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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이야기: 여우가 사람을 유인하여 도둑을 잡다(여러 편)

작자/ 정개문(鄭介文)

【정견망】

1. 꼬마 귀신이 도적을 잡게 해 천명을 알게 하다

경원(涇源)의 북쪽 교외에 왕안국(王安國)이란 농민이 있었다. 그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의식주를 자급자족했다. 당나라 경종(敬宗) 보력(寶曆) 2년(826년) 겨울 어느 밤 두 명의 도적이 손에 칼을 들고 담을 넘어 들어왔다. 왕안국은 감히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실내에 있던 옷이며 가죽 등을 다 털렸다. 왕안국에게는 하칠(何七)이란 불과 6~7세 된 아들이 있었는데 자다가 놀라 깨어나 도적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도적이 화살을 쏘아 죽였다. 왕안국 집 밖에는 또 두 마리 보라색 나귀가 있었는데 역시 도적에게 빼앗겼다.

날이 막 밝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도적들을 추적할 방법을 상의했다. 갑자기 하칠의 혼백이 방문에 올라오더니 울면서 말했다. “내 죽음은 운명에 정해져 있으니 너무 슬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비통한 것은 부모님과 영원히 이별하게 된 것입니다.” 하고는 오래 읍을 했다. 5, 60명의 이웃이 있었는데 모두들 함께 슬피 울었다. 하칠이 말했다. “당신들은 도적을 적을 쫓아갈 필요 없습니다. 내년 5월 그들은 스스로 와서 죽을 것입니다.” 하고 부친을 불러 귀에 도적의 이름을 말해주고 잊지 말라고 부탁했다.

다음해 보리 수확할 때 왕안국은 반경(半頃)의 보리밭이 있어서 수확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소 두 마리가 달려오더니 보리밭을 밟아 엉망으로 만들었다. 왕안국은 소를 끌고 마을로 돌아가 각 집을 다니며 말했다. “어느 집 소인지 우리 보리밭을 밟아 엉망으로 만들었소. 나는 이미 소를 묶어 놓았으니 소 주인은 마땅히 배상하고 소를 가져 가시오. 아니면 관가에 고소하겠소.” 마을 사람들이 보고는 말했다. “이 소는 인근에서 키우는 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세히 보자 갑자기 외지에서 두 사람이 오더니 말했다. “이건 우리 소입니다. 어젯밤에 놀라서 도망을 갔는데 뜻밖에 여기 왔군요. 망친 보리는 우리가 변상할 테니 소를 돌려주시오.”

왕안국과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게 소가 어디서 났는지 묻자, 그들은 소를 샀다는 증거를 대다가 그 중 한 마리 소는 보라색 나귀로 교환한 거라고 했다. 왕안국이 문득 하칠의 말이 생각나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니 당시 아들이 한 말과 일치했다. 그래서 그들을 묶어서 말했다. “네놈들이 바로 작년 겨울 우리 아들을 죽이고 내 재물을 빼앗아간 도적들이지!” 두 도적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더는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이것 역시 천명인가 봅니다. 죽을죄는 피할 수 없군요!” 하면서 사연을 말했다

“우리는 그때 범행 후 북쪽으로 도망가 영경(寧慶)의 교외로 갔습니다. 나중에 이 일이 오래 지났다고 생각하여 소를 사서 기주(岐州)로 돌아오려 했었죠. 어제 소를 끌고 이 마을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왔을 때 소가 배회하며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밤이 되길 기다려 다시 이곳을 지나가려 했는데 막 잠이 들었을 때 꿈에 6,7 살 된 남자아이가 맨몸으로 춤을 추었는데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새벽까지 자다가 해가 떠서야 깨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소는 이미 도망가 버렸습니다. 소를 묶어놓은 밧줄은 힘을 써서 끊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풀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발자국을 따라 찾다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작년 겨울의 사건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현으로 보냈고 모든 것은 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하칠은 겨우 6,7 세였는데 사후에 천명과 보응을 알고 하늘의 뜻에 따라 도적이 잡히도록 안배한 것이다.

