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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22): 묵해연필(墨海椽筆)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2절 묵해연필(墨海椽筆)―서법의 대가

태종은 중국 역사상 걸출한 제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서법(書法역주:우리나라에서는 서예,일본에서는 서도로 불린다)의 역사에서도 비범한 성취를 보여주었다.태종은 어려서부터 묵향(墨香)의 훈도를 받아왔다.비록 반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바쁘게 살았음에도 그는 기회만 닿으면 붓을 들어 글씨를 쓰곤 했다.

태종은 특히 왕희지(王羲之왕우군이라고도 하며 서성書聖으로 존칭된다)의 서법을 좋아해‘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평가했고 일찍이 막대한 상금을 걸고 왕희지가 남긴 유묵을 모으게 했다.또한《왕희지전(王羲之傳)》을 직접 짓기도 했다.태종의 서법은 왕희지의 진수를 깊이 체득해 필획이 시원하면서도 매끄럽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아주 자연스럽다.

태종이 쓴《진사명(晉祠銘)》은 행서의 선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얻기 힘든 서법 명비석이다.

태종은 진서(眞書해서를 말함),행서(行書),초서(草書),예서(隸書),비백서(飛白書)에 모두 능했다.여기서 비백(飛白)이란 숙달하기 아주 어려운 필묵의 기교를 말하는데 태종 당시 사람들이 특히 중시했고 대신들도 앞을 다퉈 그 글씨를 얻고자 했다.그의 서법 작품은 힘차게 솟구치면서도 붓의 사용이 풍만하고 원윤(圓潤)해 내력이 웅건하다.

송나라 때 주장문(朱長文)이 지은《속서단(續書斷)》상권에서는 그의 서법을‘묘품(妙品)’에 올려놓고“붓의 사용이 웅건하면서도 아름다워 마치 난새나 봉황이 나는 듯하며 규룡(虯龍)이 도약하는 것처럼 가장 오묘하다.”고 논했다.하지만 태종의 서법은 문치(文治)・무공(武功)에 가려져 후인들 중에 그의 서법에 주목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일신에 천하의 대권을 지닌 제왕으로서 태종은 중국 서법의 유산에 대해 대대적으로 체계적인 수집과 정리 및 총결을 했다.일찍이“고금에 종요(鍾繇),왕희지 등의 뛰어난 진적(真跡)을 모아1510권을 얻었다.”또 서법을 정식 교육에 편입시켜 당나라 때 학교교육의 주요6과목 중 서법이5번째가 되었다.또 과거(科擧)나 학교에서 공과(功課학력평가)를 볼 때도 서법이3번째 과목이었다.답안을 쓸 때 해서(楷書)로 쓴 글이 아름다워야 합격할 수 있었으며 글씨를 잘 쓰지 못하면 관리가 될 수 없었다.

태종은 특히 왕희지에 대한 정이 유별났다.태종은 칙령으로 왕희지 작품을 고가에 구매하게 했다.여기에는 왕희지의 해서,행서,초서를 다 포함하며 그중에는 유명한《난정첩(蘭亭帖)》이 있었다.태종은 자신만 열심히 임모(臨摹역주:원본 글씨를 보고 따라서 쓰는 것)했을 뿐 아니라 태자 및 여러 왕들에게도 왕희지 글씨를 배우게 했다.그의 교육과 강력한 추진에 의해 고종(高宗),예종(睿宗),현종(玄宗),숙종(肅宗),선종(宣宗)등 당나라 여러 황제와 왕자 및 왕손들은 모두 서법을 배우고 애호했으며 그 영향은 신료들은 물론 민간에까지 미쳤다.

태종은 당세(當世)의 서법대가로 왕희지의 정화를 깊이 체득했다.

송나라 때 장뢰(張耒)는《완구집(宛丘集)》에서 태종을 언급하면서“붓의 사용이 정교하고 법도(法度)가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워 이왕(二王왕희지와 왕헌지)의 첩 속에 같이 두면 진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했다.실제로 송나라 때 유명한 법첩(法帖모범이 되는 글씨들을 모아놓은 것)인《순화각첩(淳化閣帖)》제7권에는 태종이 임모한《자위첩(自慰帖)》,《만복첩(晚複帖)》이 왕희지 작품 속에 들어가 있다.

태종은 또 친히 왕희지를 위한 전을 써서《진서(晉書)》 〈왕희지전론(王羲之傳論)〉을 지었다.

