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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중화 (4): 문명계항(文明啟航) (2)

작가/석방행(石方行)

【정견망】

헌원황제가 용을 타고 날아간 후 중화문명은 황제의 후예가 이끌어 질서 있게 앞을 향해 발전하고 있었다. 나중에 나온 요, 순 모두 황제의 후예이다. 그들은 매우 성스런 덕을 갖추었으며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중화문명의 성과는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요제의 사적에 관해서는 《사기》, 《상서, 요전》 등에 기록이 다 있다. 우리 여기서는 몇 가지 전설의 의의를 말해보자.

2011년 나는 산서성 평요고성(平遙古城)에 가보았다. 그곳에서 평요고성에 내력에 대한 전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이곳은 본디 요의 봉지(封地)로써 고도(古陶)라고 불렀다. 요제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이 돌아갈 집이 없었다. 나중에 비가 물러가고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갔으나 집은 모두 물에 잠겨 부서졌고 어디 하나 성한 집이 없었다. 이것은 요제의 마음속에 맴돌고 있는 한 가지 문제였다. 이때 한 마리 거북이 나타났다. 요제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 거북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우리는 그곳에 도성을 짓자.” 이 거북이가 이곳까지 기어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요제는 이곳이 하늘의 지시라고 생각하여 곧 그곳에 성읍을 건설했다. 거북의 계시를 얻었기에 성의 못을 파는데 요제는 거북 형상의 성 못을 지었다. 원래 땅을 다지고 벽을 쌓았는데 고성은 서주 선왕(기원전 827~782) 시기에 짓기 시작하여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명나라 홍무 3년에 군사방어의 중요성 때문에 확장하여 지은 것이다. 고성에는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줄기가 세 번 죽은 후 다시 싹이 나서 자랐다.

평요고성의 전체 역사발전과정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근대만 말하자. 이 성의 못이 있던 곳에 진(晉)나라, 상(商)나라의 대 표호(票號, 옛날 은행)인 ‘일승창’이 나타났고 이것은 근대 중국 경제에 영향이 매우 컸다. (사료의 기록에 근거하면 청나라 후기에 전국 표호는 51곳이 있었고 그중 43호가 산시성에 설치되었다. 평요 경내에 22호가 있었고 또 다수는 서쪽 대가(大街)에 집중되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농담으로 이곳을 중국의 ‘월가(Wall street)’라고 부른다.

산시 표호는 신용을 중시하는데 청나라 말의 어느 노인 거지가 30년 전에 작성한 12,000냥 일승창의 장(張) 가구(家口)에서 발행한 어음을 바꾸려고 왔다. 지배인은 장부를 조사해보고 그가 늦게 온 연유를 물어보고 있는 그대로 은으로 바꾸어 주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때 요제가 평요고성을 세운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더욱이 후세인들에게 견실한 기초를 다져주기 위한 것이었다.

불안정한 시대에 어느 국가가 만약 일정한 경제적 기초가 없으면 아마 매우 빨리 멸망할 것이다. 만약 문화 전통이 훼멸되면 오늘날 사람을 구하는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데 곤란하게 변할 것이다. 그래서 문명의 시초에 창세주는 계통적으로 이 일을 배치해 놓은 것이다.

창세주가 계통적으로 배치해 놓은 이 일을 말하니 다시 한번 요제가 ‘삼묘(三苗)족을 삼위산으로 옮긴 일’을 말해보자. 순제가 사방을 순시할 때 삼묘족 부락이 장강, 회하, 형주 일대에서 여러 번 날뛰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요제에게 건의하기를 이 삼묘를 삼위산으로 옮겨 서융에 동화시키라고 했다. 삼위산은 현재의 돈황(敦煌) 부근이다. 대 우(禹)나라 시대가 되어 “삼위는 다스려지고 삼묘가 크게 순화되었다.” 《사기의 오제본기》를 보라.

돈황 막고굴은 나중에 유명한 불교 석굴이 되었고 그 속에 북위시기에서 원나라까지 회화와 조각 작품이 대량으로 보존되었다. 사람들이 이런 조각과 회화로부터 역사적 사실과 불교 이론을 알게 하였다. 물론 이뿐만 아니라 여기에 하나의 새로운 학문인 ‘돈황학’을 형성했다. 그것이 포함하는 범위는 상당히 광범위하다.

큰 산이든 넓은 대지든 장기적으로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으면 사악하고 나쁜 요소에게 점거당하기 쉽다. 그래서 문명 초기에 요제는 삼 묘 부락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표면적으로는 서융 부족에 동화시키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여기에서 문명의 씨를 뿌리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삼 묘 부족이 그들의 습성을 바르고 좋게 바꾸어 이 문명의 신성의 요소가 점점 그 속에 스며들게 하였다. 게다가 후에 점차 이곳에 오는 부족이 이후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져 이곳에 올 때 굴을 뚫어 신의 견증을 남기는데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전국옥새’로 불리는 화씨벽(옥, 玉)에 비유할 수 있다. 옥 자체는 색, 질이 가장 좋으나 이 점만으로는 하늘의 ‘전국옥새’의 요구에 못 미친다. ‘전국옥새’는 직언하고 간하는 진(眞)의 정신이 요구되는데 오직 이런 정신만이 천자(天子)를 통하여 인간을 관리하는 ‘증빙’을 부여받는다. 알아야 할 것은, 성지는 비록 황상이 쓴 것이지만 인장을 찍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마침 화씨벽을 발견한 변화(卞和-인명)는 이런 정신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변화가 진상을 위해 자신을 잊고 대가를 지불하여(전임 두 군주에 의해 두 다리가 잘렸어도 후임 군왕에게 자기가 가진 것이 돌이 아니며 좋은 옥이라고 증명하려 했다) 이런 정신이 옥에 녹아들어 이 옥은 비로소 진짜 옥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황권의 지고 무상한 위엄의 상징이 되었다.

요제가 인덕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순제가 효자로 칭해지니 그의 맹인 부친과 계모 및 이복동생이 아무리 학대해도 그는 속으로 원망을 품지 않았다. 또 《열녀전》에 아황, 여영은 어떻게 순을 도와 동생이 설치해놓은 덫을 피하도록 했는지 기술해놓았는데 매우 흥미롭다. 독자들이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속인이 이렇게 하기는 매우 힘들다. 순제가 구의산에서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사람은 그가 시해(屍解, 몸은 남겨두고 혼백만 빠져나가 신선이 되는 도술)하여 원만하여 떠났다고 한다. 《신구기》(神龜記)에 이런 설이 있다. 사실 요제를 포함하여 이전의 일부 덕이 높은 제왕들이 세상을 떠날 때 모두 시해 신선으로 떠났고 남은 것은 의관총(衣冠塚, 죽은 사람의 의관을 묻은 무덤)이다. 그들은 하늘이 부여한 사명을 완성했기에 공성원만했다고 할 수 있다.

순제가 떠난 후 요제의 두 딸 아황, 여영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너무 상심한 나머지 눈물을 소상강 길가의 대나무 잎에 뿌렸는데 이때부터 대나무 잎이 점점이 반점의 흔적이 잔뜩 생겼는데 이때부터 이것을 ‘상비죽(湘妃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현재 눈물을 대나무 잎에 아무리 많이 흘려도 상비죽을 만들지 못한다. 사실 이 전설은 바로 요제가 순제에게 시집보낸 두 딸이 전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들은 ‘천계의 여인이 속세에 내려온 것’으로써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훌륭히 표현해내어 신전문화를 개창한 것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6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