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고영웅인물】 진시황(6): ‘분서갱유’의 진상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12. 제자백가의 찌꺼기를 불태우고 사기꾼들을 묻다

후세의 많은 이들은 진시황을 언급하기만 하면 곧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떠올리곤 한다. 또 진시황이 잔인하고 포학하게 역사와 문화의 근거를 파괴했다고 여기면서 진정으로 정확한 역사 사실에 대해서는 모른다. 보고 들은 내용을 바로 잡고 역사의 진실을 환원하기 위해 이번 절에서는 ‘분서갱유’의 역사적 사실(史實) 및 경위와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분서갱유’란 사실 진시황이 6국을 멸한 후 사상을 통일하고 신(神)이 전한 정통문화와 정도(正道)수련을 보호하기 위해 채택한 두 가지 중대한 조치를 말한다. 본문 제1장에서 서술했다시피 춘추전국 시기에 신(神)은 도(道)와 유(儒)가 처음 전해지도록 안배했다. 하지만 상생상극의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물고기 눈과 진주가 뒤섞이고 정(正)과 사(邪)가 함께 존재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후세에 세간에서는 이를 가리켜 ‘제자백가(諸子百家)’시대라 부른다. 이때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고 전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사상문화는 오히려 전례 없이 활발해서 각종 사상유파와 학술단체들이 앞 다퉈 세상에 나타났다. 우선 학파만 놓고 말하자면 소위 ‘구류십가(九流十家)’가 있었다. 이중에는 문화를 열고 인류의 사상 내함(內涵)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신(神)이 파견한 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세간에서 전력을 다해 신전문화를 파괴하려는 자들도 있어서 좋고 나쁜 것이 혼재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진시황은 비록 무력으로 6국을 정복했지만 인자한 마음으로 6국의 후예들을 모두 말살하진 않았다. 하지만 6국에서는 망령되이 과거 세력을 회복하려는 자들이 많이 존재했다. 이들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교란을 이용해 기만과 속임수로 신정(新政 새로운 정부)을 비방하고 정도(正道)를 교란했으며 심지어 구정권을 회복시키려 했고 이는 진시황이 직면한 심각한 고험이었다. 때문에 정통문화를 보호하고 과거 6국 민중의 문화규범을 통일시키는 작업은 형세상 반드시 실행해야 했다.

진시황이 26년(기원전 221년) 통일정권을 건립한 후부터 소위 분서(焚書)가 발생한 진시황 34년(기원전 213년)까지 8년의 시간이 있었다. 이때 진나라는 6국의 궁궐과 민간에서 대량의 고전문헌들을 수집했다. 동시에 70여 명의 학자들을 초빙해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었다. 박사관 아래에는 또 2천여 명의 학생들을 모집해 제생(諸生)이라 불렀다. 고전문화에 대한 청리(淸理 역주: 깨끗이 정리한다는 의미)와 선별을 통해 거짓을 제거하고 참된 것을 남겨 정통문화를 보호했다.

진시황은 “내가 전에 천하의 책에서 쓸모없는 것을 거두어 모두 없애버렸다. 문학과 방술을 하는 선비를 무더기로 부른 것은 태평성대를 일으키고자 함이다.”라고 말했다. 진시황은 이들 박사들의 지위를 높여주었고 예우를 아주 두텁게 했다.(《사기‧진시황본기》)

진시황 34년(기원전 213년) 함양궁의 한 차례 연회에서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군현(郡縣)을 폐지하고 다시 예전처럼 분봉(分封)할 것을 청했다. 그러면서 “일을 할 때 옛사람들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진시황더러 6국을 예전처럼 되돌리라는 뜻으로 옛것을 빌려 시대를 풍자하면서 진시황의 신정을 비방한 것이다.

진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게 하자 승상 이사가 말했다.

