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묵안(默安)
【정견망】
원말 명초의 유명한 시인이자 문장가 양유정(楊維楨)은 자가 염부(廉夫) 호가 동유자(東維子), 또 철적도인(鐵笛道人)이라 한다. 회계(오늘의 절강성 소홍) 사람이다. 일찍이 철애산(鐵崖山)에서 공부해 호를 철애라고도 한다. 그는 원나라 원정(元貞) 2년(1296년) 태어나 태정(泰定) 4년(1327년) 진사에 합격해 천태현 현감에 제수되었다. 나중에 전청장(錢清場) 염사령(鹽司令)이 되었다. 너무 정직한 탓에 윗사람의 미움을 받아 십년간 승진하지 못했다. 나중에 관직이 강서(江西) 유학제거(儒學提舉)에 이르렀다. 그는 관리로서 백성들의 고생을 걱정하고 치적을 쌓았다. 원나라 말기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양유정은 절강성 부춘산으로 피했다. 나중에 송강(松江, 오늘날 상해의 일부)에 옮겨 살았다. 음률을 잘 알았으며 매일 뛰어난 문사들과 교류하며 붓글씨를 쓰거나 피리를 불고 춤추고 노래를 했다. 명나라가 건립된 후 태조 주원장이 불러 예와 악에 관한 책을 엮게 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한 후 집으로 돌아가 기거했다.
양유정은 일생 동안 주로 서예가, 문장가, 시인으로 불렸으며 《동유자문집》 30권 《철애선생고악부》 10권 《악부보(樂府補)》 6권, 《복고시집(複古詩集)》 6권 등이 있다. 그는 행서와 초서에 능했고 또 문장과 시를 잘 썼다. 그의 문명은 대단히 높아서 원말 시단의 영수인물로 불린다.
양유정이 이렇게 유명한 문장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힘들게 공부한 것과 분리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자질이 높아 매일 고문(古文) 수천 자를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부친 양굉(楊宏)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특별히 철애산 산속에 작은 건물을 지어놓고 그 주위에 매화 백 그루를 심어 아들의 고아한 지조를 배양했다. 건물 중간에 수만 권의 도서를 놓아두어 양유정은 집 위에서 어렵게 읽었다. 그리고 사다리를 치워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여 그의 힘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했다. 양유정은 이런 특수한 환경 속에서 결심하고 오년간 힘들게 공부했다. 제자백가의 경서를 통독해 학문이 아주 높았다. 때문에 명망 높은 원로 유학자라 하더라도 학문이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 양유정은 진사에 급제해 요, 금, 원 세 왕조의 역사 편찬에 참여했다. 사서를 편찬하는 중에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가 있어 《정통변(正統辯)》 수천자를 지었다. 편찬 책임을 맡은 총재 구양현은 그를 매우 칭찬하며 “백년 후 공론은 여기에서 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양굉은 아들을 감금해 독서에 전념토록 하여 마침내 큰 그릇이 되었다. 그는 아들이 도박 음주 등 잘못된 무리와 만나지 못하게 하여 악습이 물들지 않도록 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오직 바른 책을 읽고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아야 한다. 이런 아이가 비로소 대성할 수 있다.
《명사 양유정전》
(자료출처 《명사(明史)·양유정전(楊維楨傳)》)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2016/06/04/1530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