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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진시황(5): 봉선제천,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어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9. 봉선제천과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어

진시황은 5차례에 걸쳐 동쪽을 순행했고 마지막 순행 중에 하늘로 돌아갔다. 진시황은 봉선(封禪)제사를 지냈고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었다.

봉선이란 고대 제왕이 천지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의 일종이다. 《사기‧봉선서(封禪書)》, 《논형(論衡)》 및 《한시외전(韓詩外傳)》 등의 서적에는 모두 염제(炎帝) 이래 72명의 왕이 태산에서 봉(封)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복희, 신농, 염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우, 탕, 주 성왕(成王 무왕의 아들) 등이 모두 태산을 찾아가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황제(黃帝)는 일찍이 태산에 가서 봉선했다. 황제는 탁록(涿鹿)에서 치우와 큰 전투를 치르기에 앞서 태산을 선택해 봉선한 것으로 뭇신들이 크게 모였다. 《사기‧봉선서》에서는 “매번 흥성한 세대를 만날 때마다 봉선으로 응답하면 쇠퇴함이 멈췄다.(每世之隆,則封禪答焉,及衰而息)”고 한다. 제왕이 집정기간에 탁월한 공훈을 쌓아 천하가 태평하고 민생이 편안해져야만 비로소 봉선으로 하늘에 공을 보고할 수 있었다.

진시황 28년(기원전 219년) 문무대신 및 유생과 박사 70명을 이끌고 태산에 올라 성대하고 장중한 봉선대전(封禪大典)을 거행했다. ‘봉(封)’이란 흙으로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며 ‘선(禪)’이란 땅에 대한 제사를 말하는데 태산 아래 작은 산의 평지에서 땅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또 돌에 글자를 새겨 비석을 세웠다. 이것을 태산각석(泰山刻石)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시어 제도를 만들고 법을 밝히시니 신하들은 삼가 받들어 지킬지어다.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시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황제께서) 몸소 먼 곳의 백성들까지 순행하시다 태산에 올라 동쪽 끝까지 둘러 보셨다. 이에 수행한 신하들이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이런 업적을 이루게 된 근원을 따져 공덕을 기리며 찬양했다. 다스리는 도가 행해지자 천하의 모든 일들이 마땅함을 얻고 모두 법식을 갖추게 되었다. 큰 뜻이 아름답게 밝혀져 후세에 드리우니 변치 않고 순조롭게 이어지리라.

황제께서는 몸소 성덕을 베푸시어 이미 천하를 평정하시고 다스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주무시면서 천하를 이롭게 할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고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에 전념하셨다. 경전을 가르쳐 통달하도록 펼치시니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성스러운 뜻을 받들었다. 귀하고 천함이 분명해지고, 남자와 여자가 예를 따랐으며, (각자의) 직분을 삼가며 받들었다. 밝은 빛이 안팎을 비추니 천하가 맑고 깨끗해져 후대에까지 베풀어지리라. 교화의 미침이 무궁하니 삼가 조서를 받들어 이 엄중한 가르침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진시황은 순행에서 일찍이 구의산(九疑山 창오산이라고도 함.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 남쪽)에서 순임금께 제사를 지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순임금을 장사 지냈다고 한다. 진시황은 또 회계산(會稽山)에 올라갔는데 전설에 따르면 과거 우임금이 이곳에서 여러 제후들과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회계’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또 진시황이 이 산에 올라가 남해를 바라보았다고 해서 ‘진망산(秦望山)’이라고도 한다.

10. 천하를 순시하고 각석(刻石)으로 덕을 찬송

진시황 28년(기원전 219년) 동쪽 순행에 나섰다. 《사기‧진시황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남쪽으로 낭야산에 오른 후 크게 기뻐하며 석 달을 머물렀다. 이때 백성 3만 호를 낭야산 기슭으로 이주시키고 12년간 요역을 면제시켜주었다. 낭야대를 지어 석각을 세우고 진나라의 덕을 찬양하고 뜻을 얻은 심정을 밝혔다.”

