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신선이야기: 시로 휘종을 경고한 신선

작자: 운개(雲開)

[정견망] 북송(北宋) 선화(宣和) 연간(1119-1125년)의 일이다. 한번은 휘종(徽宗) 황제가 경성에서 도교(道敎)를 위한 재(齋)를 거행했다. 전국에서 1천 명 도사를 부르기로 했으며 이름을 ‘천도회(千道會)’라고 했다.

모임 날이 되어 도회에 참석하는 인원을 세어보니 999명이 왔는데 딱 한 사람이 모자랐다. 바로 이때 재를 올리는 대문 입구에 얼굴에 온갖 부스럼이 나고 피부가 매우 거친 추한 모습의 도사가 도착했는데 마당 안으로 들어와 재를 올리겠다고 했다. 문지기들이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극력 저지했다. 당시 휘종은 마침 대전 내에서 사람들과 도교의 일을 담론하고 있는데 한참 흥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 누추한 도사는 갑자기 대전 밖 계단 아래에 나타났다. 휘종은 이를 보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사람들에게 얼른 그를 재를 올리는 재당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이때 도사는 옷소매로 대전의 기둥에 한번 쓱 문지르고는 시종들을 따라 재당으로 올라갔다. 휘종은 이 도사의 거동을 다 보고 매우 기괴하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켜 기둥 앞에 가서 관찰했더니 기둥에 하얀 가루로 한수의 시가 씌어 있었다.

거창한 이야기 하느라 사람을 못본 척하니
명군이 진인(眞人)을 못 만남이 애석하구나
폐하는 신하에게 내일 일을 물어보고
오미병정(午未丙丁) 봄을 알아보기 바라네

휘종은 시종에게 명해 그 누추한 도사가 재밥을 먹은 후 불러서 만나보려 했다. 그러나 그 도사는 법을 먹고는 곧 보이지 않았다. 휘종은 그가 선인임을 알았으며 그를 만나지 못해 마음이 울적하고 즐겁지 않았다. 나중에 정강(靖康) 연간(1126-1127년)에 금나라 군대가 침입해 두 번이나 북송의 도성을 포위하고 최후에는 휘종, 흠종이 포로가 됐으며 북송은 여기에 망하게 된다.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이라고 부른다. 이 두 해는 천간지지로 따지면 바로 병오, 정미년이다. 이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추한 도사가 시에서 쓴 내용을 이해했다. 바로 북송이 정강지치를 당해 망할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발표시간: 2012년 8월 12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2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