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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유유:큰일에 우유부단하지 않았던 여단

작자 : 예질명(艾佚名)

[정견망]

여단(呂端 935∼1000년)은 자(字)가 이직(易直)이며, 송나라 유주 하북 사람이다. 관직은 성도지부(成都知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나주에 재상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 태자태보(太子太保)를 마지막으로 사직했다. 그는 매사를 대국(大局)적 차원에서 일을 처결하고 인식하는 깨끗하고 단순한 성품의 소유자다. 한 때는 고려와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해서, 내정은 물론 외교에서도 많은 성과를 얻었다.

여단이 처음 벼슬을 했을 때 관운이 좋아 승진을 하여 자주 임지를 바꾸어 다니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과정에서 아무리 순탄치 못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더라도 모두 진지한 자세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설사 태종황제가 조서(詔書)를 보내 그에게 죄를 묻겠다고 했을 때조차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위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은 마땅히 정직하고 도량이 커야 하며, 이런 저런 말들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신은 직설적으로 말하고 올바로 행하니 두려할 것이 없고, 풍파를 일으키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서령 조보(趙普)가 그를 매우 중시하며 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여공이 일하는 것을 보니 상을 받고도 기뻐하지 않고, 좌절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언제나 말에는 변화가 없으니 정말 보좌를 잘하는 그릇입니다.”하고 그의 인물됨을 평했다.

당시는, 북방의 요(遼)나라가 빈번히 침입하고 자주 관문을 소란하게 하는 시기였다. 여단은 초기에 요나라 침범에 대항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직언을 잘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 구준(寇准 961∼1023)의 지략에 탄복을 하여, 태종에게 자신이 구준의 수하로 기꺼이 가겠다고 청했다. 태종은 큰 이치를 알고 대국적 견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단에게 감동해 그를 재상으로 승진시키려 했다. 그러자 어느 신하가 “여단은 우유부단한 인물입니다.”하고 만류했다. 그러나 태종은 “여단은 작은 일에는 분명치 못할 수도 있지만, 큰일에는 그렇지 않소.”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태종이 후원에서 군신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열었다. 그는 재상 여몽정(呂蒙正)을 면직시키고, 여단에게 재상직을 맡기려고 했다. 그래서 낚시에 관한 조어시(釣魚詩)를 지어 흥을 돋우었는데,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낚시바늘이 깊이 도달하지 않게 하려면 모름지기 반계에서 낚시꾼에게 물어야 하리(欲餌金鉤深未達,磻溪須問釣魚人)” 며칠 후 태종은 마침내 여단을 재상으로 발탁하여 임명했다.

여단은 재상이 된 후 정치에 더욱 겸양하고 격을 지켰다. 그는 구준의 위인됨이 책임감이 있고 충직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함께 국사를 논할 때는 항상 공손하게 대하며, 늘 그에게 먼저 의견을 제시하도록 했다. 그래서 여단과 구준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잘 융합되었다.

한번은 여단이 구준의 보고를 받았는데 내용은, 어떤 장수가, 변방인 서수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계천(李繼遷)의 노모를 잡았는데, 그녀를 죽여 분풀이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여단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보고 태종에게 직접 품하여 경위를 설명하였다. “지난 날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잡아 끓는 물에 삶아 죽이려고 했을 때, 유방이 말하기를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누어 주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무릇 대사를 일으킬 때는 친족은 돌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계천은 패역자인데 그가 어찌 친족 같은 걸 돌볼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이계천의 노모를 연주(지금의 陜西 延安)에 머물게 한 후 잘 먹고, 잘 살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이계천이 투항할지도 모릅니다. 설사 투항하지 않더라도 아마 그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노모의 생사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태조는 듣고 나서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만약 경이 아니었더라면 짐은 대사를 그르칠 뻔했소!” 그 후 얼마 안 되어 이계천과 그의 모친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이계천의 아들은 송나라가 자기 조모를 돌봐준 것에 대해 감격하여 마침내 투항했다.

지도(至道) 3년(997년) 송태종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총관 왕계은(王繼恩)이 이창령, 이계훈, 호단 등과 모의해 사람들을 규합해서 황태자를 폐위하고 초왕(楚王)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송태종 사후 이황후(李皇後)가 왕계은에게 지시하여 즉시 여단을 입조하라고 했다. 여단은 큰 일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황후의 전갈을 갖고 온 주모자 왕계은을 자기 집에 연금시키고 나서 입조하여 황후를 뵙고 자신이 직접 태자를 맞아 제위에 오르게 했으니 이가 바로 송 진종(眞宗)이다. 여단은 왕위를 찬탈하려던 간사한 무리들을 차례로 유배시켰다. 이렇게 하여 큰 반란을 사전에 피할 수 있었다.

함평(鹹平) 10년(1000년) 여단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사공(司空) 벼슬을 추증하고 호를 정혜(正惠)라 했다. 후일 송사(宋史)를 저술할 때 이렇게 평했다. “여단은 재상으로 구준과 함께 지냈으나 늘 구준을 앞세웠으며, 이계천의 노모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그리고 진종이 황제가 된 것은 바로 그의 큰 계책 덕분이었다. 태종이, “여단은 큰일에는 우유부단하지 않다.” 고 한 것은, 신하가 임금을 넘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하며 여단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출처 – 송사(宋史)

발표시간 : 2011년 8월 4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8/4/764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