“28년에 황제라고 처음 이름 지으셨다. 법도를 바르고 공평하게 하시니 만물의 기강이 생겨났다. 인사(人事)를 밝히니 아버지와 아들이 화목해지고, 성스러운 지혜와 인의로 도리를 분명히 밝히셨다. 동으로 가시어 동쪽 땅을 보살피고 병사들을 살펴보셨다. 큰일을 다 마치시고 바닷가에 이르셨다. 황제의 공(功)은 근본적인 일에 부지런히 노력하신 것이다. 농업을 숭상하고 말단(상공업)을 억제하시니 백성들이 부유해졌다. 널리 천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받들었다. 기물(器物)과 기계의 도량형을 통일하고 책의 문자도 같게 하셨다. 해와 달이 비추고 배와 수레가 다니는 어디라도 모두 황제의 명을 시행하니 뜻을 얻지 못함이 없었다.

사시에 따라 일을 하시니 오직 황제뿐이셨다. 서로 다른 풍속을 바로잡으시려 산과 물을 건너셨다.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의심스러운 것을 없애고 법령을 정해 어떤 일을 해선 안 되는지 모두 알게 하셨다. 지방장관의 직무를 나누니 모든 정무가 쉬워졌다. 모든 조치가 합당하여 계획과 다른 것이 없었다. 황제의 밝은 통찰로 사방을 두루 살피시니 신분이 높건 낮건 귀하거나 천하거나 분수를 넘지 않게 되었다.

간사함을 용납하지 않으시니 모두 바르고 착해지는데 힘을 썼다.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온 힘을 다하시니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함이 없으셨다. 멀던 가깝던 구석지던 엄숙하고 반듯해지는데 온 힘을 기울이셨다. 정직하고 충성을 다하니 사업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황제의 덕으로 사방 끝까지 안정되었다. 난을 주벌하고 해악을 제거하며 이로움을 일으켜 복을 이루셨다. 때에 맞춰 일을 줄이시니 모든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백성들이 편안해지니 무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육친이 서로 보살피니 마침내 도적이 없어졌다. 백성들이 기꺼이 교화를 받들며 법령과 제도를 모두 알게 되었다. 천지사방이 모두 황제의 땅이었다. 서쪽으로는 유사(流沙)를 건너고, 남쪽으로는 북호(北戶)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동해를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대하(大夏)를 지났다. 사람의 발자취가 닿는 곳이라면 신하가 아닌 자가 없었다. 공은 오제(五帝)를 뛰어넘고, 은택은 소나 말에게까지 미쳤다. 은덕을 입지 않는 자가 없이 각자 편안함을 누렸다.”

진왕(秦王 진시황)이 천하를 아우르고 황제(皇帝)라는 이름을 처음 세우셨다. 이에 동쪽 땅을 순시해 낭야에 이르렀다.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 창무후(昌武侯) 성(成),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등 여러 후와 승상 외림(隗林), 승상 왕관(王綰), 경(卿) 이사(李斯), 경 왕무(王戊), 오대부(五大夫) 조영(趙嬰), 오대부 양규(楊樛)가 황제를 수행하며 바다 위에서 논의했다.

