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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어진 황제 조광윤

작자/ 송청천(宋清泉)

【정견망】

송 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상 아주 독특한 황제다. “술잔으로 병권을 내려놓게 하다(杯酒釋兵權)”, “천리송경낭(千里送京娘)” “화산불납량(華山不納糧)” 등의 일화는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아래에 선별한 조광윤에 관한 일화들은 송나라 시대 사람들의 기록과 <宋史>에서 따온 것인데 인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인자항(因子巷 아이 때문에 살아남은 골목)

후주(後周) 현덕(顯德) 4년(957년) 세종(世宗) 시영(柴榮)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당(柴榮)의 초주(楚州)를 공격했다. 초주를 지키던 장언경(張彥卿)은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끝내 성이 점령된 후에도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성내에서 싸우다 전사했으며 그를 따르던 병사들도 단 한명도 항복하지 않았다. 반면 주나라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초주 사람들의 저항을 보복하고 남당 조정을 위협하기 위해 주 세종은 성안의 남녀노소를 전부 몰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의 신분으로 후주 대장(大將)으로 있던 조광윤은 초주성의 북쪽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가 어느 골목 앞에 도착했을 때 길가에 머리가 잘린 젊은 여자 시체가 놓여 있고 그의 품속에 어린아이가 모친의 젖꼭지를 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광윤은 측은지심이 저절로 솟아났고 급히 주 세종에게 도살을 중지해 달라고 청했다. 동시에 이 아이를 안고 군중으로 돌아와 젖이 나오는 여인을 찾아 젖을 먹였다. 당시 골목 주민들은 아이 덕분에 한바탕의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나중 사람들은 이 골목을 “인자항(아이 때문에 골목이 살았다는 뜻)”이라고 불렀다.

(자료 출처: 송나라 때 주변(朱弁)이 지은 곡유구문(曲洧舊聞))

[주]: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五代)시기는 군벌간의 혼전이 실타래처럼 얽켜 살벌하고 어두운 난세였다. 이런 와중에도 군인 조광윤의 의연한 선량함과 인성의 빛을 볼 수 있다.

눈 오는 밤에 조보를 찾다

송태조는 몰래 신하들을 방문하곤 했다. 때문에 대신 조보(趙普)는 매일 조정에서 집에 돌아간 후에도 편한 옷으로 감히 갈아입지 못하고 황제의 갑작스런 방문에 대비해야 했다. 어느 날 큰 눈이 내려 저녁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는데 조보는 황제가 외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지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열어보고는 대경실색했다. 태조가 눈바람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동생인 조광의(趙光義)와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곧 광의가 달려왔고 군신 3인은 난로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으며 함께 술을 마셨다. 조보의 아내가 태조 형제를 위해 술을 따랐으며 태조는 그녀더러 친근하게 형수님이라 불렀다.

태조는 본 주제에 곧바로 들어섰는데 조보와 北漢(북한)을 공격할 방도에 대해 상의했다. 조보가 말했다. “북한은 우리 송나라와 서북의 천연 장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먼저 북한을 멸하려 하신다면 서북방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먼저 남방을 평정하고 북상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탄환같이 비좁은 땅이라 날개가 있어도 도망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태조는 웃으며 “내 뜻에 맞구려. 그저 특히 경의 뜻을 듣고 싶었을 뿐이요.”라고 말했다.

출처: <송사 조보전>

[주] : 송태조는 통치에 근면 성실했고 어진 인재를 구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했다. 또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다만 50이 못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쉬울 뿐이다. 만약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송나라가 더욱 위대했을 것이다.

어주사(禦廚使)

조광윤이 태원(太原)에서 절도사로 있을 때 이(李)씨 성을 가진 노파집에서 지냈다. 그녀는 조광윤을 무척 잘 대해주었다. 나중에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 사람을 시켜 할머니를 찾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을 찾아 어주사(황실 주방 일을 관장하는 직책)를 맡겼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자 아들은 승진을 못해 불만이 쌓여 떠나려 했다. 태조가 그를 불러 “네 재능만으로는 어주사를 하지 못한다. 작위와 봉록은 원래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불러 쓰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은혜 갚는데 썼으니 사대부로서 부끄럽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슨 불만이 있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주] : 조광윤은 은혜를 입으면 보답할 줄 알았지만 그렇다고 국가보다 더 중하게 여기진 않았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만족을 알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송백(宋白)을 질책하다

송태조 재위 중의 일이다. 송백(宋白)에게 과거 시험을 관리하라고 시켰는데 뇌물을 받고 불공정하게 사람을 뽑았다. 송백은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면 따지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해 합격자 명단을 황상에게 먼저 보고했다. 황제의 뜻을 빌어 논쟁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자 태조가 분노하여 말했다. “그대에게 과거를 위임한 것은 스스로 명단을 결정하라고 한 것인데 왜 내게 보고하는가? 내가 어찌 이 사람들이 적합한지 알겠는가? 만일 합격자 명단에 든 후 다른 사람의 비난이 받는다면 자네의 목을 베어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할 것이다!”