“신 승상 이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옛날에는 천하가 나뉘고 혼란해도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일어나 말로는 모두 옛것을 말하고 지금 것을 비난하며 허황한 말을 꾸며 사실을 어지럽히고 사람마다 사사로이 배운 것을 좋다고 함으로써 위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했습니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아우르시고 흑과 백을 가려 한분의 지존(至尊 황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게 하셨음에도, 아직도 사사로운 학문으로 서로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 사람들이 명령을 듣고도 각자 자신이 배운 것으로 의론합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속으로 반감을 품고 조정을 나오면 길거리에서 논의하며, 군주에게 과시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기이한 것을 취해 고상하다 여기며,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비방을 조성합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형성될 것입니다. 금지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신이 청하오니 사관에게 진(秦)의 책이 아닌 것들은 모두 불태우고, 박사관의 직무를 제외하고 천하에 감히 소장하는 《시(詩)》, 《서(書)》, 제자백가의 글들은 지방관에게 보내 모두 태우게 하십시오. 또 두 사람 이상이 모여 감히 《시》, 《서》를 이야기하면 저잣거리에서 사형시켜 조리를 돌리고, 옛것을 가지고 지금 것을 비판하는 자는 멸족시키십시오. 또 이런 자를 보고 알고도 잡아들이지 않는 관리 역시 같은 죄에 처하십시오. 명령을 내린 후 30일이 되어도 서적을 태우지 않는 자는 경형(黥刑)을 내린 후 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십시오. 없애지 않아도 될 것은 의약, 점복, 나무 심는 것에 관련된 서적입니다.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소서.”(《사기‧진시황본기》)

진시황이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사의 말에서 우리는 당시 진나라가 분명히 소각 대상을 포함해 조정 안에 모든 서적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의 주희(朱熹)는 “진나라의 분서는 단지 천하에 태우라고 지시한 것이지 조정에는 여전히 남겨놓았다.”고 말했다. “진나라의 기록 및 박사가 관장하는 것을 제외하고 다 태워버리라”고 했지만 육경과 같은 종류는 여전히 남겨놓았고 다만 천하인들이 함부로 소유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만약 조사나 연구가 필요하다면 정부 및 박사의 수중에 모든 것이 완전히 남겨져 있었다.

중국이란 무대는 일조(一朝) 천자에 일조(一朝) 문화 일조(一朝) 중생이다. 진시황이 대진(大秦)황조를 건립하고 천지를 교체하자면 필연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러나 딴 마음을 품은 일부 방사, 술사 및 6국의 귀족과 옛 신하들에게 이용된 ‘제자백가’ 중의 찌꺼기들은 6국을 부활하고 신정(新政)을 교란하며 사람들의 정념을 교란하는 도구가 되었다. 진시황이 제자백가의 찌꺼기를 불태워 없애 정통문화를 보호한 것이 바로 소위 ‘분서(焚書)’의 진실이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운 지 1년 후에 또 소위 ‘갱유(坑儒)’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은 겉보기에는 다르지만 오히려 연계되어 있는데 당시의 소위 일부 ‘유생’들과 관련이 있다. 이들 ‘술사・방사, 부패한 유생’들은 단순히 모종의 사상을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권력을 추구하고 옛날 6국의 세력을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속으로 반감을 품고 조정을 나오면 길거리에서 논의’할 때에도 진시황은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진시황이 당시 비록 언론을 금지시키긴 했지만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시황은 나중에 이들 술사・방사 및 부패한 유생들이 방술을 이용해 사기행각을 벌이고 신정(新政)을 비방한 것이 입증된 후에야 비로소 크게 화를 내고 함양에서 460명의 ‘술사・방사 및 부패한 유생들’을 묻어버렸다.

이 사건의 발단은 방사(方士) 둘이 죄가 두려워 도망친 데서 비롯되었다. 진시황은 스스로 수련하고 양생했을 뿐만 아니라 방술 및 술사들도 아주 존중했고 늘 그들과 함께 신선, 진인, 장생과 수련의 이치를 토론하곤 했다. 하지만 후생(侯生), 노생(盧生)과 같은 일부 방사와 술사들은 진시황을 위해 채약연단(採藥煉丹)하고 선방(仙方)을 찾는다는 구실로 재물을 수취하고 여러 차례 사기행각을 벌여왔다. 당시 진나라 법규에 따르면 “한 사람이 두 가지 방술을 쓸 수 없었고 (방술의) 효험이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사형”이었다. 후생과 노생은 자신들의 사기행각이 드러나자 몰래 도망갈 것을 모의했다.

《사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도망 전에 다음과 같이 진시황을 비방했다.

“진시황의 사람됨은…전적으로 옥리(獄吏)만을 중용해 옥리는 친애와 총애를 얻었다. 박사가 비록 일흔 명이나 되지만 인원만 갖췄을 뿐 중용하진 않는다.”