2. 하늘의 도움으로 원수를 갚은 여인

비구니 묘적(妙寂)의 속성은 엽(葉)씨로 강주(江州) 심양(潯陽) 사람이다. 그녀는 애초에 심양의 상인 임화(任華)에게 시집갔다. 그녀의 부친 엽승(葉升)은 임화와 함께 장사(長沙)와 광릉(廣陵) 사이를 오갔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11년 봄 그들이 담주(潭州)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기한이 몇 달이 지나 갑자기 묘적의 꿈에 부친이 나타났는데 봉두난발에 나체의 몸으로 전신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울며 말했다. “나와 사위는 호수에서 강도를 만나 모두 죽었다. 너의 모습에 의지와 기개 있음을 보고 하늘에서 복수를 허락하셨다. 하지만 저승의 일을 분명히 말할 수 없으니 은어로 알려 줄 수밖에 없다. 만약 추측해내어 복수해준다면 여한이 없겠다.”

묘적이 “어떤 은어입니까?”라고 묻자

엽승은 “나를 죽인 것은 ‘車(事)中猴,門東草[직역하면 수레 속의 원숭이, 동쪽의 풀이다]’”

잠시 후 꿈에 남편이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 울면서 말했다. “나를 죽인 것은 ‘禾中走,一日夫’요”

묘적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었고 여동생이 그 소리에 놀라 불러서 깨웠다. 그녀는 울면서 모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온 가족이 크게 놀랐다. 그녀는 은어를 기억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웃 노인과 고향에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모두들 아리 알지 못했다. 가을에 그녀는 상원현(上元縣)에 갔는데 그곳에는 배가 아주 많았고 사방에서 온 많은 사대부들이 그곳에서 쉬고 있었다.

또 현성(懸城)에 와관사(瓦棺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에 누각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산과 물에 의지해 있고 큰 강을 굽어보면 만 리가 다 보이는 강호의 절경이었다. 왕래하는 여행객들이 그곳에 올라가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출가하여 물어볼 사람을 기다려 나의 곤혹을 풀어주기 기다려야겠다.”하며 그녀는 거친 옷으로 갈아입고 와관사의 하인으로 들어가 매일 빗자루를 들고 누각 아래를 쓸며 시간이 나면 난간에 기대어 지식이 있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녀는 높은 갓을 쓰고 시를 읊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나아가 물어보았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이 은어를 해독한 사람이 없었다.

정원 17년 신사년에 이공좌(李公佐)라는 사람이 영남 ‘종사(從事 관직)’에서 파직해 누각에 올라왔는데 눈빛이 뛰어난 것이 범속하지 않았다. 묘적이 나아가 울면서 절을 올리고 은어의 뜻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공좌가 말했다. “나는 평생 사람의 의문을 푸는 것을 좋아했는데 하물며 당신의 이런 억울한 심정이 절실하다고 신령이 알려주는군. 내가 한번 생각해보겠소.” 그는 묵묵히 몇 걸음을 걷다가 기뻐하며 묘적을 불렀다.

“이제 알겠소. 당신 부친을 죽인 사람은 신란(申蘭)이고 남편을 죽인 사람은 신춘(申春)이오.”

묘적은 희비가 교차하여 오열하기 시작했다. 두 번 절하고는 그 근거를 물었다.

이공좌는 “후(猴 원숭이)는 12지지로 신(申)인데 ‘車(수레)’에서 양끝을 없애면 신(申)이 되니 원숭이라 한 것이오. 또 초(草) 아래 ‘문(門)’이 있고 중간에 동(東)이 있으면 바로 란(蘭)이 아니겠소? ‘禾中走란 벼 속을 달리니 밭[田]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니 이 역시 ‘신(申)’이오. 일일(一日)에 부(夫)를 더하면 아마도 ‘춘(春)’ 자일 것이오. 귀신은 사람을 미혹시키기 위해 그 말을 뒤섞은 것이오.”

묘적은 슬픔과 기쁨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듯하며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절하며 감사를 표했다.