《왕희지전론(王羲之傳論)》

문자의 흥기는 중고(中古)시기에 시작되었으나 결승(結繩)문자나 새 발자국 같은 문자는 감상하기엔 부족하다.후대의 서법가들은 순박함에서 벗어나 화려함을 숭상하며 종이를 펼쳐 글씨를 쓰기만 하면 서로 다투고 과장하며 기교를 경쟁했다.장백영(張伯英초서로 유명한 후한의 서법가 장지張芝)이 연못에 가서 연습하며 쓴 오묘한 묵적들은 일찍이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또 위 무제 조조가 일찍이 장막에 걸어놓고 감상했다던 사의관(師宜官후한의 서법가)의 기묘한 작품들 역시 남은 작품이 거의 없다.오직 위진(魏晉)시기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서야 대략 담론할 수 있다.

종요의 글씨는 비록 당시 사람들로부터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았고 확실히 탁월함이 있지만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의심이 든다.먹을 사용한 농담이나 구조의 소밀이나 천상의 구름처럼 자유자재한 운필은 비평할 수 없다.하지만 그의 글자체를 보면 고법(古法)에 얽매여 새로운 뜻이 없었고 아울러 글자를 너무 길게 써서 규격을 넘어섰다.대체적으로 말해서 이것이 바로 그의 단점이다.

왕헌지(王獻之왕희지의 아들)는 비록 부친의 풍격은 지녔으나 새로운 기교는 전혀 없다.그의 서법을 보면 성기고 말라서 마치 한겨울의 고목 같고,그의 필적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얽매임에 치우쳐 마치 엄한 주인의 단속을 받는 굶주린 하인 같다.고목은 비록 가지가 나도 굽거나 펼칠 수 없고,굶주린 하인은 다만 수척하게 구속되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이 두 가지를 겸했으니 진실로 서법의 병폐라 할 수 있다!

근세에 소자운(蕭子雲남조의 서법가)이 강남에서 명성을 날렸지만 겨우 글을 완성할 수 있을 뿐 대장부의 기개는 아예 없다.매 행마다 모두 봄날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 같고 매 글자마다 가을 뱀이 또아리를 튼 것 같다.마치 왕몽(王濛동진의 명사이자 서법가)이 종이 위에서 잠자는 것 같고 서언(徐偃후한의 학자)이 붓 아래 앉아 있는 것 같다.비록 천 마리 토끼의 털을 뽑아 좋은 붓을 만들지언정 근력이라곤 전혀 없고 만 그루 나무껍질로 좋은 종이를 만들지라도 도리어 반 푼어치의 골력(骨力)도 찾을 수 없다.이런 서법이 아름답다고 찬미된다면 헛된 명성이 아니겠는가?

이상 몇 사람은 모두 실제보다 명성이 지나치다.때문에 고금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 서법을 정밀히 연구해보니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은 오직 왕희지뿐이로다!그 글씨의 정교한 점 하나 획 하나와 배치의 오묘함이 마치 자욱한 안개 속에 이슬이 맺히듯 끊어진 것 같으면서도 이어져 있고,봉황이 날고 용이 서린 것처럼 그 기세가 기운 것 같아도 오히려 반듯하다.아무리 감상해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고 아무리 둘러봐도 그 단서를 알 수 없으니 마음으로 본받고 손으로 따라 할 이는 오직 이 사람뿐이로다.그 나머지 부류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書契之興,肇乎中古,繩文鳥跡,不足可觀。末代去樸歸華,舒箋點翰,爭相誇尚,競其工拙。伯英臨池之妙,無複餘蹤;師宜懸帳之奇,罕有遺跡。逮乎鍾、王以降,略可言焉。

鍾雖擅美一時,亦爲迥絕,論其盡善,或有所疑。至於布纖濃、分疏密,霞舒雲卷,無所間然。但其體則古而不今,字則長而逾制,語其大量,以此爲瑕。

獻之雖有父風,殊非新巧。觀其字勢疏瘦,如隆冬之枯樹;覽其筆蹤拘束,若嚴家之餓隸。其枯樹也,雖搓擠而無屈伸;其餓隸也,則羈羸而不放縱。兼斯二者,固翰墨之病歟!

子雲近世擅名江表,然僅得成書,無丈夫之氣。行行若縈春蚓,字字如綰秋蛇,臥王濛於紙中,坐徐偃於筆下;雖禿幹兔之翰,聚無一毫之筋;窮萬穀之皮,斂無半分之骨。以茲播美,非其濫名耶?

此數子者,皆譽過其實。所以詳察古今,研精篆、素,盡善盡美,其惟王逸少乎!觀其點曳之工,裁成之妙,煙霏露結,狀若斷而還連;鳳翥龍蟠,勢如斜而反直。玩之不覺爲倦,覽之莫識其端。心摹手追,此人而已。其餘區區之類,何足論哉!

