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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전설: 해타산(海陀山)의 전설

작자: 안진(顏真)

【정견망】

하북성 회래(懷來), 적성(赤城) 및 북경 교외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우뚝 솟은 큰 산이 있고 이 산맥을 따라 수십여 개의 마을이 자리한다. 이 산이 바로 유명한 해타산(海陀山)으로 옛부터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전설 1: 왕차중이 예서를 창시

사람들은 창힐(倉頡)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하고 서예를 말하면 모두들 왕희지, 유공권(柳公權), 안진경(顏真卿) 등은 알지만 왕차중(王次仲)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 한자는 읽고 쓰기가 아주 어려운 전서(篆書)부터 예서(隸書)로 변모했다. 이를 가장 먼저 한 사람이 왕차중이다. 회래, 선화, 적성 일대에는 지금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내려온다.

왕차중은 상곡 저양(지금의 회래현) 사람이다. 그의 부친은 연(燕)나라에서 서찰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대부들이 다음날 조정에 상주하는 문안을 작성하느라 늘 밤을 새야 했다. 차중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늘 옆에서 부친을 돕곤 했다. 이미 5,6세부터 꽤 많은 글자를 알았다.

어느 날 심야에 차중이 달콤하게 잠이 들었는데 간간히 기침소리가 들려 깨었다. 그가 기어일어나 보니 부친이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눈이 쑥 들어간 모습에 허리를 굽히고 긴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책상에는 글을 새기기 위한 칼과 죽간이 놓여 있었다. 일찍 철이 든 차중은 얼른 아버지에게 다가가 허리를 두드려 드리며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님, 이 글자를 죽간에 새기시려면 정말 힘든데 어떻게 일을 좀 더는 법을 생각하지 않으세요?”

부친은 탄식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아야, 이 글자는 창힐로부터 만든 것으로 몇 대를 내려와도 큰 변화가 없는데 내가 어찌 바꿀 수 있겠느냐? 어렵구나!”

“일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에요. 아버님께서 글자를 좀 간단히 하시면 일을 덜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친은 놀라서 6살 난 아들을 쳐다보았다. 이 어린 아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매우 기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군대가 밀어닥치고 있어 우리나라가 아주 위험에 처해 있는데 아빠 같은 사람은 하지 못한다. 너는 아직 어리지만 이렇게 큰 뜻이 있으니 장래에 반드시 크게 되겠구나.”

이때부터 부친은 의식적으로 그에게 본격적으로 글쓰는 법을 가르치며 아울러 해독하고 획을 긋는 등의 상세한 내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날이 가고 해가 가서 부친의 훈도하에 차중은 십대에 이미 주변에서 이름난 문인이 되어 있었다.

왕차중은 날마다 새로운 글자체 만들 것을 모색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명사의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몇년의 시간 동안 연구해도 좋은 비결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해도 두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봄 날 그가 강가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한바탕 비를 맞았다. 비가 지나간 후 온 천지가 깨끗해졌다. 그는 진흙을 물고 있는 몇 마리 제비를 바라보다가 가위 같이 생긴 꼬리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며 흥미가 일었다. 이때 차중은 정신이 나가서 생각했다.

‘이 제비의 자세가 너무나 보기 좋구나. 내가 한번 그려보았으면!’

그래서 나뭇가지를 주워 바닥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다 보니 땅의 돌멩이가 자기 손의 막대기에 걸렸고 힘을 너무 크게 써서 밀짚자루가 부러졌다. 그래서 제비꼬리의 윤곽이 반쯤 망가졌다. 차중은 매우 아까웠다. 그래서 고개를 굽히고 다시 그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번 실수로 그린 횡선과 반쯤 남은 제비꼬리가 마치 기이한 그림을 이룬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매우 기뻐했으며 이때부터 획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서체의 가로획이었다.

또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뽕잎을 따와서 그에게 누에에게 먹여주라고 했다. 차중이 뽕잎을 한바구니 들고 작은 바구니에 쏟았는데 문득 “사사” 하는 소리가 들려 차중이 쳐다보았더니 통통하고 살찐 누에가 기어가고 있었는데 매우 재미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깨달았다.

‘만일 쓰는 글자가 누에처럼 이렇게 굼뜨고 살이 찌면 얼마나 힘이 있을까!’

그래서 그는 이때부터 누에대가리에 제비꼬리같은 서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오랜 연구를 거쳐 마침내 간결하여 쓰기 좋고 소탈한 새 글자체를 만들었다.

당시 보는 사람마다 다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왕차중 자신도 우쭐거리기 시작해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교만해지는 것을 보고 일부러 불평했다.

“차중아 공이 십이분(120%)이 되어야 진정 순수해지는데 네가 쓴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느냐. 무슨 공부도 아니고 하늘 높은줄 모르는 구나.”

차중은 이 말에 매우 부끄러워했다. 이후 자신이 더 오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진일보로 예서를 더 잘 만들었으며 이런 서체를 “팔분체”라고 불렀다. 왕차중이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명성이 전해지자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잇달았으며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 이때 왕차중은 이상한 기질이 있었는데 무릇 백성들은 오는 자를 막지 않았으나 진(秦)나라 조정의 관리가 오면 반드시 밖에서 거절하며 일체 만나지 않았다. 이때 진시황은 마침 매일 수레 몇 대나 되는 공문을 다 보느라 근심에 쌓여 있었다. 상곡군에 어떤 사람이 글자를 간단히 하고 새 서체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입조하여 관직을 맡으라 했다. 왕차중은 이 말을 듣고 즉시 병을 핑계로 피했으며 진시황의 사신이 세 번이나 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진시황은 보고를 들은 후 대노하여 대전에서 성지를 전하면서 말했다.

“이런 괘씸한 선비 녀석 너무 지독하구나. 좋은 술을 권해도 안마시니 벌주를 마셔야 하겠구나. 당장 그자를 잡아오렷다!”

병사들이 즉시 상곡현으로 달려가 왕차중을 체포해 수도인 함양성으로 압송했다.

병사들이 수레를 압송하여 끌고 가는데 낮에는 메고 밤에는 야숙하며 해타산 아래에 도달했을 때 막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왕차중이 갑자기 한 마리의 큰 붕새로 화하여 철창 수레 틈으로 빠져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급히 활을 쏘았으나 대붕은 날개를 휘이 저어 화살을 다 떨어뜨렸다. 사병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 대붕은 쉬익 하는 소리를 내며 날개를 흔들더니 두 개의 깃털을 떨어뜨리고는 멀리 날아갔다. 깃털이 떨어진 후 하늘 높이 솟은 두 산봉우리로 변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두 빼어난 산봉우리를 대핵산(大翮山)과 소핵산(小翮山)으로 불렀다. 대핵산 정상에는 아직도 사당이 남아있는데 바로 왕차중의 사당이다. 1600여 년 전의 지리학자 리도원(酈道元)은 《수경주(水經注)》에서 이렇게 썼다.

“해타산 동쪽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높고 첩첩산중에 구름을 뚫고 안개를 가른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차중은 창힐의 옛글을 예서로 바꾸었으며 진시황이 세 번이나 불러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진시황이 노해 압송명령을 내렸다. 왕차중은 압송 도중 큰 붕새로 변해 공중으로 날아갔으며 깃털 두 개를 이 산에 떨어뜨렸다. 이런 까닭에 그 봉우리를 대핵, 소핵이라 부른다.”

(적성 지방의 민간전설에 근거)

http://www.zhengjian.org/2015/04/28/145076.民間傳說:海陀山的傳說.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