“강도의 이름이 이미 분명히 드러났으니 원한을 씻을 길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제 의혹을 풀어주신 거라면 맹세컨대 이 큰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저는 여인이라 다른 것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 오직 정결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받들며 나리의 복이 커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사주(泗州)의 보광왕사(普光王寺)에 불교의 계단(戒壇)이 있었는데, 사람들 가운데 스님이 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계단을 거쳐야 했다. 사방에서 바퀴살처럼 스님과 여승들이 빈번하게 모였으며, 그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시장과 같았다. 하루는 이공좌가 호북에서 협서로 가는 길에 배를 묶어 놓고 가서 유람을 했다. 그곳에는 눈이 맑고 눈썹이 고운 여승 한 명이 있었는데, 과거에 본 적이 있는지 매번 지날 때마다 반드시 이공좌를 응시했으며, 마치 마음속에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한참 후 이공좌가 떠나려는데 여승이 급히 그를 불렀다. “시어사(侍禦)께선 혹시 정원 연간에 남해종사(南海從事)를 지내지 않으셨는지요?”

이공좌가 말했다. “그렇소.”

묘적이 말했다. “그렇다면 소승(小僧)을 기억하시는지요?”

이공좌가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소.”

묘적이 말했다.

“예전에 와관사 누각에서 ‘수레 속의 원숭이’라는 은어를 풀이해 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공좌가 비로소 깨닫고 말했다. “결국 도적을 잡았소?”

묘적이 말했다

“저는 꿈속 은어의 뜻을 깨달은 이후 남자 복장으로 이름을 사적(士寂)으로 바꾼 채 강호에서 일꾼 노릇을 했습니다. 몇 년 후 기주(蘄州)와 황주(黃州) 사이에 신씨(申氏)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그곳으로 갔습니다. 이리저리 몇 해를 돌아다니다가 그 마을의 북쪽 구석에 이름이 란(蘭)인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용히 가서 품을 팔기를 청했는데, 품삯을 싸게 불렀더니 신란이 기뻐하며 저를 고용했습니다.

얼마 후 저는 또 그의 사촌동생 가운데 이름이 신춘(春)이라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근면하고 공손하게 일하면서 밤낮으로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으며, 보기에 할 수 있는 일이기만 하면 경중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더니, 신란은 저를 기특하다고 여겼습니다.

낮에는 여러 일꾼들과 함께 힘들게 일을 하고 밤에는 다른 곳에서 잤더니 제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나 스스로 더욱 부지런히 일하자 신란은 저를 더욱 존중하여 자신의 아들보다도 낫다고 여겼습니다. 신란은 농사도 짓고 장사도 했으며 어떤 때는 무창(武昌)에 물건을 쌓아 두기도 했는데, 창고를 여닫는 일을 모두 제게 위임했습니다. 이에 창고의 궤짝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살펴보았더니, 절반은 저희 집안 물건이었고 제 남편과 아버지가 늘 입고 다니던 의복도 보였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기억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신란과 신춘은 따로따로 행동해서 함께 다니는 적이 없었으므로, 한 사람을 잡으면 다른 사람이 놀라 달아날 것을 염려하여 몇 년 동안 그 일을 묻어 두고 있었습니다.

영정(永貞 805년) 중양절(重陽節)에 두 도적이 술을 마시고 취하자 저는 주부(州府)로 달려가 그들을 고발했으며, 그들이 취한 틈을 타 사로잡았습니다. 심문을 하여 그들이 죄를 자복하자 법에 따라 처벌했고, 저는 그들에게 빼앗겼던 재물을 가지고 돌아와 모두 어머니께 드린 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제 스승은 홍주(洪州) 천궁사(天宮寺)의 비구니 동미(洞微)인데, 바로 예전에 가르침을 주셨던 분입니다. 저는 일개 여인에 불과하지만, 정성을 다해 복수했더니 하늘도 제 뜻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꿈속의 말로 나으리께 깨달음을 얻어 그 원수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게 되었으니, 제가 분골쇄신 한들 어찌 나리의 명철함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출가인은 다른 것은 없으나, 오직 경건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염불하여 당신께 경사가 있기를 축복하며 은혜를 보답할 뿐입니다.”

이공좌가 이 일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여 묘적을 위해 전기(傳記)를 지었다.

문종(文宗) 대화(大和) 경술년(庚戌年)에 농서(隴西)의 이복언(李復言)이 파남현(巴南縣)에서 노닐다 진사(進士) 심전(沈田)과 봉주(蓬州)에서 만났는데, 심전이 이 기이한 일을 말하면서 전기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이복언이 한 번 읽고는 나중에 《유괴록(幽怪錄)》을 지을 때 그 글을 여기에 합쳤다.