“고대 제왕들은 땅이 천리를 넘지 않았고, 제후는 각자 자기 봉토를 지키면서 어떤 이는 조회를 들고 어떤 이는 들지 않으면서 서로 침략함이 잔인하고 어지러워 잔혹한 정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금석(金石)에 이를 새겨 자신을 기념했다. 또 고대의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은 지식과 교화가 다르고 법도가 분명치 않게 되자 귀신의 위세를 빌려 먼 곳을 속였으니 실제와 명분이 달라서 오래가지 못했다. 그 몸이 죽기도 전에 제후들이 배반해 법령이 실행되지 않았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을 만드시니 천하가 평화로워졌다. 종묘를 빛나게 하시고, 몸소 도를 행하며 덕을 베푸시니 존귀한 호칭이 크게 갖추어졌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함께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고 이를 금석에 새겨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황(皇)’이란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대(大)다. 자(自)를 따르니 자는 시작이란 뜻이다.[大也;從自;自,始也]”라고 했다. 나중에 간단히 백(白)으로 변했다. ‘왕(王)’ 위에 ‘백(白)’이 있으니 휘황한 왕이란 뜻이 되어 일반적인 왕과는 구별된다. 시황(始皇)이란 삼황과 대군(大君 큰 임금)이란 뜻이다. 《상서(尚書)·서소(序疏)》에서는 “황(皇)이란 아름답고 큰 것을 이르는데 제(帝)보다 큰 것을 말한다”고 했다. ‘황(皇)’은 또 신화에 나오는 신(神)을 가리킨다.

중국에서 ‘황제(皇帝)’란 호칭은 진시황부터 시작되었고 진나라 이후 천자들은 모두 이어서 사용했다. 창세주(創世主)께서 진시황을 최초의 개원(開元) ‘시황제’가 되도록 배치하셨으니 그에게 천지를 내려다볼 영광과 위풍을 주신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인류도덕의 전반적인 추세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으로 각각의 ‘천고영웅(千古英雄)’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사명이 있다. 진(秦)에 이르렀을 때 사람의 도덕은 이미 요순(堯舜)시대와는 멀어졌고 과거 다스림의 이치를 인용해도 전처럼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시황제는 대진(大秦)의 새로운 황조를 열었기 때문에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할 법률과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진시황의 공적은 아주 거대하고 그 은덕(恩德) 역시 몹시 커서 삼황오제의 아래에 있지 않다는 심경을 생생하게 석각 위에 새겨놓았다.

한편 진시황은 동쪽으로 낭야로 순행하던 도중 노산(嶗山)에서 ‘천세옹(千歲翁)’ 안기생(安期生)을 만났다. 안기생은 하상공(河上公)을 스승으로 따랐다. 안기생은 진시황과 “삼일 밤낮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며” 수련과 양생의 도에 대해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또 진시황을 위해 글을 남겨놓고 떠났는데 천년 후 “봉래산으로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했다.[이상은 한나라 유향이 지은 《열선전(列仙傳)》과 진(晉)나라 때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고사전(高士傳)》에 출처가 있다.]

이듬해 진시황이 다시 동쪽으로 순행에 나서 낭야와 지부 일대에 와서 지부산에 올라 돌에 글을 새겼다(지부석각).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9년 음력 2월 봄, 바야흐로 봄기운이 일어나던 때 황제께서 동쪽으로 행차하시어 지부산(之罘山)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셨다. 수행한 신하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며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공적을 기리며 칭송했다. 위대한 성군(聖君)께서 다스림의 도를 만드시고, 법도를 제정해 기강을 분명히 밝히셨다. 밖으로는 제후들을 교화해 널리 문치(文治)의 은혜를 베푸셨고 대의와 도리를 밝히셨다. 6국이 교화를 회피하며 탐욕과 잔악을 멈추지 않고 학살을 그치지 않았다. 황제께서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어 마침내 군대를 내어 토벌하시니 무덕(武德)을 크게 떨치셨다. 정의롭게 토벌하고 믿음으로 행하시니 그 위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강제와 폭력을 없애고 백성들을 구제해 천하를 두루 안정시키셨다. 밝은 법을 베풀어 천하를 다스리시니 영원한 모범이 되셨도다. 위대하구나! 온 천하가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따르는구나! 여러 신하들이 공을 노래하며 비석에 새겨 영원한 본보기로 드리워 나타내노라.”

