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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 폭정은 멸망에 이르게 한다

작자: 나의(羅義)

【정견망】

진시황(秦始皇)은 만년에 각지를 순행하기를 즐겼다. 이렇게 하면 각 지방의 상황을 잘 알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두루 유람도 할 수 있었으니 한마디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었다. 그러니 어찌 그것을 즐기지 않겠는가?

한번 그가 회계(會稽) 지역을 순시하려고 승상(丞相 역주: 조선의 정승이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최고위관직) 이사(李斯), 중차부령(中車府令 역주: 지금의 비서실장 및 경호실장에 해당) 조고(李斯 환관)가 함께 했다. 또 평소 노는 것을 좋아하던 작은 아들 호해(胡亥)도 함께 따라가려 했다. 진시황은 마침 기분이 좋아 그러라고 답했다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회계까지 가려면 아주 먼 길이었다. 7월이 되어 그들이 사구(沙丘 지명)에 도착했을 때 진시황이 병이 났다. 아울러 증세도 갈수록 심해졌다. 진시황은 자기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조고를 불러 조서를 적게 한 후 큰 아들 부소(扶蘇)에게 주라고 했다.

부소는 진시황의 큰 아들로 이전에 진시황의 미움을 받아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조서에서 진시황은 부소더러 병권을 몽념(蒙恬)에게 넘기고 신속히 함양으로 돌아가 자신의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이 조서를 막 쓰자마자 아직 사자에게 주기도 전에 진시황은 죽었다. 조서와 옥새는 모두 조고의 손에 있었기에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당시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이사, 호해 등 몇몇뿐이었다. 조고는 더욱 큰 권세를 잡기 위해 먼저 호해와 이사를 설득하여 진시황의 이름으로 조서를 위조하여 이렇게 썼다.

“호해는 사람됨이 효성스러우니 그를 태자로 세운다.”

조고는 자신들이 함양에 돌아가면 부소가 군사를 일으켜 대항할까 두려워하여 진시황의 명의로 또 하나의 조서를 썼다. “부소는 부친에게 불효하여 칼을 내리니 이 칼로 자진하라.” 부소는 비록 죽고 싶지 않았으나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자결하고 만다.

이렇게 되어 매우 무능하고 경험이 없는 호해가 뜻밖에 황제가 되었으니 바로 진2세(秦二世)다. 조고는 천자를 옹립한 공으로 낭중령(郎中令)에 봉해졌고 이때부터 조정의 일체의 정사를 가지고 놀았으며 전횡을 부렸다.

호해는 부친과 같은 능력이 없었지만 부친의 포악함을 많이 배웠다. 그는 다른 사람이 그의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대장군 몽념, 몽의 형제 및 그들의 열 두 아들을 함양 시장에서 참수하고 그들의 딸들을 능지처참했다. 또 이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했다. (그중 다수는 간신 조고의 꼬드김에 의함) 이렇게 통치 계급 내부에서 사람들은 위험한 경지에 처했음을 느끼고 모두들 공포에 싸여 있었다.

호해는 귀족에 대한 공포수단을 백성들에게 확대하여 압박을 가했다. 인민 군중으로 하여 이 새 황제는 이전의 포악한 진시황보다 더 못함을 느끼게 했고 감당할 수 없게끔 했다.

얼마 안되어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이 대택향(大澤鄉)에서 반역의 깃발을 치켜들자 전국 각지에서 앞다퉈 호응했다. 진이세의 통치는 더욱 위험해졌다. 조정 대신들, 특히 간사한 소인배들은 정권이 곧 멸망할 것임을 알고 매우 두려워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사기 이사 열전》이다.

발표시간: 2014년 3월 25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28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