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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조조(9): 동작대와 건안시기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건안 14년(209년) 봄 3월 조조의 군사가 초(譙, 안휘성 박현)로 돌아와 가벼운 배를 만들어 수군을 훈련시켰다.

가을 7월에 와수(渦)에서 회수(淮)로 들어가 비수(肥水)로 나오고 합비(合肥)에 진을 쳤다. 작피(芍陂 안휘성 수현 남쪽)를 개간해 둔전을 했다.

신미(辛未)일에 명령을 내렸다.

“근년에 우리 군대가 자주 출정을 나갔는데 간혹 역병을 만나 관리와 병사들이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못하면 가족들은 과부와 홀아비 신세를 슬퍼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떠돌고 있다. 어진 사람이 어찌 이를 기뻐하겠는가? 이는 부득이한 일이었다. 전사자가 있는 집 가운데 기본적인 일거리가 부족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현의 관리가 창고를 열어 나누어 주는 일을 끊지 말라. 장리는 그들을 구휼하고 위로하며 나의 뜻에 맞게 하라.”

원문: 自頃已來,軍數征行,或遇疫氣,吏士死亡不歸,家室怨曠,百姓流離,而仁者豈樂之哉?不得已也.其令死者家無基業不能自存者,縣官勿絕廩,長吏存恤撫循,以稱吾意.

적벽대전 이후 주유가 강릉의 조인을 공격한 지 1년이 넘자 조인이 버티지 못하고 강릉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조의 군사가 물러나서 양양과 번성을 지켰다. 이 기간에 유비는 소수병력으로 주유를 도와 강릉을 공격했고 주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형주의 장강 이남 지역인 무릉(武陵), 장사(長沙), 계양(桂陽), 영릉(零陵) 4군을 차지했다. 또 원래 여강 군영을 이끌던 장수 뇌서(雷緒)가 수만의 인구를 이끌고 유비에게 귀속했다. 원래 형주에 있던 관리와 선비들의 상당수가 유비에게 귀부했다.

손권은 주유에게 남군(南郡)태수를 맡겨 강릉에 주둔하게 하고 정보를 강하(江夏)태수로 삼아 사선(沙羨)을 다스리게 했다. 또 여범(呂範)을 팽택(彭澤) 태수, 여몽을 심양령(尋陽令)으로 삼았다. 유비가 표문을 올려 손권을 거기장군 서주목으로 추천하고 또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게 했다. 유기가 사망하자 그의 여러 부하들과 손권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삼았다. 또 주유에게 남쪽 땅을 떼어 유비에게 주자 유비가 유구(油口)에 진을 세우고 공안(公安)으로 개명했다. 손권은 또 누이를 유비에게 시집보내 유비와의 동맹관계를 굳건히 다졌다.

건안 15년(210년) 겨울 조조가 업성에 동작대[銅雀台, 정식 명칭은 성천동작대(聖天銅雀台)]를 세웠다. 높이가 십장에 3개의 대를 만들었는데 각각의 거리가 60여 보 가량 되고 중간에 비교를 연결하니 전옥(殿屋)이 120칸이었다. 꼭대기에 구리로 만든 큰 봉황을 설치해 마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듯했다.