동쪽을 둘러보고 지은 동관(東觀) 각석(刻石)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9년, 황제께서 봄에 유람하시어 먼 곳까지 두루 살펴보셨다. 바다에 이르러 지부산에 올라 아침 해를 보셨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며 수행한 신하들이 모두 다스림의 도가 지극히 밝음을 생각했다. 성스러운 법을 처음 일으켜 안으로 깨끗이 정리하시고 밖으로는 억세고 난폭한 자들을 주벌하셨다. 무위(武威)를 두루 떨쳐 사방을 진동시키셨고 6국의 군주를 사로잡아 없애셨다. 천하를 병합해 재해를 모조리 없애고 전쟁을 영원히 그치게 하셨다. 황제께서는 덕을 밝게 하여 천하를 다스림에 보고 듣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대의(大義)를 세우시고 각종 기물(器物)을 갖추셨으며 신분에 따라 장식과 표지를 만드셨다. 신하들이 직분을 준수하며 각자 할 일을 행하니 일에 대한 의혹이 사라졌다. 백성들은 풍습을 고쳐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법도가 같아지니 나이 들 때까지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 일상 업무가 이미 정해졌으니 후손들이 그 업을 이어간다면 성스러운 다스림이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덕을 칭송하고 성스러운 업적을 노래하며 비석에 새기기를 간청했노라.”

또 도가 수련으로 하늘로 날아올라간 모몽(茅濛)을 기리기 위해 진시황은 매년 12월 납제(臘祭)의 이름을 가평(嘉平)으로 고쳤다. 남조시대 송(宋)나라의 배인(裴駰)은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태원진인모영내기(太原真人茅盈內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시황 31년 9월 경자일, 모영(茅盈)의 증조부 모몽이 화산에서 구름에 올라 용을 타고 대낮에 하늘에 올라갔다. 이에 앞서 그 읍에서 노래를 부르길 ‘신선술을 얻은 자 모초성(모몽)은 용을 타고 올라가 태청에 들었네. 때때로 현주에 내려와 적성에서 노닐기도 하지. 대를 이어 내려와 나 영(盈)에 이르렀구나. 만약 황제께서 배우신다면 납월을 가평이라 하시리라(神仙得者茅初成,駕龍上升入泰清,時下玄洲戲赤城,繼世而往在我盈,帝若學之臘嘉平).’라고 했다. 진시황이 이 노래를 듣고 그 연고를 물어보니 노인들이 이는 신선의 노래라고 대답하며 황제더러 장생술을 구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납월(臘月 음력 12월)을 ‘가평’으로 바꿨다.”

모몽의 아들이 진시황을 모시던 시종이었기 때문에 시황제는 모몽이 화산에서 용을 타고 백일승천한 일에 대해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모몽의 후손 중 모영(茅盈), 모고(茅固), 모충(茅衷)이 모두 수련해서 신선이 되었다. 도가에서는 역대로 이들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의미에서 삼모진군(三茅真君)이라 부른다.

진시황 32년(기원전 215년) 4번째 순행에 나섰다. 상군(上郡 지금의 섬서성 유림)에서 구원(九原)을 지나고 운중(雲中), 안문(雁門),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을 지나 갈석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유명한 《갈석문사(碣石門辭)》를 새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베고 반역자를 잠재우셨다. 무력으로 포악한 반역자들을 섬멸하고, 문치(文治)로 죄 없는 자들을 보호하시니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복종했다. 공로를 논해 상을 내리시니 소와 말까지 미쳤고, 땅도 은택을 입어 비옥해졌다.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고 덕으로 제후들을 병합해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해 태평하게 하셨다. 성곽을 허물고 하천의 제방을 터서 통하게 하셨으며 험난하고 막힌 길을 고르게 하셨다. 땅의 형세가 평탄해져 백성들의 요역이 사라지니 천하가 두루 편안해졌다. 남자는 즐거이 농사짓고, 여자는 집안일에 힘쓰니 일에는 각기 순서가 생겼다. 모든 생산에 은혜가 두루 미치니 떠돌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와 농사를 지어 편안하지 않은 이가 없어졌다. 여러 신하들이 빛나는 공적을 노래하고 이 돌에 새겨 영원한 본보기로 드러내기를 청하노라.”

