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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수련이야기: 왕중양이 사람을 제도하려다 실패

작자: 운개

【정견망】

금나라 세종(世宗) 대정(大定) 7년(서기 1167년)의 일이다. 왕중양(王重陽)이 도를 전파하다 소(蘇)씨 성을 가진 도사를 만났는데 도를 닦을 자질이 상당히 좋은 것을 발견했다. 왕중양은 당시 온갖 어려움을 겪던 가난한 도사에 불과한 반면 소(蘇)도사는 종교 중에서 일반적인 신분이 아니었고 도교의 작은 문파의 전인(傳人)이자 교주였다. 그는 또 이미 여러 개의 도관(道觀)을 관장하고 있었고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 문파는 주로 병을 고쳐주고 액을 막아줄 뿐 사람을 제도하지는 못했다. 왕중양은 이 점을 알고 그를 제자로 거두고자 했다. 이렇게 좋은 자질을 지닌 사람이 소도(小道)에 길을 잃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애석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왕중양은 여러 번 그를 점화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종교 중에서 자신이 지닌 명리(名利)를 버리고 왕중양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결국 한수의 시를 지어 그가 알아보기를 희망했다. 그 시는 매우 직설적이고 이해하기 쉬웠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

… 사해에 명예가 먼저 왔구나. 명성이 있으면 현묘한 도와는 거리가 멀다네. 타고난 선골이 아깝구나. 늙으면 공으로 돌아갈 것이니. 그리 오만하니 어찌 현묘한 도를 알랴….

소도사가 이 시를 본 후 비록 그 의미를 알았지만 자신의 자그마한 성취와 종교 중에서의 명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또 다시 거절했다. 왕중양 역시 탄식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왕중양이 도교 전진교(全眞敎)를 창립하고 천하에 이름을 떨칠 때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될 수 없었다.

소 도사는 나중에야 자신이 진귀한 기연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왕중양이 이미 신선이 되어 떠나간 후였다. 기록에 의하면 결국 그는 종교 중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는데 최종행방은 모른다고 한다. 그가 산속에서 찾고자 한 것은 오직 진정으로 그를 제도할 수 있는 고인(高人)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한번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찾아올 수 없었다.

우리는 역사를 거울로 삼아 옛사람에게 발생했던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재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파룬궁은 불가(佛家)의 최상승(最上乘) 수련 공법으로서 극히 위대한 불법(佛法)이다. 파룬궁의 전파는 중생에게 있어 실로 가장 진귀한 기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 중의 일부 사람들은 마치 과거 소 도사가 그랬던 것처럼 종교 중의 것을 버리고 파룬궁 수련생이 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정치승려는 종교의 깃발을 들고 파룬궁을 비방해 큰 죄를 저질렀다.

사실 어떤 바른 믿음(正信)도 모두 이런 마난을 겪었다. 왕중양이 창립한 전진교 역시 마난을 겪었다. 이런 것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직 종교 중의 사람들이 파룬궁을 비방하는 요언을 듣지 말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파룬궁이 알리려는 진상을 경청해 소 도사처럼 기연을 놓치지 말고 유감을 남기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발표시간: 2012년 10월 10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3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