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石方行)
【정견망】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인물과 일을 말했으니 이번에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수인(燧人)씨, 화서(華胥)씨와 유소(有巢)씨에 대해 말해보자.
먼저 수인씨와 화서씨를 말해보자.
전설에 따르면 수인씨와 화서씨는 부부였다. 한번은 화서씨가 뇌택(雷澤)에서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는 아이를 배었으며 복희와 여와를 낳았다. 복희는 하도를 보고 선천팔괘를 만들었고 여와는 사람을 만들고 혼인을 정했다. 여와와 복희는 천상에서 파견하여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천지의 대응 관계를 인식하도록 도운 신선이기 때문에 그들은 출생 후 곧 심상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된다.
많은 후세인들은 중화(中華)나 화하(華夏)의 화(華)가 화서씨(華胥氏)에서 기원하며 그녀가 여와, 복희 두 선조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설문해자. 문부》의 설에 따르면. “華는 榮이다.” 화서씨가 중화 신전문명에 가져온 것은 번영이나 영광만이 아니라 무한한 자비와 사심 없는 지불이었다.
전설에 거인(뇌신)을 밟고 우리의 두 선조를 탄생시켰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이것은 황인종과 신선 사이의 계승관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후세 주나라 왕조의 시조 후직의 모친 역시 유사한 정황이 있다.
사견으로 신이 이런 신화를 남긴 목적은 바로 사람들에게 당시 신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이때의 뇌신(雷神)은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신인 반신반인(半人半神)이라 하더라도. 《산해경. 해내동경 제13》에는 “뇌택에 뇌신이 있는데 몸은 용이고 머리는 사람인데 배를 두드리며 오의 서쪽에 있다”
춘추 시대 서적인 《열자》에는 이렇게 언급했다. “헌원 황제가 일찍이 꿈에 화서국에 놀러 갔는데 사람들이 모두 안락하고 백성들이 행복하며 재난이나 화가 없었다. 모두 장수했고 무위로 다스렸다. 황제에게 아주 많은 계시를 주었다.”
유소씨(有巢氏)는 사람들이 돌아갈 집이 없는 것을 보고 새나 짐승의 둥지를 보고 계시를 얻어 실천을 거쳐 나무로 틀을 만들고 풀로 지붕과 양쪽을 덮는 방식을 고안해내어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현재 학자들은 고증을 거쳐 복희의 모친이 당시 부락의 여수령 화서씨라고 한다. 그들 이 부락은 수인씨의 후예이며 청장고원의 곤륜산에서 발원했다.
대략 기원전 2만 8천년에서 1만년 사이 지구가 최후의 빙하기로 들어서 날씨가 매우 추웠다. 그래서 복희의 선조들은 곤륜산에서 내려와서 기련산 일대의 하서주랑으로 옮겨 와서 유목을 했다.
대략 기원전 9천년에서 8천년 하서주랑 일대에 한차례 대홍수가 발생했다. 복희의 선조들은 홍수에 잠겨 견디지 못해 동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동천은 두 갈래 길로 나뉘었다. 남쪽으로 간 갈래는 발전하여 고대 묘만(苗蠻) 집단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 남방의 많은 소수민족들도 복희의 친척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복희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제사지낸다. 북쪽으로 간 갈래는 복희씨 집단이 되었다. 그들은 복희의 모친 화서씨의 지도하에 풀을 따라 이주하는 유목생활을 했다.
여와의 전설에 관해서는 많은 판본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렇다. 갑자기 어느 날 하늘에서 홍수가 넘쳐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중 두 남매(복희와 여와)가 큰 호로박 속으로 들어가 겁난을 지났다고 한다. 말하자면 호로박은 중국판 노아의 방주라 할 수 있다.
호로박은 홍수 중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곤륜산에 도착했다. 남매가 호로박에서 나왔을 때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고 원래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곤륜산에 다른 사람도 없어 여기서 머물렀다.
사실 여와의 생김새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설에서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을 가졌다고 하는데 역사학자 채동번(蔡東藩)은 “뱀의 신이라 하는 자가 있고 형상은 가늘고 날씬하다고 하는 자도 있다.” 《중화전사연의-12쪽》 이렇게 말한 정황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중국인이 모두 “뱀의 몸”이라는 기형적 요소를 계승했을 것이며 그러면 좀 귀찮다. 여와가 사람을 만든 것도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
대홍수에 대해서는 현재 세계 거의 모든 민족에게 사전의 대홍수에 대해 깊은 기억이 있다. 이것은 이 대홍수가 세계적일 뿐 아니라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곤륜산 일대가 중화민족의 발원지라는 문제에 대해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각 지역 설법 1, 싱가포르 불학회 설립식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과거 상고(上古)시기 중국 종족의 중심지역은 현재의 황하유역이 아니라 신장(新疆) 이 일대였다. 이 민족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 역시 이 일대에서였다. 왜냐하면 쿤룬산(崑崙山)이 이 일대 가까이에 있어 주위의 지표면이 비교적 높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 한 차례 홍수는 수위(水高)가 2천 미터에 달했으며 지구 전반이 수몰되게 했다. 많은 사람이 홍수가 넘쳐날 때 쿤룬산으로 대피하여 살아남았고 상고시기의 일부 문화를 남겼다. 예를 들면 중국의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잘 알지 못하는 하도(河圖) 낙서(洛書) 태극(太極) 선천팔괘(先天八卦) 등등과 또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부 옛 기공(氣功)들이다.”
또 중화민국 시기 사학대가 여사면(呂思勉)은 《중국통사》에서 “곤륜은 한족(漢族 인용자 주: 여기서는 민족이 아니라 종족을 지칭)의 근거지다”라고 했다.
여와가 사람을 만든 후 많은 기능들이 원래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우리 선조들에게 전해졌다. 신농씨는 인간에서 온갖 약초를 맛보고 사람들에게 심어 기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비록 사람들이 당시 거주가 매우 초라했고 일하는 것도 간단했지만 모든 것은 이미 시작됐다.
우리 선조들은 길고 긴 세월 중에 신의 보호하에 조금씩 문명의 기점을 향해 걸었다. 문자가 생겼다. 이것은 다음 편에 말하겠다.
주: 화하 혹은 중화의 “화(華)”자의 내원에 대해 고금에 많은 설이 있는데 본문에는 그중 하나를 채택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6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