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진필겸(陳必謙)
【정견망】
역주: 이 글의 저자 기효람(1724-1805)은 청나라 때의 저명한 문인이자 대학자이며 높은 관직을 역임했다. ‘열미초당필기’ 등을 저술했다.
‘원하는 대로 얻은’ 네 남자 이야기
나(기효람이 자신을 칭함)의 문하생 중 오종교(吳鍾僑)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여원소전(如願小傳)》 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문장의 교훈적인 의미가 깊고 생동감이 있다. 나중에 오종교는 사천(四川) 모 지역 현령으로 발령났는데 “금천(金川)” 반란 때 토벌군의 무기운반 책임을 맡았다 불행히도 중간에 사망했다. 아래는 《여원소전》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여원(如願-‘원하는대로 된다’는 뜻)은 바닷속 용궁의 여신이다. 다시 말해 옛날 팽택호(彭澤湖) 용왕 청홍군(清洪君)이다. 여릉(廬陵) 사람 구명(歐明 역주: 수신기에 관련 내용이 있음)이 데려 갔다는 바로 그 여원이다. 그녀는 매사에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원란 이름을 얻었다. 듣는데 의하면 바다속의 곳곳에 이 여원이 있는데 아무나 만날 수 없고 각자의 복에 따라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일찍이 남자 4명이 있었는데 함께 신선과 도를 구했다. 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온갖 고생을 겪은 후 마침내 용왕을 만났다. 용왕이 그들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정성으로 도를 구하니 오늘 내가 여원을 한명씩 붙여 줄테니 데려가게나.” 하며 4명의 여자를 불러 그들과 동행하게 했다.
그중 한사람은 여원과 함께 살면서 무릇 원하는 것마다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매우 편안하고 만족했다. 그러나 불과 몇달이 지나지 않아 중병에 걸렸고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원이 말했다. “당신이 금생에 누린 모든 것은 모두 전생에 쌓은 것입니다. 겨우 몇 달만에 다 써버렸으니 당신의 복은 이미 소진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돌아갈까 합니다.” 과연 며칠 후 이 남자는 숨이 끊어졌다.
다른 한 사람은 역시 구하는 것마다 다 얻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만족할 줄 몰랐다. 엄동설한에 수박만한 여지를 먹고 싶어 했다. 여원이 말했다. “산간계곡 이 가득차도 당신의 탐욕심은 오히려 만족할 때가 없군요. 이렇게 과분한 요구는 신이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작별하고 떠나버렸다.
세 번째 사람은 여원에게 요구하면 구해줄 때도 있으나 구하지 못할 때도 있었기에 여원을 미워할 때도 있었다. 여원이 말했다. “신의 힘에도 차별이 있고 같지 않습니다. 저의 신력이 유한하여 어떤 일은 할 수 있지만 어떤 일은 하지 못합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가 하늘의 태양은 정오가 되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이 차면 기울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만족하는 점 만족하지 못하는 점도 있는데 복을 좀 남겨놓아야 오래갑니다. 당신은 나의 두 언니가 이미 그들을 떠나갔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는 여원의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그래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네 번째 사람은 비록 여원과 함께 살았지만 그는 여원에 대해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오히려 여원이 늘 자발적으로 그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늘 이마를 찌푸리며 불안해했다. 여원이 말했다. “당신은 도가 높아 복이 많은 분이예요. 이 일체는 천지가 다 비추고 신명이 보우합니다. 구하는 바가 없어도 얻으며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누리는 것은 모두 당신 자신이 현재 이미 있는 복이며 제가 처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몰래 당신을 도울 뿐입니다.”
날이 좀 지나 살아 있는 세 남자가 서로 만나 각자 자기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그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하며 또 감탄하기도 했다. “애석하군, 우리 중에 이미 죽은 그 친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다니 말이야”
–독자 여러분들이 보기에 위 네 남자 중 누가 가장 행복한가?