건안 17년(212년) 조조가 여러 아들들을 데리고 동작대에 올라가 각각 부를 짓게 했다. 조식은 “붓을 들자마자 금세 완성한” 《동작대부(銅雀台賦)》에서 “높은 문을 우뚝 세우니 쌍궐이 하늘 높이 뜬 것 같구나”라고 노래하면서 부친인 조조가 “온 세상에 어진 교화 드높이셨다(揚仁化於宇內)”고 찬탄했다. 또 부친의 성스런 덕으로 “천하의 법령을 같게 하시고 해와 달처럼 빛나시네”라고 칭송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밝은 임금(明后 조조)을 따라 즐겁게 노닐다동작대에 올라 정을 나누네광활하게 펼쳐진 태부(太府)를 바라보니성덕(聖德)으로 다스렸음을 알 수 있었네높은 문을 우뚝 세우니쌍궐(雙闕, 궁문 양쪽의 누대)이 하늘 높이 뜬 것 같구나하늘을 뚫을 듯 화려함이여구름다리는 서성까지 이어졌노라도도히 흐르는 장수를 내려다보며잘 익은 뭇 과일 바라다 보네화목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뭇 새들의 슬픈 노래 지저귀누나하늘의 공은 이미 세워졌고가문의 바람도 얻었도다온 세상에 어진 교화 드높이시니모두 다 경사에 공경하는구나비록 제환공 진문공이 성대했다해도성명(聖明)을 어찌 족히 비교하랴훌륭하고 아름답도다그 은택 멀리까지 펼쳐졌구나우리 황실을 보필하시어사방을 편케 하셨네.천하의 법령을 같게 하시고해와 달처럼 빛나시네영원한 존귀함 끝이 없으리니수명이 동왕(東王, 신선)과 같으리라

從明后而嬉遊兮(종명후이희유혜) 登層臺以娛情(등층대이오정)見太府之廣開兮(견태부지광개혜) 觀聖德之所營(관성덕지소영)建高門之嵯峨兮(건고문지자아혜) 浮雙闕乎太清(부쌍궐호태청)立中天之華觀兮(입중천지화관혜) 連飛閣乎西城(연비각호서성)臨漳水之長流兮(임장수지장류혜) 望園果之滋榮(망원과지자영)仰春風之和穆兮(앙춘풍지화목혜) 聽百鳥之悲鳴(청백조지비명)天功恒其既立兮(천공항기기립혜) 家願得而獲逞(가원득이획령)揚仁化於宇內兮(양인화어우내혜) 盡肅恭於上京(진숙공어상경)雖桓文之爲盛兮(수환문지위성혜) 豈足方乎聖明(기족방호성명)休矣美矣(휴의미의) 惠澤遠揚(혜택원양)翼佐我皇家兮,寧彼四方.同天地之規量兮(동천지규량혜) 齊日月之暉光(제일월지휘광)永貴尊而無極兮(영귀존이무극혜) 等年壽於東王(등년수어동왕)

조조가 건설한 업성(鄴城)은 궁성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원래는 궁궐과 백성들의 거주지가 느슨하게 섞인 상태였는데 기능을 명확히 나누고 구조도 엄격히 했다. 주요도로는 성문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고 간선도로가 대궐 문 앞에서 丁자 모양으로 교차되게 했다. 즉 중국 고대의 일반건축물 중에서 축선을 대칭으로 배치하는 수법을 도시 전체에 적용시켰다.

이 당시 업성은 정치, 군사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조, 조비, 조식이 직접 참여하고 이끈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친 건안문학(建安文學)을 창립했다. 동시에 조조는 또 민관의 음사(淫祀)를 두절시켜 저령(低靈)과 난잡한 귀신을 제거하고 정교(政敎)가 크게 행해지게 했다. 이는 신(神)이 전한 정통문화를 확실히 지켜 교란 받지 않게 함으로써 세인들이 바른 신앙(正信)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조조는 전국 각지의 유명한 방사(方士)들을 업성으로 초빙해 각종 방술(方術)을 경쟁시켜 업성은 당시 방술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위(魏)나라에서는 위아래가 도를 연마하는 풍습이 생겼고 도교가 흥성하게 발전했다.

12월 조조가 《봉읍을 사양하며 본뜻을 밝히는 글: 영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을 지었다.