“황상이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 삼기를 좋아한다.”는 등등.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한 진시황은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해 많은 것을 하사하고 잘 대해주었거늘 이제 와서 나를 비방하고 나의 부덕(不德)을 더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이런 제생(諸生)들에 대해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어떤 자는 요망한 말로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에 어사를 보내 제생들을 심문하자 제생들이 서로 고발했고 법령으로 금지된 것을 범한 자들이 모두 460여 명이었다. 이들 모두를 함양에 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에 경고로 삼게 했다. (《사기‧진시황본기》)

수련(修煉) 귀진(歸真)은 바로 인생의 목적이다. 방술(方術)로 사람을 속임은 사람들에게 수련해서 하늘로 되돌아가는 신심을 잃게 하는 것으로 이는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악독하고 가장 근본적인 상해를 주는 것으로 하늘의 이치가 용납하지 않는다. 진시황은 방술로 사람을 속이고 사기 친 술사와 부패한 유생들을 가장 엄한 벌로 다스려 ‘후세에 경고로 삼게’ 했다. 이는 세인들에게 미리 조심하도록 경고하는 동시에 사람의 근본을 보호한 것이다.

이 사건 하나 때문에 후세에 종종 ‘분서’와 합해 ‘분서갱유(焚書坑儒)’란 말이 생겼다. 하지만 그 원인을 따져보면 ‘갱유’는 사람을 속이고 재물을 편취하며 신정(新政)을 교란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른 술사・방사 및 부패한 유생들에 대한 한차례 숙청이었다. 한나라 때 왕충은 ‘갱유’에 대해 “유사(儒士)를 묻은 것은 제생들이 요언을 날조했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히 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사실 백가(百家)의 분란이 조성한 사상문화의 찌꺼기를 청리하고 사람을 속이고 사기행각을 벌인 일부 술사와 부패한 유생들을 청리한 것이다. 이는 정통문화가 후세에 유전되고 끊어지지 않게 한 것으로 결코 덮어버릴 수 없는 큰 공이다!

신(神)은 인류를 창조했고 또 세상에 내려와 도(道)를 설하고 법(法)을 전하며 사람을 제도했으며 인류에게 군사, 병법, 음악, 의학, 예술 등의 각종 문화와 기예(技藝), 공예(工藝) 등을 전해주었다. 또 어떻게 이들 문화를 보호해야 하는지도 안배해주었다. 사실 중국 역사상 진시황만이 더러운 찌꺼기를 과감하게 청리한 것은 아니며 후대의 명군(明君)과 어진 왕들 역시 모두 이와 같이 했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었다.

13. 사명을 완수하고 무대에서 물러나

천하를 통일하고 인간세상의 정도(正道)를 위해 장애물을 제거해 천추(千秋)의 대업을 다진 진시황은 본 조(朝)의 사명을 완수했다. 이에 역사의 무대에서 원만하게 물러날 때가 다가왔다. 중화 신전문화는 새로운 장과 막이 열려 외유내도(外儒內道)의 정통지위를 확립하고, 새로운 천국의 중생들이 신주(神州) 대지에 와서 인연을 맺고 새로운 일조(一朝)의 문화를 풀어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일찍이 이런 예언이 있었다.

“진시황 36년, 화성이 심성(心星)을 침범했다. 유성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백성들 중 누군가가 그 돌에 ‘시황제가 죽고 땅이 나뉜다’라고 새겼다.”(《사기‧진시황본기》)

진시황은 38년 7월(기원전 209년) 5번째 동쪽 순행 길에서 선서(仙逝)했다. 3년 후 진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풍운(風雲)이 다시 일고 전쟁의 불길이 타올라 초한(楚漢)이 서로 다투며 군웅이 일제히 일어났다. 역사의 다음 무대에는 병성(兵聖 용병의 성인) 한신(韓信)이 무적의 용맹을 자랑하던 서초패왕 항우(項羽)에 맞서 싸우는 새로운 막이 올라간다.

진시황은 파죽지세로 춘추전국시대 5백년 전쟁을 종식하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 단락의 역사는 겉보기엔 아주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신의 질서 있는 배치가 있었다.