11. 수련을 몸소 실천하고 널리 알리다

상고(上古)시대에는 사람이 신(神)과 함께 존재했기 때문에 신의 자취가 늘 드러나곤 했다. 사람들은 신을 믿고 수련했으며 도를 얻어 신선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또 명산대천 중에는 수련을 통해 수명이 수천 살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 순, 우, 황제(黃帝) 등 고대의 성스런 황제들은 천하를 다스리는 동시에 신선을 만나고 도인을 찾으며 수신양성(修身養性)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들이 인간의 사명을 완수한 후 수련에 성공해 원만하여 날아 올라간 것 역시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후세인들은 예악(禮樂)이 붕괴되고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사람들은 신령(神靈)과 점차 멀어졌고 신(神) 역시 세인들에게 갈수록 신적(神跡)을 적게 펼쳐보였다. 수련해서 신선이 되는 일은 점차 세속을 벗어나 수련인들의 ‘비밀스런’ 일이 되거나 심지어 점차 세인들의 ‘신화’가 되어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창세주께서는 그 자손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끊임없이 사자를 파견해 사람들더러 수련해서 제고하고 천당으로 되돌아 올라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자 가장 좋은 귀숙(歸宿)임을 일깨워주셨다. 수신양성(修身養性)하고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 수련문화는 바로 중화 신전문화(神傳文化)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고 보호할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도가(道家)의 수련법문은 대개 비밀리에 단독으로 전수하며 외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수련은 곧 수련자 개인의 일로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그 속의 신묘함을 알겠는가? 때문에 수많은 역사가들이 수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협소한 관념으로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하면서 수많은 진실한 수련의 신적(神跡)들이 사서에 기록되어 유전되지 못하게 했다. 많은 사서에서는 진시황이 신선과 왕래하고 도에 관해 담론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간주했다. 또 진시황이 몸소 수련을 실천하고 반본귀진(返本歸真)과 신선이 되는 도(道)를 널리 전파한 것을 단순히 죽는 게 두려워 삶을 탐하고 한마음으로 장생불로약을 구한 것으로 오인했다. 이때문에 일련의 황당무계한 결론들이 도출되었고 후세의 많은 사람들을 오도했다.

사실 진시황은 매번 동쪽으로 순행할 때마다 수많은 신적(神跡)과 전설을 남겨놓았다.

진시황은 수련인들을 아주 존중했고 또 늘 그들과 함께 신선, 진인, 장생 및 수련의 이치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진시황은 일찍이 “나는 진인(眞人)을 흠모하니 스스로 ‘진인’이라 칭하고 ‘짐(朕)’이라 부르지 않겠노라.”(《사기・진시황본기》)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소 수련을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또 수련을 널리 알리고 정도(正道)를 빛내는데 여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단지 중국 본토의 민간이나 궁정에서 제창했을 뿐만 아니라 또 조수(助手)를 여러 차례 바다 밖으로 파견해 세상에 널리 알리게 했다.