“내가 젊어서 처음 효렴에 천거되었을 때 나 자신이 본시 암혈(岩穴)에 은거하는 유명인사가 아닌 까닭에 사람들에게 평범하고 어리석게 보일까 두려워했다. 한 군의 군수가 되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펼침으로써 명예를 세우고 세상 선비들이 나를 잘 알 수 있게 하길 원했다. 이런 이유로 처음으로 제남(濟南)에서 상(相)으로 있을 때 남을 해치거나 부정한 자들을 제거하고 공평무사하게 인재를 천거했다. 이로 인해 여러 상시(常侍 내시)들과 등을 지고 원망을 샀으며 권세가들의 미움으로 집안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병을 구실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관직을 떠났을 때 나이가 아직 어렸으니 같은 해에 효렴으로 천거된 이들을 돌아보니 나이가 오십이 되어도 늙었다 할 수 없었다. 속으로 앞으로 한 이십 년 동안 물러나 쉬면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린다 해도 동기들을 볼 때 이제 처음 천거된 이와 같아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고향에서 초현 동쪽 오십 리에 정사(精舍)를 짓고 가을과 여름엔 독서를 하고 겨울과 봄엔 사냥하면서 흙탕물로 길을 막아 왕래하는 손님들을 막고자 하였으나 뜻과 같이 되지는 못했다.

그 후 도위(都尉)가 되었으며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국가를 위해 도적을 토벌해 공을 세우는 데 뜻을 두고, 열후에 봉해지고 벼슬이 정서장군에 이르러 연후에 묘비를 지을 때 ‘한(漢)나라 정서장군(征西將軍) 조후(曹侯)의 묘’라고 쓰게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나의 뜻한 바였다.

그러나 동탁의 난을 만나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그 당시 병사를 모으고자 하면 많이 모을 수도 있었으나 나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군사가 많아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군사가 많아지면 뜻이 커지고, 강적들과 다투게 되어 다시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수(汴水) 전투에서는 병력이 불과 수천 명이었고, 그 후 양주(揚州)로 돌아가 다시 병사를 모집했을 때에도 역시 삼천이 넘지 않았으니, 이는 본래 뜻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연주를 맡아 황건적 삼십만을 격파해 항복을 받았다. 또 원술(袁術)이 구강(九江)에서 존호를 참칭하면서 그 아래 사람들이 다 신하라 칭하고 관부 문을 ‘건호문(建號門)’이라 했다. 또 의복을 다 천자의 복식에 맞춰 입고 두 부인도 황후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마음과 계획이 이미 정해지자 원술에게 즉시 제위에 올라 천하에 드러내 놓고 공포할 것을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원술은 ‘조공(曹公, 조조)이 아직 살아있으니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 후 내가 그의 네 장수를 사로잡고 그 일당을 많이 잡아 마침내 원술이 궁벽한 곳으로 도망치게 했으며 병들어 죽게 했다.

