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
【정견망】
상고시기 많은 사람들(수인씨, 유소씨, 신농씨 등)을 거치면서 인간의 발전에 대한 기초를 다졌고 사람들이 자연계에 대해 어느 정도 대응하는 경험을 쌓게 했다. 이런 경험이 어느 정도 누적되자 ‘총괄적’인 상태가 나타났는데 나중에 역사가들은 이를 또 ‘문명의 발단’이라고 부른다.
당시 중화 대지에는 수많은 부락들이 있었는데 모두 부동한 신(여와는 단지 사람을 만든 여러 신들 중 하나일 뿐이다)이 육성한 사람들이었다. 또 일부는 지난 문명이 훼멸하는 시기에 남아 내려온 사람이었다. 이런 부락들은 중화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이중 역사적으로 기록된 것은 일부분이다. 당시 염제가 있던 부락은 신농을 비롯해 수인씨, 유소씨 등을 답습해 아주 먼 옛날 뭇신들이 개창한 요소를 계승했다. 황제의 부락은 비록 염제와 뿌리는 같았지만 나중에 황제가 있던 부락이 본 차례 문명 내포를 창립하는 사명을 더 많이 계승했다. 치우가 있던 부락은 지난 시기 인류 문명의 요소를 더 많이 계승했다. (전설에서 치우 부락이 무기 제조 방면에 아주 성숙해 있었다는 것이 이 점을 잘 설명한다) 이는 개괄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들 대부락은 모두 다양한 크기의 소부락들로 이루어졌는데 아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평화적이거나 혹은 전쟁의 방식으로 서로 융합되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 다른 별에서 이곳으로 온 생명간의 전쟁도 경험했다. (이는 고 인도에 내려오는 서사시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헌원황제는 진정으로 중화 오천년 신전문명을 개창하려 했다. 그러자면 반드시 사해가 같은 마음으로 팔방이 설복되어야 했고 동시에 개창한 문명이 신속하게 전파되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비로소 염제와 치우간의 전쟁이 있게 되었다. 더욱이 치우와 정벌전 중에 뭇신들과 요괴들간의 쟁탈이 나타났다. 곤륜산을 관리하는 서왕모 역시 차례로 구천현녀(九天玄女)와 소녀(素女) 등의 신을 보내 참전시켰고 황제는 이때 또 지남차를 발명했다. 동시에 부락간의 대융합을 촉진하고 부동한 내포의 대 조정이 있었다. 나중에 중화 대지에서는 그 어느 왕조나 어느 민족이든 모두 염황의 자손, 중화자녀라고 부르게 되었다. 치우 부락은 패전 후 일부분은 염황 부락에 융합되었고 일부는 원래 상태를 유지했고 일부는 심산 속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이 두 부분의 문명 정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많이 후퇴했다.
한나라 때 사마천이 지은 《사기》는 황제로부터 시작하므로 황제가 중화역사상 일으키는 작용이 그만큼 큰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일부 사서에서 황제의 일생을 개괄한 것이다.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며 성은 희(姬). 모친은 부보(附寶)라 하는데 큰 거북이 빛을 내며 북두성을 휘감고 들을 비추어 부보를 감응하여 황제를 수구에서 낳았다. 용안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유웅으로부터 나라를 받아 헌원의 언덕에 살았다. 그래서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보물 솥을 얻어 제사를 일으키고 경운의 길상이 있었으며 스승이라 했다.”제왕세기》
“황제는 나면서부터 신령했고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을 했으며 어려서는 생각이 빨랐고 자라서는 인정이 많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총명했다.” 《사기》
“(황제는) 처음으로 수레와 면류관을 입었는데… 제홍씨(帝鴻氏) 또는 귀장씨(歸藏氏)라고도 했다. 염제를 토벌하고 치우를 죽였으며 토(土)의 덕이 왕성해서 황제(黃帝)라 칭했다. 백년을 재위했고 나이는 111세였다.”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
황제 이전에도 사람들은 비록 불을 사용할 수 있고 일부 간단한 집을 지을 수 있었으며 짐승 가죽이나 나뭇잎을 둘러 추위를 막았다. 황제는 대 부락을 통일한 후에야 비로소 문명개창에 착수했다 《노사(路史) 후기(後紀) 1》에는 “황제가 처음으로 땅을 나누어 나라를 세웠다.” 황제는 천하의 기초를 다진 후 “풍후에게 명해 사방을 만리로 나누고 들의 경계를 구분하여 크고 작은 나라 만 구역을 얻게 했다.” 또 국가의 관직 제도를 제정하고 좌우 대감(大監)을 설치해 천하의 여러 부락에 대한 감독을 맡게 했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대신(大臣)을 설치했다. 그는 또 늘 산천 귀신에 제사를 올렸다. 그는 신성한 시초(神蓍)를 이용해 역법을 추산하고 만들었다.
황제는 사람들에게 불로 밥을 짓는 법을 가르쳤고 방직기술을 창조하여 추위를 막게 해주었다. 황제는 또 의도(醫道)에 정통하여 후인들에게 양생 방법을 남겨놓았다. (후인들이 정리를 거쳐 엮은 것이 《황제내경》이다) 황제의 정비는 서릉씨(西陵氏)였는데 이름을 누조(嫘祖)라 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양잠과 비단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비단을 짜서 옷을 만들었다. 두번째 비의 이름은 모모(嫫母)였는데 전설에서는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황제는 또 주위 대신들에게 명해 부동한 창조를 책임지게 했다.