동진(東晉)의 왕가(王嘉)가 쓴 《습유기(拾遺記)》에는 진시황이 완거(宛渠)의 이인(異人)과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완거의 어느 백성이 소라배(螺舟)를 타고 왔다. 배의 모양이 소라처럼 생겼는데 바다 밑에 들어가도 물이 들어오지 않아 일명 ‘윤파주(淪波舟)’라고도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키가 10장에 새와 짐승의 털로 몸을 가렸다. 시황제가 그와 더불어 천지가 개벽할 때를 이야기하는데 마치 두 눈으로 목격한 듯 했다. ‘신이 어릴 때는 허공을 밟고 다녔으며 하루에 만리를 노닐었지만 이제는 늙어서 그저 앉아서 천지 밖 일을 봅니다. 신의 나라는 해가 지는 함지(咸池)에서 구만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곳의 만년이 그곳에서는 하루입니다. 평소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데 가끔 청명한 날을 만나면 하늘이 탁 트이고 구름이 갈라져서 마치 장강이나 한수처럼 환합니다. 그러면 현룡(玄龍 검은 용)과 검은 봉황이 날아서 내려옵니다. 밤이면 불타는 돌이 태양을 대신합니다. 이 돌은 불타는 산에서 나오는데 그 흙과 돌이 모두 스스로 빛을 냅니다. 빻아서 가루로 만들면 모양이 좁쌀 같은데 한 알이면 집안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옛날에 염제(炎帝)께서 처음으로 날로 먹는 습관을 바꿀 때 이 불을 사용했습니다. 어떤 백성이 이 돌을 바쳤는데 그 돌을 계곡에 던졌는데 포말이 수십 리까지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물의 이름을 초연(焦淵 끓는 연못)이라 했습니다. 신의 나라는 헌원(軒轅)의 나라에서 십만 리 떨어져 있으며 소전(少典)의 아들이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취해 대정(大鼎)을 주조했습니다. 신이 그 나라에서 금화(金火)의 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멀리서 보고 달려갔더니 이미 세발 솥이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또 기주(冀州)에서 이상한 기운을 보고 마땅히 성인이 출생하실 것임을 알았는데 과연 경도(慶都)가 요임금을 낳았습니다. 또 붉은 구름이 풍호(酆鎬 주나라의 옛 도읍)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달려가니 과연 붉은 참새가 창(昌 주나라 문왕)의 탄생을 알리는 길조가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이 사람은 신인(神人)이구나.’라고 했다.”

진시황은 또 갈석산에서 한종(韓終 韓眾 또는 韓種이라고도 한다) 등을 파견해 바다로 나가 신선과 약을 찾으며 중국의 수련문화를 널리 알리게 했다. 지금 진황도시(秦皇島市)는 바로 진시황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과거 이곳을 순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종은 나중에 수련해서 신선이 되었으며 그에 관해 수많은 역사기록이 남아 있다. 당나라 때 사마승정(司馬承禎)이 지은 《동천복지기(洞天福地記)》에는 “제23 동진허(洞真墟)는 담주(潭州) 장사현(長沙縣)에 있는데 서악진인(西嶽真人) 한종이 다스리는 곳이다.”라고 했다.

한국(韓國)의 진한(辰韓 또는 秦韓)이란 나라 이름은 한종에게 기원한다. 고대 한반도의 신라 역시 진한에 기초해 발전했다. 이연수(李延壽)의 《북사(北史)》 열전에서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辰 秦과 통한다)의 한종(韓種)이다.”라고 기록했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행에 나서 영성산(榮成山)을 유람한 것은 후세에 수많은 유적과 전설을 남겨놓았다. 진교(秦橋)유적은 또 진황교(秦皇橋)라고도 하며 성산 남쪽 바다 속에 있다. 바다 속에 있는 4개의 거대한 천연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암초가 높고 험해 끊어진 듯 이어진 듯하면서 조수의 변화에 따라 수면위로 출몰해 그 모양이 마치 인공적으로 가설한 다리 같았다.

남북조 시기 무명씨가 지은 《삼제략기(三齊略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시황이 바다를 건너 일출을 보고자 돌다리를 만들었다. 이때 어떤 신인(神人)이 소석산 아래 있었는데 성양 13산의 돌들이 곧추 서서 서로 뒤따라가는 것 같았다. 돌이 빨리 가지 않으면 신인이 채찍을 때려 피가 흘러 나왔기 때문에 지금도 소석산(召石山)의 돌 색이 모두 붉다.”