2. 힘을 믿고 설치다 망한 이야기
우리 마을에 정일사(丁一士)란 사람이 있다. 그는 매우 건장하고 행동이 민첩한데다 무술과 경공을 연마해 이삼장 높이의 건물도 뛰어오르고 이삼장이 넘는 곳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를 본적이 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그의 솜씨를 한번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나더러 마루에 서서 앞문을 향하여 서 있게 하고 그는 문밖에 서서 나와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몸을 후문 쪽으로 돌렸을 때 이미 그는 진작 후문 밖에 서 있었다. 이렇게 7-8회 반복했는데 내가 방향을 트느라 좀 어지러웠으나 그는 오히려 행동이 자유로웠다. 살짝 몸을 뛰어 오르기만 하면 건물의 용마루를 훌쩍 넘을 수 있었다.
나중에 정일사는 두림진(杜林鎮)이란 마을을 지나다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그를 개울가에 주점으로 초대하여 술을 마시자고 했다. 그들은 술기운이 오르자 강변의 경치 구경을 나섰다.
친구가 “자네 저 강을 건널 수 있나?”라고 말하자 정일사는 즉시 강을 뛰어 넘었다. 친구가 그에게 손짓하여 돌아오라고 하자 또 몸을 날려 돌아왔다. 그러나 발이 막 딸에 떨어지자 뜻밖에 강물이 언덕으로 밀려와서 원래 좀 균열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가 잘못 디뎌 언덕이 갑자기 2-3척 넓이로 무너졌다. 정은 그래서 강물 속으로 쓸려가게 되었다. 그는 비록 무예가 높지만 물에는 약했다. 그는 의연히 파도 중에서 몇 척이나 뛰어올랐으나 언덕으로 달할 만큼 뛰지는 못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가 힘이 빠져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아 슬프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재앙은 제 힘을 믿고 뽐내는 것이다. 재산을 믿는 자는 반드시 재산으로 인해 화를 초래하고 권력에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권력으로 실패한다. 또 지모(智謀)에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지모로 망하고 힘에 의지하면 결국 힘으로 위험에 처한다. 무릇 의지할 데가 있기에 모험을 감행하고 모험을 감행하므로 세력이 다하면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다.
3. 승려와 계율
우선 한 비구니부터 말해보자.
창주(滄州) 첨수정(甜水井) 지역에 한 노비구니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혜사부라고 불렀다. 이게 그녀의 본명인지 법호인지 또는 정말 ‘혜(慧)’자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렇게 불렀다.
내가 어렸을 때 이 혜사부는 우리 외조부인 장설봉(張雪峰) 댁에 출입했다. 그녀는 계율을 지키는데 극히 엄했으며 평범한 사탕과자도 먹지 않았다. “그 사탕과자는 돼지기름이 좀 들어있어!” 겨울에 모피 안감을 댄 옷을 입지 않았는데 “모피를 입으나 고기 먹는거나 별 차이가 없어!”라고 했다. 여름에 비단 옷을 입지 않으며 말했다. “비단 한필을 짜려면 수천마리 누에를 희생시켜야 해!”
무릇 부처님께 올리는 국수재료는 모두 직접 만들며 말했다. “시장에서 파는 면은 가공할 때 모두 발로 밟아 만들어.” 향을 올릴 때 반드시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데 말하기를 “부엌에서 가져온 불은 깨끗하지 못해.” 재계를 깨끗이 하고 하루 한끼만 먹었다. 생활에 소박하고 만족할 줄 알아 한번도 동냥이나 기부를 받으려고 바삐 다닌 적이 없다.
외조부 댁 여종이 혜사부에게 포목 한필을 희사한 적이 있다. 혜사부는 이 포목을 오래 잘 간직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보시는 반드시 자기의 재물로 해야 공덕이 있다. 그 댁에서 이 포를 잃어버려 일찍이 몇 명의 어린 여종이 무고하게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다. 불보살이 어찌 이런 보시를 받을 수 있는가?”