용성(容成)은 다른 사람들의 성과를 종합하여 악율과 율력을 만들었으며 영륜(伶倫)은 악기 경(磬)과 종(鍾)을 만들었고 저송(沮誦)과 창힐(倉頡)은 문자를 만들었다. (문자 창조에 대해 후세의 사가는 중요한 원소를 빼먹었는데 바로 창힐이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난 차례 문명에서 남겨 내려온 일부 유적을 참조했다는 것이다. 다른 방면 역시 지난 시기 문명에서 남겨온 것을 많건 적건 참조했다.) 사황(史皇)은 지도를 만들었고 옹부(雍父)는 절구와 공이, 이모(夷牟)는 화살, 휘(揮)는 활을 만들었으며 공고(共鼓)와 화적(貨狄)은 배를 만들었다. 황제는 정기적으로 각지를 순시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이해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황제는 사람들에게 많은 기술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중화 오천년 신전문명을 개창했다. 더 중요한 것은 황제가 친히 수련을 통해 도덕을 높이고 철저히 해탈하는 수련의 법을 실천한 것이다. 《장자 외편 재유제11》에는 황제가 광성자에게 도를 물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황제가 천자가 된지 19년 천하가 안정되자 광성자가 공동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나보았다…..”
사기의 《봉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제(黃帝) 때는 제후가 만 명이 있었으며,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후국이 7천이었다. 천하에 명산은 8개가 있는데, 3개는 만이(蠻夷) 지역에 있으며, 5개는 중국에 있다. 중국에는 화산(華山), 수산(首山 황산), 태실산(太室山), 태산(泰山), 동래산(東萊山)이 있으며, 이 다섯 산은 황제가 늘 유람하며 신과 만났던 곳이다. 황제는 전쟁을 하는 한편 신선을 배웠다. 백성들이 그의 도를 비난할 것을 걱정하여 귀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바로 참살했다. 이렇게 백세가 넘은 후에야 신과 통할 수 있었다. 황제는 옹주 교외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며 석 달을 머물렀다. 귀유구(鬼臾區)는 대홍(大鴻)이라 불렀는데, 죽은 후 옹주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홍총(鴻冢 무덤)이 이것이다. 이후 황제는 명정(明廷)에서 뭇 신령들을 영접했다. 명정이란 바로 지금의 감천(甘泉)을 말한다. 이른바 한문(寒門, 황제가 승천한 장소)이란 바로 지금의 곡구(谷口)다.
황제는 수산(首山)에서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荊山) 아래에서 정(鼎)을 주조했다. 정이 완성되자 구름 속에서 긴 턱수염을 드리운 용이 땅으로 내려와 황제를 영접했다. 황제가 올라타자 군신, 후궁 등 70여 명도 뒤를 따랐고, 용이 하늘로 날아가려 했다. 나머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이 탈 수 없자 다급히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수염이 뽑혀서 떨어졌고 황제의 활도 떨어졌다. 백성들은 모두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우러러 보면서, 그의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서 통곡했다. 때문에 후세에 그곳을 정호(鼎湖)라 일컫고, 그 활을 오호(烏號)라고 불렀다”
이는 나중에 사학자들이 흔히 소홀히 하는 부분이다. 수련문화는 중화 오천년 문명사상 아주 중요한 문화라 할 수 있다. 이런 문화의 특수성은 여기에 있는데 바로 그런 기연과 심성 경지가 없으면 이런 문화의 정수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점 때문에 수련문화 방면의 일은 세인들에게 조금씩 고의적으로 생략되거나 심지어 기피하며 언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헌원황제가 이 문화를 남겨 놓은 것은 후세 자손들에게 세간의 표면적인 좋고 나쁜 득실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으로 진정하게 수행해야만 비로소 최종의 해탈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염황 자손’이 된 진정한 목적이다. 이 일체의 개창은 거의 수천 년 이후를 위한 것이다. 도덕이 패괴되고 인심이 각박할 때 중화 오천 년 신전문명을 개창한 각자가 보통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진정 사람이 해탈을 얻을 수 있는 법을 전하는 길을 깔기 위한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눈을 비비며 이런 것을 똑똑히 보는가를 본다.
바로 이런 천상의 특수한 배치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매우 평범하게 보는 일도 모두 아주 길고 긴 역사적 연원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보통 사람들 집에 널려 있는 분재예술도 7천년 역사가 있다.
황제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후 대신들은 그의 옷을 한데 모아 교산(橋山)에 장례를 지냈다. 교산에 있는 황제능 역시 수천 년 동안 억만의 중화 자손이 뿌리를 찾는 곳이 되었다. 중국 역대 황제(皇帝)들은 황제(黃帝)를 위한 사당을 설치하고 능에 제사 지내는 등으로 상징적인 통치의 정당성을 얻었다. 이것은 중국 문화의 중요한 상징적인 인물이며 중화민족의 선조라고 불려진다.
《급군총중죽서(汲郡塚中竹書)》에 “황제가 신선이 되어 떠나고 그 신하에 좌철(左徹)이란 사람이 있어 나무로 황제의 상을 만들어 여러 제후들을 이끌고 참배하게 했다.” 이때부터 중화 천추문명의 배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6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