“시황제가 일출을 보기 위해 다리를 만드는데 해신(海神)이 그를 위해 돌을 몰아다 수직 기둥을 만들어주었다. 시황이 그 은혜에 감동해서 뵙기를 청했다. 그러자 신이 ‘내 모습이 추하니 내 모습을 그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황제와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진시황이 바다 속으로 40리를 들어가 신을 만났다. 그런데 옆에 있던 솜씨 좋은 자가 몰래 그 모습을 그리자 신이 화를 내며 ‘황제가 약속을 어겼으니 빨리 떠나시오.’라고 했다. 시황제가 즉시 말을 돌렸는데 말의 앞발이 겨우 바닥을 딛는 순간 뒷발이 있는 쪽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간신히 해안가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산신(山神)이 바위를 움직여 진시황을 위해 다리를 놓아주었고 또 해신을 만나게 했으며 해신이 진시황을 위해 바위를 몰아 수직 기둥을 세워 돌다리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시황을 수행하던 한 종자가 몰래 해신의 모습을 그리다 해신의 노여움을 사서 다리가 무너졌다. 왜냐하면 해신이 진시황을 만나기 전에 미리 자신의 모습을 그리지 않아야 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시 진시황이 말머리를 돌리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돌다리는 진시황이 막 해안가로 올라서자마자 완전히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오직 해안 근처에 4개의 다리받침만 남아 파도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거나 가라앉으면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지금에 이르러 성산의 붉은 색 암석 위에는 곳곳에 계곡이 흐르는데 바로 과거 산신의 채찍질로 피가 났기 때문이다. 영성산(榮成山)의 바위는 진시황 때문에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고 영성팔경(榮成八景)의 하나가 되어 지금까지 유전되고 있다.

진시황은 5번째 순행에서 다시 낭야로 와서 과거 안기생과 만났던 곳을 찾아가 안기생을 위해 사당을 만들고 바닷가 십여 곳에 부향정(阜鄉亭 역주: 부향은 안기생의 고향이다)을 세워주었다. 또 천태산 중탕곡(中湯谷)을 망선간(望仙澗 역주: 신선을 바라보는 계곡이란 의미)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시 진시황이 건립한 안기생의 사당 유적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약 천년 후 당나라의 대시인이자 시선(詩仙) 이백이 천년 후 안기생과 다시 만나려던 진시황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기왕옥산인맹대융(寄王屋山人孟大融)–왕옥산에 사는 맹대융에게 부치는 글》

예전에 내가 동해 노산에서 신선 노을 먹었었지.친히 안기생을 뵈고 참외만한 대추를 먹었네.중년에 황제를 뵈었지만 마음이 맞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네.붉던 얼굴 봄날 광채 가시고 흰 머리에 생애가 보이네.금액(金液 금단)을 얻어 구름수레에 날아오르길 기약하네.그대를 따라 천단에 올라 신선과 함께 한가로이 떨어진 꽃이나 쓸고 싶어라.

我昔東海上(아석동해상) 勞山餐紫霞(노산찬자하)親見安期公(친견안기공) 食棗大如瓜(식조대여과)中年謁漢主(중년알한주) 不愜還歸家(불협환귀가)朱顏謝春暉(주안사춘휘) 白發見生涯(백발견생애)所期就金液(소기취금액) 飛步登雲車(비보등운거)願隨夫子天壇上(원수부자천단상) 閑與仙人掃落花(한여선인소락화)

이백은 또 《고풍(古風)》 7수에서도 안기생을 만나는 장면을 노래한다.

《고풍》 7수

객 중에 학을 탄 신선이 있어 훨훨 날아 태청 위로 솟구치더니,푸른 구름 속에서 소리치기를 자기 이름이 안기(安期)라 하더라.쌍쌍 옥동자 둘이 자줏빛 난새 피리 부네.떠나는 그림자 문득 뵈지 않더니 회오리바람만 하늘소리 보낸다.머리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니 유성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누나.원컨대 금광초(金光草)를 먹어 하늘만큼 오래 살았으면.

客有鶴上仙(객유학상선) 飛飛凌太淸(비비능태청)揚言碧雲裏(양언벽운리) 自言安期名(자언안기명)兩兩白玉童(양양백옥동) 雙吹紫鸞笙(쌍취자란생)去影忽不見(거영홀불견) 回風送天聲(회풍송천성)擧首遠望之(거수원망지) 飄然若流星(표연약류성)願飡金光草(원손금광초) 壽與天齊傾(수여천제경

이백은 《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禦虛舟)–여산의 노래를 시어 노허주에게 보내다》에서 “한만(신선)과 구천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노오 만나 태청에서 마음껏 노닐고 싶어라.(先期汗漫九垓上 願接盧敖遊太清)라고 했다.