3. 말이 달려나가 도적을 잡아 죽이다

당나라 때 이문민(李文敏)은 광주(廣州) 녹사참군(錄事參軍)으로 임명되어 광주로 부임하다 강도를 만났다. 강도에게 살해당해 강물 속에 던져졌다. 강도는 또 아내 최씨를 끌고 갔다. 그의 아들은 겨우 5살이었는데 모친을 따라갔다. 그 강도가 바로 광주의 도우후(都虞侯)란 자였다.

아이가 점점 자라 명경(明經)을 익혔는데 매우 총명했다. 나중에 경성에 들어가 시험을 보았는데 낙방하자 화주(華州)로 갔다. 어느 날 위남현(渭南縣) 동쪽에 도착했는데 말이 놀라 뛰는데 제어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어느 장원에 도착했는데 그 장원에 투숙했다. 그는 깨끗한 망사로 만든 반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장원의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말했다. “이 옷은 그때 어떤 부인이 이랑(李郎)을 보낼 때 입혀준 것인데 자네가 이랑과 닮았고 어머니와도 닮았으니 아들 같소.”

그러면서 할머니가 이 옷을 가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당시 바느질할 때 불이 붙은 흔적이 있었고 반쪽 팔부분이 집에 있었다. 그러자 이문민이 강도를 만난 일을 말해주었다. 아이가 집에 돌아와 모친에게 묻자 모친이 경과를 말해주었다. 그 후 관가에 고발하여 관에서 도우후를 잡아 심문하자 도우후는 전부 실토했다. 관부에서는 그를 죽였다. 그 후 모자에게 원래의 재물을 주어 위남으로 돌아가게 했다.

4. 여우가 사람을 유인해 도적을 잡은 사건

당나라 때 번종량(樊宗諒)은 밀주(密州)자사를 지냈다. 당시 밀주의 속현(屬縣)에 도적이 많았는데 그들은 부하 도적을 데리고 성중 백성 은씨(殷氏) 집에 들어가 비단을 약탈하고 부자 등 3인을 죽였다. 자사가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렸지만 한달이 지나도 잡지 못했다. 거록(巨鹿) 사람 위남화(魏南華)가 제노(齊魯) 사이에 살았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번종량은 그에게 대리시 법연(代理司法掾)의 일을 맡겼다.

어느 날 밤 위남화는 꿈에 몇 사람이 봉두난발을 하고 위남화에게 호소한느 것을 보았다.

“저희들은 성이 은(殷)씨로 부자 3인이 모두 무고하게 죽었습니다. 밝으신 공께서 부디 억울함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위남화가 물었다.

“당신들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가?”

“제가 살던 집 동쪽 십리에 요(姚)씨 성을 가진 이가 있는데 강도의 두목입니다.”

위남화가 알았다고 응답했다. 며칠 후 번종량이 위남화에게 물었다.

“강도가 우리 백성을 죽인지 한달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종적을 찾지 못하니 관리가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자네는 사법관으로서 정찰을 한번 해보게.”

그래서 위남화가 말을 달려갔는데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여우 한 마리가 길옆에서 숲속에서 뛰쳐나와 마을의 요씨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뒤를 여러 사람이 북을 치며 따라갔다. 그 여우가 어느 구멍으로 들어갔는데 위남화가 사람을 시켜 파보라고 하니 구멍에서 많은 금은과 비단이 나왔다. 바로 도적들이 은가에서 빼앗은 물건이었다. 즉시 요씨의 아들을 불러 이 물건이 어디서 난 것인지 물었다. 요씨는 눈알만 굴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체포하여 심문했더니 과연 강도 두목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일당을 다 잡았더니 전부 십여 명이었다. 그 여우가 굴속으로 들어갔지만 파보아도 여우는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 여우가 억울한 원혼이 변한 것이며 사람을 유인하여 도적을 잡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거라고들 했다. 이 일은 당나라 문종 대화 연간의 일이다.