태종은 또《지의(指意)》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의(指意)》

“무릇 글자는 신(神)을 정백(精魄)으로 하니 신이 모르면 글자에 태도가 없게 된다.또 중심(心붓의 가운데 부분)을 근골(筋骨)로 삼으니 중심이 굳세지 않으면 글자에 경건함(勁健굳세고 건강함)이 없게 되고,잔털(副毛중심 주변의 짧은 털)을 피부로 삼으니 잔털이 둥글지 않으면 글자에 따스한 윤기가 없다.중심과 잔털을 같이 사용해야 하며 신기(神氣)의 충화(沖和)에 오묘함이 있다.지금 경중을 따져보면 손가락과 손목을 사용하는 것이 붓끝만 못하고 붓끝을 사용하는 것이 충화한 기운만 못하다.기운이 충화하면 자연히 손이 가볍게 비고 붓끝이 저절로 안정된다.

대체로 마음이 기에 합해야 하고 기는 마음에 합해야 하는데 신(神)은 마음의 작용이라 마음이 반드시 고요해야 한다.우안길(虞安吉)이 이르길 대체로 서(書)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한 점 한 획을 모두 모본과 똑같음을 추구해야 하는데 오히려 스스로 졸렬함을 취한다면 이를 어찌 서(書)라 할 수 있겠는가?제멋대로 써서 본래 모양과 비슷하더라도 글자체의 모습이 진실을 잃는다면 그 글자의 형상은 그릴 수 있겠지만 필의(筆意)는 이해할 수 없다.이는 마치 월나라 추녀가 서시(西施)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여겨 따라했지만 서시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처음 배우는 자는 그 조야함을 얻었을 뿐 그 정묘함을 얻지 못한다.너무 느슨히 하면 붓놀림이 정체되어 힘이 없고 너무 서두르면 붓놀림이 빨라서 뼈대가 없게 된다.붓털을 눕히면 둔하고 느려져서 살이 너무 많아지고 붓을 세워 붓끝을 곧게 하면 마르고 메말라 뼈가 드러난다.그러다가 깨달음에 이르면 마음이 움직임에 따라 손힘이 고르게 된다.둥근 것은 그림쇠(規)로 그린 것 같고 네모난 것은 곱자(矩)로 그린 듯 거칠면서도 예리하고 섬세하면서도 웅장할 수 있다.길어도 남음이 없고 짧아도 부족함이 없으니 생각이 신(神)과 합해 자연과 같아지니 그렇게 되는 이유를 모르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전당문》10권)

태종은 자기 서법의 심법(心法)을 후세에 남겨놓았다.

《논서(論書)》

“당태종이 일찍이 조신들에게 말했다. ‘서학(書學)은 소도(小道)이니 처음부터 급하게 힘쓰지 말아야 한다.마음에 두고 때때로 연마하는 것이 하루 종일 허비하는 것보다 낫다.대체로 여러 기예(技藝)는 먼저 학문을 배우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병폐는 심력(心力)이 나태해져 전일하게 정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있다.

짐은 어려서부터 여러 차례 적진(敵陣)과 조우하며 정의의 기치를 든 이래 곧 적들의 난을 평정해왔다.징과 북을 잡고 군사들을 지휘했는데 적의 진(陣)을 보기만 해도 강약(强弱)을 알 수 있었다.이때 아군의 약한 곳으로 적의 강함을 상대하고 아군의 강한 곳으로 적의 약점을 상대한다.적이 아군의 약한 곳을 침범한 것이 백 수십 보를 넘기지 않을 때 적의 약점을 공격하면 반드시 그 진을 돌파할 수 있었고,적진을 뒤로 돌아 다시 반격하면 크게 깨뜨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방식을 사용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으니 짐의 생각이 깊은 이치를 얻은 것이다.지금 내가 고인(古人)의 서법을 임모(臨摹)할 때 따로 그 형세를 배우지 않고 오직 그 골력(骨力)만을 추구했을 뿐이지만 형세가 저절로 생겨났다.내가 한 일이 모두 먼저 뜻에 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 필법(筆法)은 태종 병법(兵法)과 무공(武功)의 오묘함을 얻었으니 문무(文武)가 서로 협조해 융회관통했다.《필법결(筆法訣)》은 대의를 귀납했다고 할 만하다.

