 하나는 주택지구였는데 집은 질서 있게 배열했고 또 한개 구역은 3천 평방 미터의 광장이었으며 유적지의 중심에 있었다. 그 위에는 궁실건설의 유적이 있었고 게다가 한 개의 우물이 있어 부족 집회의 장소였다. 다른 하는 장례지였는데 중간에는 제단이 있고 부장품에는 옥기, 석기와 도기 등이 있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농씨가 “사람들이 낮에 시내에 모여 교역을 하고 돌아가며 각자가 얻는 바가 있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허진(许慎)은 『설문해자』에서 “시(市)”의 해석을 “매매하는 곳. 시에는 벽이 있어 소개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농씨 시대에 (벽으로 둘러싸인)시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의 추측에 의하면 시는 통상적으로 수원(水源)의 주위에 있으며 우물은 거주민들이 물을 뜨러 오는 곳이며 그 위치는 항상 전체 성의 중심지에 있다. 날짜를 약정하여 교역을 진행하는 그 시각에 거주민들이 물을 뜨러 올 때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바꾼다. 신농씨 시대에 인류는 정착성 농목생활로 진입했고 양식은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또 남은 물건으로 교환을 진행하였는데 이로써 노동분업의 작업형태가 형성되었다.
3황 이후, 5제— 황제(黄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요(尧), 순(舜)–가 순서대로 천하를 다스렸다. 신이 점차적으로 더 이상 초상적인 능력으로 인류를 가르치지 않았고 사람에 가까운 행위 방식으로 인류를 위해 문명을 창조했다. 황제는 무력으로 난잡한 부족을 평정하고 각 부족의 수령에 의해 천하의 주인(共主)로 추천되고 “천자”로 봉해졌다. 즉 하늘의 아들로서 천명을 받들고 세간에서 행한다는 뜻이다. 천자는 사람과 하늘의 중간 단계였고 천자는 중간에 거주했다. 중은 상형문자로 서 깃발 하나를 바닥에 꽂은 것으로서 군왕은 대사를 만나면 깃발을 높이 들어 사방의 군민들에게 알려 모두들 깃발 아래로 달려와 명을 듣게 한다. “中”은 천자가 거주하는 곳을 가리키고 자연히 가장 숭고하다. 중을 존경하는 개념은 이로부터 중국 전통의 공간개념이 되었다(주 4).
천자가 거주하는 곳은 사해(四海)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사기. 헌원본기史記·軒轅本紀』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는 탁록산 아래에 수도를 정하고 또 “성읍을 쌓고 성 5곳을 만들었다”고 한다. 천자는 중간에 거주하고 이 모든 취락지 중에서 가장 숭고하고 존귀한 곳인데 “도(都)”라고 일렀다. 기타 군락은 “성읍”이라고 불렀다. 허진은『설문해자』에서 “도”를 “선군이 계시는 옛 종묘를 도(都)라고 한다”고 해석했다. “성(城)”의 해석은 “이로서 백성을 번성하게 한다”라고 해석하고, “읍(邑)”은 “국(國)이고 구(口)에서 시작한다. 선왕의 제도에서 존비(尊卑)에는 크기가 있으며 卪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성읍”의 고유한 뜻은 바로 도시국가란 뜻으로 매 한개 성은 바로 국가란 뜻이다. 성읍은 여전히 성주 신분의 존비에 의해 등급이 나눠진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황제시대에 마을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각 마을은 이미 규모와 등급이 나눠졌다.
『전국책. 조책3』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사람(古者)들은 4해 내에 있고 만국으로 나눠있었다. 성은 비록 크지만 300장(丈)이 넘는 것(者)은 없었다. 사람 수는 많아도 3천 호가 넘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록 현재는 이미 글귀 중의 “고대 사람(古者)” 이 도대체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지는 몰라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멀고먼 상고시기에 신주에는 만국이 공존했다. 그러나 “중국”이란 이 이론은 『사기집해』 류희(劉熙)의 해석에 따라 원래는 “제왕이 있는 곳을 중(中)이라 하며 그래서 중국이라 한다”.
황제는 비록 탁록산 아래에 도(都)를 정했지만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자신은 정착하지 않고 늘 사방을 순시하고 산을 열어 길을 만들고 신선을 찾아 도를 물었다고 한다. 황제가 공동산에서 도가의 광성자 그 쪽에서 수련의 방법을 얻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황제의 원신(元神)이 몸을 이탈하여 화서국(華胥國)에 놀러갔다. 화서국에 왕이 없지만 국민들은 소박하고 기호와 욕망이 없었고 삶 때문에 즐겁지 않고 죽음 때문에 비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사가 없었다. 그들은 사랑도 없고 증오도 없고 가깝고 먼 구별이 없었고 누구도 지지하지 않거니와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충돌이 없고 투쟁살육이 없었다. 그들은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가라앉지 않았고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것이 평지에서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구름 속에 꿈 꾸는 것이 마치 침대에서 자는 것과 같이 평온했다. 황제의 원신이 육체로 돌아온 후 그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무위여야 사람마음이 착해져 천하는 자연스럽게 태평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로써 무위의 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이 도덕규범을 지키도록 이끌어 만천하가 평온해졌으며 화서국과 흡사했다.
황제가 100년간 재위하고 기원전 2598년에 산 아래에 단로를 설치하여 단을 만들었고 단이 완성되자 하늘이 열려 신하들과 함께 용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고 한다. 황제가 남겨놓은 수련사상과 과정은 중국 이후의 수천년의 정신문명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청정무위에서 원만 회승까지, 반본귀진은 염황자손이 동경하는 최고의 경지가 되었다. 수련의 정신도 중국문화의 정수로 되었다.
황제 이후의 4제 모두 황제의 후손들이고 그들은 모두 황제의 무위의 원칙에 따라 천하를 다스렸다. 몸으로 일하고 덕을 중히 여기고 선하게 행하며 백성을 가르쳤기 때문에 모두 현명을 후세까지 남길 수 있었다. 5제의 최후의 후손이 순(舜)인데 순은 효성과 예지로 천하에 이름을 날려 사람들은 그의 덕행을 경양하고 모두 달려와 의지했다. 『사기. 5제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순이 거주한지 일년에 취가 되고 2년에 읍이 되고 3년에 도가 되었다. “고 하는데 뜻은 순이 거주하는 곳은 일년에 취락지를 형성하고 2년 이후에는 도시국가로 변하고 3년 뒤에는 수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한 도시의 탄생은 각종 인연에 의해 촉성된다. 예를 들어 교통 요새지, 군사 중요지 혹은 경제중심에 위치한다. 그러나 상고시기에는 한 사람의 인품으로 백성이 자동적으로 모이게 할 수 있었는데 이는 고금중외에서 유일무이한 기적이다. 공자는 『예운대동편』에서 “대도지행”의 “대동세계”를 찬탄할 때 묘사한 것이 아마도 이 시대일 것이다.
순은 50년 재위 후 왕위를 우에게 주었고 우는 하나라의 창시자이다. 하나라부터 중국인은 역사시대로 들어갔고 성읍 발전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참고자료
1) 심연의《상하 5천년》의 창세기사, 정견망
2) 동감홍 편《중국도시 건설발전사》,제 4페이지
3)《진서천문지(晋书天文志)》
4)《중국문자에서 전통건축을 탐구 토론》,제18페이지
발표시간:2007년 01월15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7/1/15/418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