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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릉공주 양아오

글/고운(古韻)

【정견망】 양아오(楊阿五)는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과 독고황후의 5째 딸이다. 그녀는 온화하고 지혜와 예의가 있어 양견이 매우 총애했다.

북주(北周)의 신하 왕의(王誼)는 양견의 오랜 친구로서 양견을 도와 사마소(司馬消)의 난을 평정하는 중에 큰 공을 세웠다. 양견은 신임과 감사를 표하기 위해 딸을 보내 혼인의 연을 맺기로 했다. 그래서 어린 양아오를 준 공주 신분으로 왕의의 아들 왕봉효에게 시집을 보냈다. 양견의 수나라가 북주의 자리를 차지한 후 양아오는 난릉(蘭陵)공주에 봉해졌다. 수문제 부부는 친히 은총을 표시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마 왕봉효는 병으로 요절했고 양아오는 제도에 따라 3년간 상복을 입고 수절해야 했다. 1년여 후 왕의는 상소를 올려 공주가 상복을 벗게 해 달라고 청했다. 왕의는 이 일로 어사대부 양소(楊素)에게 탄핵을 당해 수문제를 곤란하게 했다. 왕의는 비록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좋은 마음으로 한 행동이 좋은 보답을 받지 못해 원망을 품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왕의를 고발해 문제는 왕의를 사사(賜死)했다.

혼인에 실패하고 시아버지는 죽음을 당한 작은 딸을 불쌍히 여긴 수문제는 매우 가슴이 아파 그녀에게 다시 좋은 집을 골라 시집을 보내려 결심했다. 당시 두 명의 뛰어난 배우자감이 있었다. 양아오의 둘째 오빠인 진왕 양광의 처남인 소창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문제가 아끼는 신하 유기의 아들 유술이 있었다. 문제는 마음을 정하지 못해 저명한 관상가 위정(韋鼎)을 불러 도와달라고 했다.

위정은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음양팔괘에 능통하고 관상에도 뛰어났다. 그는 이렇게 예언한 적이 있었다. “진패선(陳霸先)이 칭제하고 진조(陳朝)를 건립한다. 양견이 칭제해 북주를 대신한다. 진조(陳朝)가 진후주의 손에 멸망한다” 등 이런 예언은 모두 들어맞았다.

위정은 두 사람을 한참 보고나서 문제에게 말했다. “소창이 제후에 봉해질 것이나 아내를 존귀하게 할 상은 아닙니다. 유술도 앞날이 환하게 트일 것이지만 마침내 자신의 직위를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생각했다. ‘나는 존귀한 황제로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으니 한 사람의 직위를 결정하는 것도 무슨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는 매우 자신 있게 “직위는 내가 결정한다”면서 유술을 부마로 정했다. 문제는 유술을 매우 총애했으며 마음을 다해 그를 배양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유술은 중신(重臣) 양소(楊素)와 원수가 되어 인수궁 변란의 풍파에 말려들었고 결국 수양제 양광이 등극한 후 영남으로 유배됐다. 양제는 또 난릉공주에게 개가를 명령했다. 성격이 강직한 양아오는 거절하며 상소를 올려 공주의 봉호를 면해주어 남편과 함께 가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수양제는 대노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진짜 부모는 세상을 떠나고 형제들은 왕위 쟁탈로 골육상잔을 했으며 두 차례의 혼인의 불행 등 연이은 비극에 시달려 양아오는 거의 죽어갔다. 죽기 전에 오빠에게 표를 올렸다. “태어나 남편을 따르지 못했으나 죽어서는 유씨 집안에 장례를 지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안 되어 난릉공주는 울분을 토하며 죽었는데 나이가 32세였다.

난릉공주가 수절한 이야기는 ‘수서열녀전(隋書列女傳)’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질이 찬 소나무 같다”고 칭송했다.

난릉공주의 사적은 대대로 사람을 감동시켜 지금도 많은 영화 작품 등에서 이따금 표현된다. 하지만 내게 가장 흥미 있는 것은 그 관상가 위정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신기하게 정확했는가? 만약 수문제가 사랑하는 딸 아오의 역경을 지하에서 알았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아마 운명의 신 앞에서 황제도 바둑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7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