원소가 하북을 점거했을 때 병세가 강성했다. 스스로 세력을 헤아려 보아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만 죽음으로써 나라를 위하고 의를 위해 몸을 바친다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원소를 격파하고 그의 두 아들을 효수했다. 또 유표(劉表)가 종실을 구실로 간사한 마음을 품고 형주(荊州)를 점거하고는 나섰다 물러났다 하면서 세상일을 관망하기에 내가 다시 정벌해 드디어 천하를 평정했다. 이에 재상(宰相)의 몸이 되어 신하로서는 그 귀함이 극에 달했고 뜻한 바를 이미 넘어섰다.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스스로를 과시하는 듯하나 남의 말을 다하게 하려고 숨김없이 말할 뿐이다. 만약 나라에 내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했을지 모른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내가 강성한 것과 또 천명(天命)을 믿지 않는 성격을 보고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불손한 뜻이 있다고 말하며 함부로 억측할까 매번 마음이 불안했다.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이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 까닭은 그들의 무력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능히 주(周) 나라 왕실을 잘 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천하의 삼분의 이를 소유했지만 은(殷) 나라에 복종하고 섬김으로써 주(周) 나라의 덕이 가위 지극한 덕을 이루었도다.’ 라고 한 것은 무릇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악의(樂毅)가 조(趙) 나라로 달아났을 때 조왕(趙王)이 그와 더불어 연(燕) 나라를 도모하러 가기를 원하자 악의가 엎드려 울면서 대답했다. ‘신은 연나라 소왕(昭王)을 섬긴 것과 같이 대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만약 신이 죄를 지어 다른 나라에 있을지라도 죽은 다음에나 가능할 뿐입니다. 조나라의 노예조차 도모할 수 없는데 어찌 연왕의 후예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호해(胡亥)가 몽염(蒙恬)을 죽이려 할 때 몽염이 말했다. ‘선조 이래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진(秦) 나라에 신임을 받은 것이 3대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지금 병사 삼십여 만 명을 거느리고 있어 그 세력으로 배반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당할지라도 반드시 의리를 지킬 것을 스스로 알기에, 감히 선왕을 잊고 조상의 가르침을 욕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슬퍼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부로부터 부친, 내게 이르기까지 모두 황제와 가깝고 무거운 중책을 맡았으므로 신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조비와 조식 형제에 이르면 삼대를 넘는다. 나는 단지 그대들에게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며 처첩들에게도 항상 이런 말을 함으로써 모두가 다 나의 뜻을 잘 알게 했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은 마땅히 다 개가해서 나의 마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다 내 뜻을 알게 해라.’ 나의 이 말은 다 진심에서 나온 것이다. 거듭 삼가며 간절히 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주공(周公)이 사람들이 믿지 못할까 두려워 금등지서(金縢之書)로 해명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멋대로 병권을 돌려주고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화(禍)를 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자손을 위해서도,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헛된 명분 때문에 실질적인 화를 부를 수는 없다.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전에 조정에서 은총을 베풀어 나의 세 아들을 후(候)로 봉하고자 했으나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지금 다시 받고자 함은 영예를 더하려는 게 아니라 외원(外援)세력이 되게 하여 안전을 꾀하고자 함이다. 나는 개자추(介子推)가 진(晉) 나라의 작위를 사양하고 신포서(申包胥)가 초나라의 포상을 피해 달아났다는 일을 읽을 때마다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명령을 받들어 정벌에 나서 약한 병력으로 강적을 이기고 적은 군대로 대군을 붙잡았다. 내가 뜻하는 대로 움직여도 어그러진 적이 없었고, 생각한 일을 이루지 못한 바가 없었다.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황제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한(漢) 나라 황실을 도운 것이지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4현에 모두 책봉되고 식읍(食邑)이 삼만 호나 되니 내가 무슨 덕행으로 이를 감당하겠는가!

강호(江湖)가 아직 조용하지 않아 직위를 내놓을 수는 없지만 식읍은 양보할 수 있다. 지금 주상께 양하(陽夏)와 자(柘), 고(苦) 세 현의 식읍 2만 호를 반환한다. 다만 무평(武平)현 만 호의 식읍만으로 받음으로써 비방을 줄이고 나에 대한 질책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한다.”

원문: 孤始舉孝廉年少,自以本非岩穴知名之士,恐爲海內人之所見凡愚,欲爲一郡守,好作政教以建立名譽,使世士明知之.故在濟南,始除殘去穢,平心選舉,違迕諸常侍,以爲強豪所忿,恐致家禍,故以病還.去官之後,年紀尚少,顧視同歲中,年有五十,未名爲老,內自圖之,從此卻去二十年,待天下清,乃與同歲中始舉者等耳.故以四時歸鄉裏,於譙東五十裏築精舍,欲秋夏讀書,冬春射獵,求底下之地,欲以泥水自蔽,絕賓客往來之望.然不能得如意.

後征爲都尉,遷典軍校尉,意遂更欲爲國家討賊立功,欲望封侯作征西將軍,然後題墓道盲‘漢故征西將軍曹侯之墓’,此其志也.而遭值董卓之難,興舉義兵.是時合兵能多得耳,然常自損,不欲多之,所以然者,兵多意盛,與強敵爭,倘更爲禍始.故汴水之戰數千,後還到揚州更募,亦複不過三千人,此其本志有限也.後領兗州,破降黃巾三十萬眾.又袁術僭號於九江,下皆稱臣,名門曰建號門,衣被皆爲天子之制,兩婦預爭爲皇後.志計已定,人有勸術使遂即帝位,露布天下.答言‘曹公尚在,未可也’.後孤討禽其四將,獲其人眾,遂使術窮亡解沮,發病而死.