송백은 매우 두려워하며 곧 명단을 고쳐 여러 사람들의 뜻에 맞게 조정해 다시 붙였다.

출처: <사마광의 자치통감>

[주] : 조광윤이 송백에게 요구한 것은 일을 처리함에 공적인 의론을 거쳐 공평하게 해야 여러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총명함만 믿고 위아래를 속이려하지 말아야 한다.

유장(劉鋹)이 술을 의심하다

남한(南漢)의 후주(後主) 유장은 송나라에 항복하기 전 독주로 대신을 살해하길 좋아했다. 송나라에 항복한 후 어느 날 조광윤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유장과 함께 술을 마셨다. 조광윤이 유장에게 술을 따라주자 유장은 자신의 과거 행동이 생각났다. 혹 술에 독이 있을까 의심해 잔을 받들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죽이려 하시지 않는다면 저는 송나라의 평민으로 태평성세를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저는 감히 이 술잔을 들 수 없습니다.”

조광윤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대하는 것인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면서 즉시 유장의 손에 든 술잔을 빼앗아 훌쩍 마시고는 다시 한잔을 따라주었다. <송사 태조본기>

[주] : 사실 남한의 후주 유장뿐 아니라 후촉(劉鋹)의 맹욱(孟昶), 남당(南唐)의 후주 이욱(李煜), 오월(吳越)의 전숙(錢俶) 등 각국의 왕들은 모두 조광윤의 후대를 받았다. 또 각국의 신하들도 대개 관용으로 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후주의 범질(範質), 양휘지(楊徽之), 남당의 서현(徐鉉) 등이다. 이 중 양휘지와 서현은 한때 그의 적수였다. 송태조의 넓은 흉금과 대범함은 보통 사람에 비할 수 없다.

“그러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황궁의 발(수렴)은 모두 청색 베로 변두리를 감싼다. 태조는 평상복을 여러 번 세탁해서 입었다. 한번은 위국장공주(魏國長公主 태조의 딸)가 저고리에 물총새 깃털로 장식을 했다. 그러자 태조가 경고하며 더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너는 부귀한 집안에 자랐으니 마땅히 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태조는 또 맹욱(孟昶)이 진주보석으로 소변기를 장식한 것을 보고는 깨부수며 말했다.
“칠보로 변기를 장식한다면 어떤 그릇으로 음식을 먹겠느냐? 너의 이같은 행동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과 같지 않느냐?”

<송사 태조본기>

[주] : 태조는 심지가 맑고 곧아서 아첨을 싫어하고 근검절약을 몸소 강조했다. 이는 오대 이후 사치풍조를 바로 잡는데 아주 큰 시범효과를 보였다.

정의로 죄를 묻다

섬주(陝州) 사람 범의초(範義超)는 후주 현덕 연간에 사사로운 원한으로 고향 상고진(常古真) 일가족 12명을 죽였다. 상고진의 작은 아들 상유유(常留留)가 요행히 도망갔다. 송나라 초기에 그가 범의초를 잡아 관부로 보내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섬주 관원이 상주를 올려 “송 초기에 발포한 사면령에 따라 마땅히 용서를 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태조는 “어디 12명이나 죽이고 사면을 내릴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에 범의초를 살인죄에 따라 처형하게 했다.

[주] 일가족 12명을 죽인 것은 악마가 아닌가? 태조의 너그러움은 역사적으로 유명하지만 인성을 상실한 악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때로는 정의와 공리가 법보다 중요하다.

사관을 두려워한 송태조

송태조가 일찍이 황궁 후원에서 공기총으로 참새를 사냥했다. 어느 신하가 급한 일이 있어 만나려 했다. 태조가 얼른 그를 불러보니 그가 상주한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태조를 화를 내고 그를 문책하며 왜 급한 일이라고 말했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그 신하는 “신은 이 일이 참새 잡는 일보다는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조는 더 화가 나서 도끼 자루로 그의 입을 때렸다. 그러자 신하의 이빨 두 개가 부러져 떨어졌다. 신하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이빨을 주워 품속에 넣었다. 태조가 노해 물었다. “네가 이빨을 품에 감추는 것은 나를 고소하려는 것이냐?” 그러자 신하는 “신은 폐하를 고소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관이 이 일을 기록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조는 한편으로는 두렵고 또 기뻤다. 그가 충신인줄 안 태조는 그에게 황금과 비단을 내려 위로하고 장려했다. (사마광 <속수기문(涑水記聞)>)

