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
【정견망】
대우(大禹 우임금)가 물을 다스린 일은 천고에 유전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한마음으로 13년간 치수를 했는데 자기 집 문 앞을 3차례나 지나면서도 한번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은 우임금의 사심 없음과 일에 대한 헌신적인 정신에 큰 감동울 받는다.
《사기》에는 “우(禹)가 기주(冀州)에서 시작하여” ‘구산(九山)’과 ‘구천(九川)’을 지났다고 한다. (하본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산속의 맹수 및 수괴 등의 교란을 제거했다.
우는 천하를 구주로 나누고 아홉 솥을 설치하고 산하를 측량하여 동식물의 종류와 지형을 조사했다. 이때 ‘낙서’가 세상에 나왔다. 동시에 우는 더욱 오래된 지역을 조사한 상고본(上古本) 《산해경》을 얻었다.
이 신비한 《산해경》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심한 자는 그것을 황당무계한 것으로 생각한다. 서한의 유수가 황제에게 “그 사실은 믿을만 합니다”(산해경 서록)라고 진언한 이외에도 미국의 어느 학자는 직접 몸소 경험으로 《산해경》에 나오는 “동산경” 부분은 북미 산맥의 진실한 기록임을 발견했다. 고찰 중에 그녀는 일부 갑골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사실 고찰 기록은 (중국어로 번역되어) 《거의 퇴색된 기록》-해양출판사-라는 책에 실려 있다. 혹은 인터넷으로 ‘산해경》의 내용이 진실인가(《山海經》的內容是真的?)’라는 문장을 찾아보기 바란다.
이 기간에 우는 순임금의 봉선 전통을 계승해 천지의 덕을 밝혔다.
우가 이같이 큰 공을 세운 것을 감안해 순은 우에게 선양했다.
우는 사람을 시켜 구주를 측량하는 과정에서 한번은 그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산신, 수신, 하신 또 다른 신들이 모두 와서 일부 다른 지역의 산맥과 하천의 사정을 알려주었는데 그는 이것들을 일일이 기록했다. 나중에 대우의 시기 및 이후 수백 년의 일부 측량 기록이 더해져 후세인들이 정리한 것이 우리가 지금 보는 《산해경》이다.
그 시기에는 확실히 거인이 있었다. 《국어, 노어(魯語)》 중에는 “대우가 회계에서 여러 제후들을 만날 때 방풍씨가 늦게 도착하자 대우가 그를 죽였다. 그는 거인이라 할 수 있다. 뼈 한마디가 한 수레를 가득 채웠다. 나중에 방풍씨의 후세를 장적(長狄)족이라 불렀는데 《곡량전, 문공》에 보면 11년에 “장적은 신체가 9이랑을 가로지른다.”고 했다. 인간 세상은 상생상극이라 거인이 있으면 또 소인이 있게 마련이다. 《산해경, 대황동경》에는 “소인국이 있는데 이름을 정인(靖人)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거인과 소인에 관해서 우리 현대 고고학계에서도 그 골격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는 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인터넷에 검색어 ‘거인’ ‘소인’ 등을 넣어보면 관련 항목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중국대륙에서는 인터넷 방화벽을 돌파해야 한다.)
요,순,우 시대는 우리가 현재 진화론에 따라 사고하면 당연히 문명의 초기 시대라 매우 낙후되고 원시적이라고 여긴다. 엄격히 말하면 이번 차 문명 시초 그 시기에 지난 차례 문명에서 남아 내려온 것이 많다. 게다가 당시에는 사람이 신과 함께 하던 시기라 수많은 신의 흔적이 펼쳐졌다. 이런 것들은 《상서》, 《산해경》 등에 다 기록이 있다. “정위전해(精衛填海, 정위가 바다를 메꾸다)” 와 “과부축일(誇父逐日, 과보가 해를 쫓다)” 등의 전설은 이 시대에 생긴 것이다. 신이 사람에게 이런 전설들을 남겨놓은 것은 사람에게 지상의 생명이 외부환경을 탐색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간고한 노력과 거대한 대가를 지불했음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당시 중화문명의 불씨는 전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덮을 수 있었다.
미국의 인디안 문명, 마야문명 내지 에스키모인 등은 중화의 상고문명(이것은 개괄적이며 중화대지에 번성했던 여러 사전 문명을 포함해서 일컫는 말이다)의 가지에 속한다. 즉 사전문명 말기의 성과를 계승한 사람들이 미주로 옮겨가 만든 것이다. 물론 이주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상나라 말기에 이주한 이민자들도 포함한다. 그래서 그 발전한 표현 역시 각기 다른 점이 있다. 옮겨가는 방식도 어떤 경우에는 알래스카와 아시아 대륙 사이를 거쳤고 어떤 경우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를 따라 알류샨 군도 등을 거쳐 갔다. 혹은 인도네시아와 호주를 표류해 바다를 건너기도 했다. 당시의 해수면은 지금과 달랐고 기후도 달랐으며 어떤 경우는 신이 직접 보내준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한바탕 큰 바람이 지나간 후 사람들이 눈을 떠보니 이미 다른 생소한 대륙에 도착해 있는 등이다. 그 시간은 매우 긴 역사의 단계를 걸쳤다. (수만 년)
만약 수로(강)를 소통함을 말한다면 백성들이 편안히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형을 측량하는 것은 사방을 알기 위함이다. 그럼 《산해경》이나 《낙서》를 얻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신이 나중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해외로 방랑한 사람들을 잊어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장래의 사람이 조상을 알아보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증빙을 남겨놓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신은 후세인들에게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산해경》을 남겨 놓은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이 함께 그 진상을 파헤치고 중화 신전 문화의 역사의 맥락을 다시 연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동시에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인간의 기운’(‘인문물질장人文物質場’ 이라 부르는 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을 쌓게했는데 근본 목적은 바로 사람들에게 신이 일체를 순서 있게 안배하고 신의 자손임을 알게 하며 마지막에 함께 신을 찾아 창세주의 리드하에 진정으로 신이 되는 길에 오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낙서》의 내포와 표현은 매우 광대해서 여기서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그중 하나만 말한다. 그것은 인간세상의 산수와 천상이 물질장의 방면에서의 대응하는 규칙이다. 나중에 주 문왕이 낙서를 보고 후천 팔괘를 연역해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당시 사람들은 기억력이 아주 좋아서 어떤 사람들은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대우의 후기가 되어 사람들은 점점 거북 등에 갑골문자를 새기는 이기(利器)를 개발해 냈다. 그래서 일부 기록이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인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상고의 일부 일들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좀 보충하자면 문자는 절대 어느 부족의 문명 정도의 표지로 삼을 수 없다. 상왕조 이후에는 절대적인데 그 이전에는 그리 절대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상나라 이전에 문자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며 이런 개념이 아니다. 문명의 발전 방식은 다원적이며 모두 한 가지 형식만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6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