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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지>의 대인과 소인 기록

작자: 우해심

【정견망】

대인과 소인의 기록을 말하기 전에 우선 고대의 길이단위인 ‘장(丈)’에 대해 말해보자. 《사기. 우본기(禹本紀)》에서 우임금은 자신의 몸을 한 장으로 정하고 그것의 십분의 일을 한척으로 했다. 그렇다면 한 장을 지금의 길이로 환산하면 약 1미터 70정도다. 만일 방풍씨의 키가 십장이라면 우리가 이해하는 사람 높이의 십배라고 유추 가능하다.

1. 사라진 방풍씨 (장적족 長狄族)

방풍씨는 신장이 5장 4척이다. 옛날에 우임금이 천하를 평정하고 제후들에게 회계의 들에 모여 동맹을 하자고 했다. 방풍씨가 늦게 도착해 피살되었는데 그의 뼈마디가 수레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방풍씨의 후손들은 복수를 계획했다. 춘추시대 송무공(宋武公) 때에 장적족이 송나라를 공격했는데 송나라 군대가 장구(長丘)에서 격퇴시켰다. 또 장적족의 수령인 연사(緣斯)를 포로로 잡았다. 노(魯)문공 11년(기원전 616년) 장적이 또 노나라(魯國)를 침범했다가 전투에 패하여 장적의 수령 교여가 피살되었다.

교여(喬如)의 신체는 넘어져 아홉 이랑을 점유했는데 신장은 5장 4척이며 어떤 사람은 10장이라고도 했다. 제혜공 2년(齊惠公 기원전 607년) 장적은 계속 중원을 침공해 제나라로 쳐들어왔다. 제나라 군대가 교여의 동생 영여(榮如)를 죽였다. 영여가 피살된 후 대부분 무리들은 영여의 동생 간여(簡如)가 이끌고 위(衛)나라로 퇴각했다. 위나라에서는 기회를 보아 다 죽이고 간여를 잡았다. 영여의 동생 분여(棼如)가 남은 무리를 이끌고 노(路)나라로 도망갔다. 진나라가 노나라를 멸하고 분여를 포로로 잡았는데 장적족의 수만(鄋瞞)국은 이때 멸망했다.

진시황 12년 감숙성 난주 일대에 장적족의 대인 12명이 나타났는데 신장이 5장이 넘었다고 한다. 이것이 아마도 장적족이 역사에 등장한 마지막 기록일 것이다.

2. 《박물지》에 기록된 기타 대인

동해 밖에 매우 외진 곳에 대인국 초요(僬僥)씨가 있는데 신장이 3장이다.

3. 《박물지》에 전재된 대인 기록 2가지

《시함신무(詩含神霧)》 중에 말하기를 동북 극지에 사는 사람의 키는 9장이 된다고 한다,

《하도옥판(河圖玉板)》에 있는 용백국(龍伯國) 사람은 키가 30장이며 대진국(大秦國) 사람은 10장, 중진국(中秦國) 사람은 1장(지금의 우리 인류와 비슷) 감숙성 난주인은 키가 3장 5척이다.

4. 《박물지》의 소인기록

동방에 일종의 소인이 있는데 키가 9촌(약 15센티)이다. 《박물지》에 대인에 관한 기록이 많은데 소인의 기록은 이 하나밖에 없다.

《박물지》는 진(晉)의 장화(張華)가 지었다.

http://www.zhengjian.org/2015/06/09/145906.《博物志》中的大人和小人記載.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