[주] 조광윤은 본래 ‘군인’ 출신으로 온몸에 담력이 가득하며 하늘과 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붓을 잡은 사관이었다. 그는 선행이든 악행이든, 모두 사관의 기록을 통해 역사책에 들어가고 후세 사람들이 평가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잘못을 알고 바로 고치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태조의 세가지 서약

조광윤이 나라를 세운 후 일찍이 돌비석에 자손에게 남기는 서약을 새겨놓았다. 서약은 궁전 깊은 밀실에 잠가놓았다. 송나라 역대 황제들은 즉위할 때 반드시 궁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읽어야 했다. 이 맹세는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궁중의 인사 외에는 심지어 재상마저도 내용을 몰랐다. 나중에 금(金)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황궁을 점령했을 때 비로소 그 내용을 발견했다. 서약의 내용은 세 가지였다.

1. 시씨(후주 마지막 황제 시영의 후손) 자손은 죄가 있어도 형벌을 가해선 안 된다. 설사 역모를 해도 옥중에서 죽음에 처할 뿐 시장에서 드러내 형벌을 주지 않는다. 또 가족을 연좌하지 않는다.
2.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3. 농민에게 세금을 가하지 않는다.

(왕부지 <송론>)

태조의 이 3가지 서약은 이후 송나라의 정치를 펼치는 밑바탕이 되었다. 송나라 황제들은 기본적으로 이 서약을 준수했으며 시씨의 자손은 송나라와 존망을 함께 했다. 이는 조광윤 이후 역대 군주들이 모두 대신을 살육한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제2조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이는 제도적인 보장이 되었다. 송나라는 비록 무장이 개창한 왕조였지만 나중에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문치(文治)국가가 되었고 선비의 풍격, 학문과 능력이 전방위적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잘 아는 대문호 소식(소동파)은 시에서 조정을 풍자하며 황제를 암시하기도 했다. 이런 것은 사실 다른 왕조였다면 구족을 멸할 큰 죄였다. 그러나 송나라에서 그는 몇 번 귀양을 갔을 뿐 다시 복직되곤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적벽부 같은 천고의 명시는 우리가 볼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송나라는 선비들의 낙원이었다”라고 한다.

[주] : 태조 조광윤의 온후한 개성은 이 유훈을 통해 송나라 왕조 전반에 양향을 주었다. 이는 당나라가 말기 이래 무인이 전권을 휘두르는 암흑 국면을 전환시켜 전에 없던 번영을 가져오게 했다. 때문에 후인들에게 “송나라는 문인의 낙원”이라는 칭송을 받게 했다.

중국 역사상 한 왕조를 개창한 황제에는 한나라의 유방, 후한의 유수, 당나라 이세민, 명나라 주원장 등이 있었다. 이들이 왕조를 개창할 때면 주위에 뛰어난 문신과 용맹한 무장들이 구름 같이 많았다. 하지만 조광윤의 수하 중에 의기가 투합한 인물은 오직 어린 조보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그는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70여 년에 걸친 긴 전란을 끝내고 300년 송나라 역사의 기틀을 다졌다. 때문에 그가 개창한 건륭(建隆)의 치(治)는 후세에 길이 남게 되었다.

송태조야말로 큰 뜻과 어진 마음의 완벽한 결합체로 그의 인격적인 매력은 후세 사람을 깊이 감복시켰다. 일찍이 사마지(司馬池)는 아들인 사마광(司馬光)에게 “여러 나라가 섞여 하나로 될 수 있고 복록이 연장되며 내외에 우환이 없는 것은 태조가 인의로운 까닭이다.”라고 말했다.

북송의 명재상 범중엄(範仲淹)은 “(송나라에선) 태조 이래로 신하를 함부로 죽인 적이 없으니 이것은 덕이 성대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북송의 대유학자 정이(程頤)는 “태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오대의 어지러움을 구함에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이런 일은 자고로 없었으니 한나라나 당나라가 비할 바가 아니다. 진실로 조씨의 제사를 태산에 모셔야 한다.”라고 말했다.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은 송태조를 추앙하며 “오직 송나라 태조황제만이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뜻에 응해 천하를 통일하고 천하문명 삼백년을 지탱했다. 천하를 다스린 덕과 세상을 편안케 한 공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http://www.zhengjian.org/2015/10/18/148660.曆史故事:一代仁君趙匡胤.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