及至袁紹據河北,兵勢強盛.弧自度勢,實不敵之;但計投死爲國,以義滅身,足垂於後.幸而破紹,梟其二子.又劉表自以爲宗室,包藏奸心,乍前乍卻,以觀世事,據有當州,孤複定之,遂平天下.身爲宰相,人臣之貴已極,意望已過矣.今孤言此,若爲自大,欲人言盡,故無諱耳.設使國家無有孤,不知當幾人稱帝,幾人稱王.或者人見孤強盛,又性不信天命之事,恐私心相評,言有不遜之志,妄相忖度,每用耿耿.齊桓、晉文所以垂稱至今日者,以其兵勢廣大,猶能奉事周室也

《論語》云:‘三分天下有其二,以服事殷,周之德可謂至德矣.’夫能以大事小也.昔樂毅走趙,趙王欲與之圖燕.樂毅伏而垂泣.對曰:‘臣事昭王,猶事大王;臣若獲戾,放在他國,沒世然後已,不忍謀趙之徒隸,況燕後嗣乎!’胡亥之殺蒙恬也,恬曰:‘自吾先人及至子孫,積信於秦三世矣.今臣將兵三十餘萬,其勢足以背叛,然自知必死而守義者,不敢辱先人之教以忘先王也.’

孤每讀此二人書,未嘗不愴然流涕也.孤祖、父以至孤身,皆當親重之任,可謂見信者矣,以及子桓兄弟,過於三世矣.孤非徒對諸君說此也,常以語妻妾,皆令深知此意.孤謂之言:‘顧我萬年之後,汝曹皆當出嫁,欲令傳道我心,使他人皆知之.’孤此言皆肝鬲之要也.所以勤勤懇懇敘心腹者,見周公有《金滕》之書以自明,恐人不信之故.然欲孤便爾委捐所典兵眾以還執事,歸就武平侯國,實不可也.何者?誠恐已離兵爲人所禍也.既爲子孫計,又己敗則國家傾危,是以不得慕虛名而處實禍,此所不得爲也.

前朝思封三子爲侯,固辭不受;今更欲受之,非欲複以爲榮,欲以爲外援爲萬安計.孤聞介推之避晉封,申胥之逃楚賞,未嘗不舍書而歎,有以自省也.奉國威靈,仗鉞征伐,推弱以克強,處小而禽大.意之所圖,動無違事;心之所慮,何向不濟,遂蕩平天下,不願主命,可謂天助漢室,非人力也.然封兼四縣,食戶三萬,何德堪之!江湖未靜,不可讓位;至於邑土,可得而辭.今上還陽夏、柘、苦三縣戶二萬,但食武平萬戶,且以分損謗議,少減孤之責也.

이 문장은 조조의 폐부에서 우러난 것으로 벼슬길에 나선 이후 의(義)의 기치를 내걸고 황건적을 격파하고 원소와 원술을 토벌한 충성심이 가득하다. 비방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켰다. 이때 적벽 전투에서 패배해 정족지세(鼎足之勢)가 처음으로 형성되었고 조야에서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조조는 헌제가 봉읍으로 내린 세 현을 반환하는 기회를 이용해 “만약 나라에 내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했을지 모른다.”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헛된 명분 때문에 실질적인 화를 부를 수는 없으며” “강호가 아직 조용하지 않아 직위를 내놓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조조는 중원을 평정한 후 부패를 일소하고 바른 도를 떠받쳐 창생을 구제하고 한실(漢室)을 바로 잡았다. 한나라 사직은 조조 때문에 인해 몇십 년 더 지속될 수 있었다. 이 글은 후인들에게 조조의 커다란 충의(忠義)와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역사 속의 진짜 조조는 문예작품에 묘사된 그런 조조가 전혀 아니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