여기서 노오(盧敖)는 진시황의 영향을 깊이 받은 인물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진인(眞人)을 찾아다녔다. 신선의 비결을 전수받고 마침내 깊은 산속에서 수련해 도를 이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중에 한 무제는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년)에 노오를 기념하기 위해 하남에 노씨현(盧氏縣)을 설치하기도 했다.

진시황은 낭야에서 또 서복(徐福 서불이라고도 한다) 등을 파견해 동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가 신선과 선약을 찾는 동시에 중화의 수련의 도(道)를 널리 전파하게 했다. 진시황 때 “대완(大宛)에 요절하는 사람들이 길을 막을 정도로 많았다. 어떤 사람이 조어초(鳥禦草)로 죽은 이의 얼굴을 덮자 마침내 살아났다. 어떤 관리가 이를 보고하자 진시황이 사자를 귀곡자에게 보내 이 풀에 대해 물어보게 했다. 선생이 ‘큰 바다 가운데 10주가 있는데 조주(祖洲), 영주(瀛洲), 현주(玄洲), 염주(炎洲), 장주(長洲), 원주(元洲), 유주(流洲), 광생주(光生洲), 봉린주(鳳麟洲), 취굴주(聚窟洲)입니다. 이 풀은 조주의 불사초입니다. 경전(瓊田)에서 나는데 양신지(養神芝)라고도 합니다. 그 잎이 향초[菰]를 닮았지만 무리지어 나진 않습니다. 한 그루면 천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태평광기》)

“진시황이 귀곡선생의 말을 듣고는 서복을 파견해 옥소금채(玉蔬金菜 역주: 금옥으로 된 신선의 채소)와 한 치 크기의 오디를 구해오게 했다.”[양나라 소역(蕭繹)의 《금루자(金樓子)‧잠계편(箴戒篇)》]

전설에 따르면 서복이 바로 귀곡자의 제자였기 때문에 진시황이 그를 동쪽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서복은 농사의 신, 잠업의 신, 의약의 신으로 존경받는다. 일본 역사 연구에서는 서복이 바로 일본의 신무천황(神武天皇)이라고 한다.

한종, 서복 등은 단순히 중국의 한자나 각종 기술만을 가져간 게 아니었다. 이들은 중화 신전문화를 한국과 일본에 가져다주었고 인근 여러 나라에 뿌리내릴 수 있게 했다. 한국, 일본 등에는 지금까지도 과거 한종이나 서복 등이 바다를 건너가 남겨놓은 수련문화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것은 이 나라 백성들이 나중에 정법(正法)을 얻고 대도(大道) 수련을 좋은 단서를 남겨주었다.

후세의 많은 성군(聖君)들 역시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신을 공경하고 수련하며 채약연단(採藥煉丹)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바다 건너 사람을 파견해 중화문명과 신을 믿고 수련하는 도(道)를 주변 나라와 그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 이는 진실로 그 나라 백성들에 대한 최대의 선행이자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다.

이외에도 신선을 찾고 도를 구하며 연단(煉丹)하고 약을 채취하는 것은 수련양생(修煉養生)의 중요한 부분이다. 많은 도가 문파에서는 약을 복용하고 단을 삼켜 체내의 노폐물과 독소를 몸 밖으로 배출해서 몸을 가볍게 만들고 신체를 건강하게 한 후에 이어서 다른 수련절차를 밟는다. 이는 바로 수련의 기본 이치다. 다만 후세에 와서, 특히 무신론의 폐해를 깊이 받은 근대인들이 신령에서 멀어지고 도덕이 패괴(敗壞)해 단순히 신을 믿지 않고 하늘을 공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옛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을 뿐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