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우해심
【정견망】
송나라 때 홍호(洪皓)가 지은 《송막기문(松漠紀聞)》이라는 책에는 용에 관한 기록이 세 번 나온다. 최초 기록은 흑룡강 부근에서 이미 사망한 용이다. 두 번째는 감숙성 내 위수(渭水) 수변에서 물장난 치던 두 마리 용에 관한 일이다. 연속 사흘간 나타났는데 각각 청룡과 금룡이었다. 금룡은 심지어 어린이와 함께 놀았으며 어린이는 뜻밖에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수련계에서는 어린이는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아이는 용이 상서로운 것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이 아이는 아마 전생에 용과 인연이 있었거나 혹은 용이었을지 모른다.
세 번째 기록은 야율아보기에게 피살된 흑룡이다. 아보기는 용을 보았을 때 길이가 30여 미터였으며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후 몇 척으로 줄었다고 한다. 아마 용은 보통 생물과는 많이 다름이 분명하다. 중국의 개국 황제들은 다수가 진룡천자(真龍天子)가 전생한 것이다. 요나라를 창립한 개국 황제 야율아보기는 《요사》의 기록에 따르면 300근이나 되는 무거운 활을 당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인은 절대 용을 쏘아 떨어뜨릴 수 없다.
문헌에 등장하는 용은 당시에도 매우 드문 일이긴 했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설사 근대라 해도 용은 이따금 나타나곤 한다. 대략 10년 전 필자는 신문에서 요녕성 어느 마을 사람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죽은 용 한 마리를 보았다고 했는데 많은 마을 사람이 다 보았다고 한다. 또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티베트 상공에서 용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지금도 용은 그것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를 승인할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지금까지 언급한 용에 관한 3가지 기록을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1. 흑룡강에서 이미 죽은 두 마리 용이다. 송나라 때 금나라 냉산(冷山 지금의 흑룡강성 경내)은 연산(燕山 지금의 북경)에서 3천리, 금나라 수도인 지금의 흑룡강 아성(阿城)에서 2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초목이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다. 을묘년(저자가 금나라에 다녀간 이후 가장 가까운 을묘년은 서기 1075년에 해당한다)에 이곳에서 두 마리 용을 보았는데 이름은 모르겠고 길이가 3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둘 다 죽어 있었는데 서로 몇 걸음 떨어져 있었다. 냄새가 심히 비리고 추워 다가갈 수 없었다. 한마리는 뿔이 없었는데 잘린 듯했다. 다른 한 마리는 이마에 구멍이 있었는데 동전 3개 크기였다. 마치 도끼에 찍힌 듯했다. 좌승상 오실(悟室)이 사람을 시켜 이 용의 뿔을 자르려 했으나 불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그만 두었다.
2. 감숙성 위수변에 두 마리 용: 각각 청룡과 금룡이는데 연 사흘간 나타났다. 무오년 (서기 1018년?) 여름 감숙성 임조(臨洮) 들판 위숫가에 용이 나타나다. 처음 수면 위로 청룡이 나타났고 한참 있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금룡 한 마리가 앞발로 아이를 받쳐들고 놀았다. 아이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사흘째 금룡이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가보았다. 거리가 가까웠는데 바람이나 파도가 없었다. 조백린(趙伯璘 송나라 황제의 친척이자 휘종, 흠종과 함께 포로로 잡혀 갔던 인물. 나중에 홍호가 금나라에 가서 구출)도 본 적이 있다.
3.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피살된 흑룡 이야기. 야율아보기가 서쪽 누각의 모피 장막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30여 미터나 되는 거대한 흑룡 한 마리가 장막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아보기가 활을 당겨 쏘자 용은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고 길림성 사평시 서쪽에 떨어져 내렸다. 아보기가 있는 곳에서 약 1,500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당시 길이는 겨우 몇척이었다. 이 용의 뼈는 금나라 창고에 보관되었다. 좌승상 오실의 큰 아들 원(源)이 본 적이 있는데 용의 꼬리와 갈기가 다 있었고 신체가 완전했다고 한다. 다만 두 개의 뿔은 누군가 잘라가 버렸다. 이 용과 내가 갖고 있는 그림에 물속에 나오는 용과 같은 모양이다. 다만 그 등의 갈기는 물고기의 비늘과 다르다.
주: 《송막기문》은 송나라 때 홍호의 저작이다.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15년간 구류되었다. 그럼에도 금나라에 굴하지 않고 돌아와 송나라의 소무(蘇武)로 불렸다. 금나라에 있을 때 《송막기문》을 지었다. 금나라의 풍습을 기술했는데 돌아올 때 검열받을까 겁이 나서 불태웠다. 송나라에 돌아온 후 기억에 의해 다시 지었으나 원래의 십분의 일정도 밖에 안 된다. 홍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이 부친의 구술에 근거해 《송막기문 보유》를 지었다.
http://www.zhengjian.org/2015/06/20/146081.宋人筆記中的龍.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