신은 또 이 단락의 역사를 이용해 세인들에게 어떻게 정의(正義)를 지키고 하늘을 공경하며 도를 존중하고 분쟁을 처리하는지 가르쳐주었고 또 사람들에게 ‘하늘의 뜻은 결코 위배할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천하통일은 하늘의 뜻인데 이를 저지하고 신의 안배를 파괴하려 한다면 반드시 패하고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 몸을 닦고 귀진(歸真)함은 신이 사람에게 준 문화이자 희망이기에 이 희망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

진시황은 천시(天時)에 따르고 지리(地利)에 순응하며 인화(人和)에 부합해 순식간에 온갖 혼란을 다스리고 중화 천고에 정도(正道)를 보호하고 훌륭한 기틀을 다져주었으니 실로 웅대한 재주와 지략 및 비범한 흉금을 지닌 천고일제(千古一帝)였다. 그 인자함과 관용,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일반적인 제왕을 훨씬 뛰어넘는다.

진시황은 6국을 멸하고 체제를 개혁했으며 궁궐과 능을 건축하고 장성을 건립했으며 수리시설을 닦았다. 비록 하늘의 뜻에 부합해 문화를 이롭게 하고 만대(萬代)에 복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세인들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자연히 망국의 한을 품게 되었고 또는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 이들은 모든 구실을 이용해 사실을 왜곡했고 심지어 없는 일화마저 날조해 그를 비방하고 모욕하거나 저주했다. 후세의 일부 사람들은 진상을 잘 모르거나 또는 옛일을 이용해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종종 이런 왜곡과 비방의 말을 반복하곤 했다. 이런 시간이 오래되자 ‘진시황’은 일부 후인들의 눈에 ‘폭군(暴君)’의 대명사가 되었고 ‘분서갱유’ 역시 ‘역사문화 파괴’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실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론: 천고일제 만세(萬世)의 공적

세인들은 역사를 보면서 역사란 창세주(創世主) 및 다양한 층차의 신(神)들이 배치한 것이지 인류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이 근본적인 사실을 종종 망각하곤 한다. 성패(成敗)와 흥쇠(興衰)에는 모두 인연이 있다!

진시황은 천운에 따라 태어나 천하를 하나로 통일했으며 한 천조(天朝)의 중생을 이끌고 신주(神州)와 인연을 맺었다. 아울러 인간세상에서 정도(正道)가 널리 전해지기 위해 환경을 청리하고 기초를 다져주었다. 다음은 진시황의 업적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 진시황은 순식간에 온갖 혼란을 다스려 수백 년에 걸친 전란(戰亂)을 결속시켰다.

○ ‘무력으로 천하를 정벌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려’ 대진(大秦)의 통일강산을 세웠고 신주 최초의 ‘황권(皇權)’을 창립했다.

○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바로 무장을 해제시키는 대신 계속해서 남과 북으로 정벌에 나섰다.

○ 백월(百越)을 합하고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흉노의 침입을 저지하고 장성을 건축해 중화 신전문화를 보호하고 크게 빛나게 했다.

○ 분봉을 폐지하고 군현을 설치해 백세 황조(皇朝)의 초석을 만들었다.

○ 같은 윤리로 행동하고 같은 문자로 글을 쓰게 해 천년문화의 체제를 닦았다.

○ 관리를 스승으로 삼고 법(法)으로 가르침을 베풀어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 잡고 중생을 교화했다

○ 봉선(封禪)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몸소 실천을 통해 수련을 널리 알렸다.

○ 제자백가의 쓰레기를 불태우고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기만한 술사들을 파묻었다.

○ 춘추전국시대에 폐기되거나 방치되었던 온갖 사업을 다시 일으켜 천하를 질서정연하게 수습했다.

종합하자면 진시황은 웅대한 재주와 지략으로 역사상 수많은 최초를 창립했고 무수한 공적을 수립했으며 ‘천고일제(千古一帝)’란 칭호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어질었든 포악했든 진시황은 바람이 구름을 가르듯 천하를 휩쓸고 고금에 빛나는 찬란한 업적을 쌓았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진시황은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구하고 장생(長生)을 찾아 고금에 유전되었다. 자고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으랴마는 모든 것은 배치 속에 있다!

주요참고문헌:

李耳,《道德經》,春秋

左丘明,《左傳》,春秋

司馬遷,《史記‧秦始皇本紀》,漢

馮夢龍,《新列國志》,明

蔡元放,《東周列國志》,清

司馬遷,《史記‧封禪書》,漢

範曄,《後漢書‧班彪傳》,南朝

作者不詳,《詩‧小雅‧北山》,先秦

王嘉,《拾遺記》,晉

劉向,《列仙傳》,漢

皇甫謐,《高士傳》,晉

李天騭,《榮成縣志》,清

伏琛,《三齊略記》,晉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