점(點),획(劃),별(撇),수(豎),과(戈),환(環),파(波)등 서법의 기본필법 중에 모두 상세하게 힘을 쓰고 뜻을 쓰는 오묘함을 지시했다.가령 점(點)을 쓸 때는 반드시 수렴해야 하며 잘 쓰려면 빈틈이 없고 두터워야 한다.과(戈)를 쓰려면 반드시 넉넉하고 윤기가 있어야 하며 잘 쓰려면 의심하고 주저하는 것처럼 돌아봐야 한다는 등이다.구체적으로 글자를 쓰는 방법에 있어서 어떻게 기교를 부리고 어떻게 뽑고 어떻게 벗어나느지,서법의 뜻을 직접 논술했다.

《필의론(筆意論)》에서 태종은 왕희지 서법을 임모한 심득을 말했다.

“무릇 서법을 배우는 자는 먼저 반드시 왕우군(王右軍왕희지)의 절묘하고 득의한 곳을 알아야 하는데 해서는《악의론(樂毅論)》,행서는《난정서(蘭亭)》,초서는《십칠첩(十七帖)》에서 한 글자라도 죽은 점획이 없게 하는 것이 서(書)의 도(道)다.”

태종의 비백서(飛白書)

태종은 비백서에 정통했다.비백서란 일종의 사의(寫意)방법을 말하는데 전하는 말로는 동한 영제(靈帝)시기의 유명한 서법가 채옹(蔡邕)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홍도문(鴻都門)앞에서 기다리다 문을 수리하던 장인이 벽을 칠하는 솔로 글자를 쓰는 것에서 계발을 받아 창안했다고 한다.비백서는 필획이 마치 실을 풀어놓은 것처럼 흰 부분이 드러나고,필세(筆勢)가 나부끼는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송의 서법가 황백사(黃伯思)는“실을 풀어놓은 것 같은 필적을‘백(白)’이라 하고 그 기세가 마치 날아오르는 것 같아‘비(飛)’라고 한다.”고 했으며“‘서성(書聖)’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는 모두 비백에 정통했다.”고 했다.

《서사회요(書史會要)》에서는“당태종은 비백에 능했는데 필력이 굳세고 씩씩해 당시의 으뜸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의 장언원(張彥遠)은《서법요목(法書要目)》에 다음과 같은 일화를 기록했다.

정관18년(644년) 2월17일 태종이 현무문에서 삼품이상 대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식사를 하는 동안 태종이 붓을 들어 비백서를 썼다.신하들이 이를 보고는 모두들 찬사를 보냈는데 일부 신하들이 술김을 이용해 앞 다퉈 태종의 손에서 묵적(墨跡서법 작품)을 채갔다.심지어 산기상시(散騎常侍)유계(劉洎)는 태종의 용상위로 뛰어올라와 비백서를 가져갔다.그러자 태종의 글씨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분분히 유계가 용상에 뛰어올라 황제의 위엄을 범했으니 그 죄가 죽여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태종은 웃으면서“전에 비빈(妃嬪)이 구실을 찾아 황상이나 황후의 수레에 올랐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대신이 황제의 용상에 뛰어오르는 모습은 오늘에야 직접 보게 되었소.”라며 재치 있게 넘겼다.

마주(馬周)에게 비백서를 하사하다

또《신당서‧마주전(馬周傳)》에는 태종이 마주에게 비백서를 하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주는 자가 빈왕(賓王)으로 박주(博州)치평(茌平)사람이다.정관5년 천하에 가뭄이 들자,태종이 여러 차례 백관을 이끌고 기우제를 지내고 또 조서를 내려 모든 신하들에게 조정의 정치 득실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내게 했다.당시 중랑장(中郎將)상하(常何)가 자택에 돌아와 고민에 잠기자 마침 그의 집에 식객으로 머물던 마주가 곧바로 책상에 엎드려20여 개의 계책을 작성했는데 문장이 뛰어나면서도 아름다웠다.이튿날 조정에 들어간 상하가 불안한 마음으로 마주가 쓴 주소(奏疏)를 태종에게 바쳤다.

태종이 글을 읽고는 크게 칭찬하면서 관련 부서에 실행 가능한 지 여부를 확인해보게 했다.하지만 문관도 아닌 무장이 이런 신필(神筆)을 쓴 것을 이상히 여긴 태종이 진위를 확인하자 상하는 식객인 마주가 대필했노라고 사실대로 고백했다.

“마주는 집안이 몹시 가난하지만 열심히 학문에 분발했으며 특히 선진(先秦)제자(諸子)의 전적에 정통합니다.청고하면서 고오(高傲)하지만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빈털터리라 늘 남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온갖 고생을 겪은 후 장안에 와서 신의 집에 머물고 있는 당대의 뛰어난 기사(奇士)입니다.”