5. 이승 관리가 저승의 문제를 풀어주다

당나라 영주령(盈州令)이 부임하려 할 때 밤에 그 현의 어느 오래된 절에 묵었다. 막 잠이 들려 하는데 한 노파가 오동나무 잎으로 머리를 가리고 몸을 구부리며 앞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영주 현령이 지팡이로 그녀 머리의 잎을 쓸어 내었다. 할머니는 몸을 구부려 나뭇잎을 주워 떠났는데 잠시 후 또 왔다. 이같이 세 번을 하자 다시는 오지 않았다.

얼마 후 상복을 입은 자가 북문에서 계단을 올라오더니 주렴을 들고 와서는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으니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영주현령이 말했다. “너는 무슨 요물이냐?”

“저는 귀신이지 요괴는 아닙니다. 제 얼굴이 보기 싫게 생겨 감히 뵙지 못했는데 방금 장씨 유모를 시켜 숨은 사정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세 번이나 지팡이로 얻어맞고 거절당하니 다시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와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형양씨(滎陽氏 왕씨 성을 가진 형양의 명문가)의 아들입니다. 부친은 이곳 자사(刺史)셨는데 1년이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영구를 호송해 낙양으로 돌아가다가 이 절에 묵었습니다. 계모는 우리에게 갈화탕(葛花湯)을 마시게 하여 나와 여동생이 그날 밤 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씨 유모가 곡을 하려고 하다가 철퇴에 머리를 맞았고 흉수는 그녀와 우리를 함께 북쪽 담 대나무 숲에 묻었습니다. 농서의 돌아가신 모친께서 상제께 호소했습니다. 상제께서 칙령을 내려 ‘사람의 아내로서 이미 하인을 잔혹하게 해쳤다. 또 사람의 어머니로서 고아된 아이들을 독살했다. 사건은 어두운 곳에서 있어서 밝히기 어렵지만 이치를 하늘에서 굽어보니 주살함이 마땅하다. 죽음으로 갚고 고아에게 사죄하라. 사명(司命)에 맡겨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 부친이 다시 상제께 호소했습니다. ‘저는 떠돌이 혼령입니다. 수신의 도를 지키지 못해 아내가 고아를 죽이게 했습니다. 이 같은 가풍이 전해지면 하늘의 귀를 더럽히는 것이니 어찌 한번 죽음으로 죄를 벗을 수 있습니까? 저는 현령을 3차례 자사를 2번 지냈는데 백성을 돌본 약간의 치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치적을 들지 못하게 되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상여가 아직 속현을 떠나지 않았고 아들이 무고하게 피해를 입었는데 아내가 죽음으로 갚는다면 저의 영구는 묻히기 어렵습니다. 간구하건데 그녀의 생명을 연속시켜 저를 낙양에 장례 지내어 조상의 선영에 함께 있게 해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다음해 계모가 낙양에 도착하여 등에 등창이 나서 죽었습니다. 상제께서 노하여 죄를 꾸짖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저는 다시 무슨 원한이 없습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스님들이 저의 몸을 매장한 곳 위에 측간을 지었으니 그곳에 냄새가 나서 정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또 여동생이 측간 신의 첩이자 종이 되었고 저도 측신의 인부가 되었습니다. 대대로 선비 집안이 이같이 하루아침에 떨어졌습니다. 하늘과 간격이 있어서 상소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은 인자한 덕이 있으니 특별히 와서 아뢰옵니다.”

영주령이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귀신이 답했다. “제 뼈를 발굴하여 향탕에 목욕을 시키고 다시 옷을 입혀 높은 곳으로 옮겨 나무관으로 매장하여 주시고 간단한 제사라도 지내주시면 더 이상 바랄게 없습니다.”

영주령이 말했다. “그건 쉬운 일이니 그렇게 하지.”

귀신이 오열하며 재배했다. 또 장 씨 유모에게 낭자를 불러 함께 감사드리라고 했다. 장 유모는 총총히 달려와서 소리쳤다. “곽군(측간신)은 밤에 집이 어지러운 것을 보시고 화를 엄청 내었는데 벌써 세 번이나 불렀습니다!” 그러자 상복을 입은 귀신은 창황히 떠났다.

다음날 아침 영주령은 스님을 불러 이 일을 알려주고 인부들에게 명하여 측간을 파보게 했다. 3,4 척 파내려 가자 비로소 해골이 나왔고 이장을 시켰다.

이상 이야기의 출처는 송대 《태평광기》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2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