여종은 그녀의 말을 듣고 속일 수 없음을 알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당초 저는 주인어른께 수십 필이 있으니 일일이 검사하지 않을 줄 알고 한필을 가져갔습니다. 뜻밖에 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심하게 맞고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욕했으므로 저는 마음이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이 포를 꺼내어 보시를 하여 참회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혜사부는 이 옷감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기왕지사 이리 된 거 원래 있던 곳으로 몰래 돌려놓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누명을 벗고 자네도 안심할 것이 아닌가?”
이 일을 혜사부는 줄곧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으며 제자들에게도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몇 년이 지나 이 여종이 세상을 떠날 때 혜사부의 제자가 이 일을 알려 세상에 노출된 것이다.
그러다 청나라 건륭 갑술(1754년), 을해(1755)이 되자 혜사부의 연세는 이미 7-80세에 달했다. 어느 날 우리 집을 지나간 적이 있는데 담척사(潭柘寺)에 가서 예불을 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어린 비구니에게 계율을 지키라고 했다. 내가 우연히 여종의 보시에 관한 일을 묻자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 일이 아니다, 어린 비구니들의 헛소리를 듣지 말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혜사부의 인품에 서로 쳐다보며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떠날 때 혜사부는 나에게 불전(佛殿)에 편액을 하나 써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조춘간(趙春簡)에게 대신 쓰라고 했다. 그녀는 합장하며 염불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 시주께서 쓰시니 그 분의 존명을 부탁합니다. 불전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요.” 그래서 낙관을 조춘간의 이름으로 바꾸어 찍은 후 혜사부는 비로소 기뻐하며 가지고 갔다.
이때 이후 그녀는 다시 온 적이 없다. 최근 나는 창주인에게 그녀의 근황을 물었더니 이미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번에는 다른 승려를 말해본다.
경성(景州) “천제묘(天齊廟)”에 한 승려가 있었는데 주지인 과성(果成)화상의 셋째 제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친근하게 “삼사부”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그의 진짜 법호를 잘 몰랐다.
과성화상의 제자는 매우 많아 그중 상당수는 형편없었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탁발했다. 오로지 이 삼사부만이 스승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는 어느 큰 사찰의 접대를 담당하는 지객사처럼 돈이나 재물, 겉모습으로 사람을 엿보는 세속의 기운이 없었다. 또 어느 선사처럼 자칭 높다고 하는 오만한 기운도 없었다. 그는 불문의 깨끗한 계율을 지켰는데 비록 천리길도 짐을 지고 걸으며 결코 마차나 수레를 타지 않았다. 한번은 이제는 돌아가신 큰 형 청호를 도중에 만났는데 재삼 수레에 타고 동행하자고 해도 그는 결코 수레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방 관리가 절에 오면 삼사부는 결코 특별대접하지 않았다. 시골 농부가 절에 와도 삼사부는 예의로 대하며 결코 보통 사람 못지않게 대했다. 보시를 많이 하건 적게 하건 혹은 안하던 삼사부가 사람을 대하는데 모두 평등하다. 매일 참선 염불 외에 여가 시간에 단정히 자기 방에 앉아 있으며 절에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삼사부의 행동거지는 이렇게 한결같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골의 남녀노소는 그의 도행이 깨끗하고 높음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도행이 어디에 표현되는가? 어디가 깨끗한가? 물으면 그들은 망연하게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 그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선친 도안공(姚安公)에게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다.
부친은 “네가 본 바 이 삼사부는 깨끗한 곳이 부족하던가? 깨끗하지도 않은 것도 아니고 높지도 않음도 없으니 정말 깨끗하고 높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상 언급한 비구니, 스님 각 한분은 불문중에서 특출한 사람으로 칠 수 있다. 삼사부가 원적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의 법명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내가 향시에 참가한 손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들에게 경주 천제묘에 가서 자세히 물어보라고 했다.
출처: 《기문달공필기(紀文達公筆記)》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2014/12/07/138823.酌古鑒今:各有“如意”女的四個男人,結果如何?(三文).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