이에 태종이 마주를 궁궐로 불렀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자 네 번이나 사자를 보내 속히 알현하라고 재촉했다.마침내 마주가 알현하자 태종이 그와 대화를 나눠본 후 크게 기뻐하면서 문하성에 배치해 감찰어사에 임명했다.또 뛰어난 인재를 얻게 해준 상하에게도 비단3백필을 상으로 주었다.

정관12년(638년)마주가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태종은 일찍이 좌우 시신들에게 말하길“짐이 하루라도 마주를 보지 못하면 그를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당시 재상이었던 잠문본(岑文本)역시 마주의 재능이 한나라의 장량(張良)이나 종군(終軍한 무제 때 남월을 평정한 정치인)보다 낫다고 하면서 마주의 재능에 깊은 찬사를 보냈다.

정관18년 마주는 중서령(中書令중서성의 수장)으로 승진했고 황태자 이치의 스승인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를 겸해 나중에 이치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태종은 일찍이 비백서를 마주에게 하사하면서“난새와 봉황이 하늘에 오르려면 반드시 날개가 필요하고 팔다리(股肱대신)에 의지하려면 충성스런 힘이 있어야 한다(鸞鳳沖霄,必假羽翼;股肱之寄,要在忠力).”라고 했다.

진사명(晉祠銘)

진사명은 진사(晉祠태원에 위치한 진晉의 시조인 당숙우를 모신 사당)에 새긴 글씨와 비석으로 진사 정관보한정(貞觀寶翰亭)안에 있다.명나라 때 조함(趙涵)이 찬한《석묵전화(石墨鐫華)》에서는“당나라가 천하를 얻은 후 태종이 진후에게 제사를 지내며 명을 지었다.고조가 기병할 때 일찍이 진후의 사당에 기도를 올렸는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태종이 직접 문장을 짓고 글을 썼는데 전적으로 성교서(聖敎序)와 난정서(蘭亭)를 본받아 종횡으로 자유자재했다.”

진사는 당숙우(唐叔虞주나라 무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동생)를 모신 사당으로 이세민 부자가 태원에서 기병할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적이 있다.당나라가 건립된 후 태종은 정관20년(646년)다시 이 사당에 행차해 숙우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비석에 문장을 새겨 당숙우의 건국책략을 찬양했다.

진사명은 태종이 직접 문장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정관21년(647년) 8월 비석에 새겼다.비문(碑文)은 전문이1203자로 모두28행으로 되어 있다.비문은 행서체로 힘차고 표일하면서도 탈속해 골격에 웅장한 힘이 넘치고 새긴 글자도 세련되어 가히 행서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비석 전체가 자재하고 생기가 넘치며 신채와 정기가 비범해 일대 영명한 군주의 기개와 풍채를 유감없이 체현했다.

청나라 때 비석 연구가 양빈(楊賓)은《대표우필(大瓢偶筆)》에서“지금 이 비석을 보면 절대적으로 필력을 위주로 하여 글자와 여백을 구별할 수 없지만 웅후하게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한 획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청나라 학자 전대흔(錢大昕)은“서법은 회인(懷仁)이 왕희지 글씨를 모아 만든《집자성교서》와 유사하니 대체로‘마음으로 본받고 손으로 따라 할 이는 왕희지 뿐’이라던 태종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또 청나라 사람 왕우(王佑)는 시로 찬양했다.

평생 서법이 왕우군을 따르니

난새와 봉황이 날고 용과 뱀이 감쌌네!

일시에 온 천하에 학사가 가득 찼으니

우세남 저수량 구양순 유공권 모두(태종에게)절을 올려야 하리.

平生書法王右軍평생서법왕우군

鸞翔鳳翥龍蛇繞난상봉저용사요

一時學士滿瀛州일시학사만영주

虞褚歐柳都拜倒우저구유도배도

이 비석의 서법은 혼연하고 자연스러우며 필획의 결실이 시원시원해 인위적인 티가 나지 않아 행서의 선구가 되었다.역대로 중국인들이 글자 쓰기는 단지 일상생활의 일부분에 불과했고 특별히 중시 받지 못했다.아울러 이 비석 이전의 서법 명가(名家)들은 대부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서법의 진리를 발견한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당태종이다.웅장하고 기세가 크며 명가들을 배출한 대당(大唐)의 서법이3백년간 성대한 사업을 이루게 된 것은 태종이 서막을 열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https://www.zhengjian.org/node/153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