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당나라 때 맹계(孟棨)가 쓴 《본사시(本事詩)‧고일(高逸)》에는 “이태백이 촉에서 장안에 도착해 여관에 머물렀다. 하지장(賀知章)이 그의 명성을 듣고 처음 방문해보니 과연 그 자태가 기이한 데가 있었다. 글을 보여 달라고 청하자 《촉도난(蜀道難)》을 꺼내 보여주었다. 시를 다 읽기도 전에 4차례나 찬탄하며 적선(謫仙)이라 불렀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황금 거북을 풀어 술과 바꿔 술이 다 떨어질 때까지 취하도록 마셨다.”라고 했다. 《촉도난》을 본 하지장이 너무 기쁜 나머지 이태백에게 술을 대접하고 싶은데 마침 수중에 돈이 없자 허리에 찬 황금 거북을 맡기고 함께 술을 마신 것이다.
이백의 빼어난 시와 소탈하고 속세를 떠난 듯한 풍채에 크게 놀란 하지장은 마침내 “그대는 태백금성(太白金星)이 속세로 내려와 인간 세상에 온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백을 태백성정(太白星精), 적선인(謫仙人)이라 불렀다. 하지장은 자호를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 하는데 조야(朝野)에 이름이 높았다. 특히 문단의 후배인 이백에게 연달아 ‘성정(星精 별의 정화)’이니 ‘선인(仙人)’으로 칭한 것은 이백의 천부적인 자질이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나이를 잊고 친교를 맺어 시우(詩友)이자 도우(道友 다음 장을 참조)가 되었다.
개원(開元) 20년(732년) 여름 이백은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강하(江夏)와 낙양(洛陽) 태원(太原) 등지를 여행했다. 개원 24년에는 “검술을 배우러 산동(山東)으로 갔다.”((《오월동로행답문상옹(五月東魯行答汶上翁)》)) 그는 임성(任城)에 머물 때 공소부(孔巢父) 등과 교류하며 조래산(徂徠山)에 가서 술을 마시며 놀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칭했다. 이외에도 하남, 회남(淮南) 및 호남(湘), 호북(鄂) 일대를 두루 다녔고 북으로는 태산에 오르고 남으로는 항주와 회계 등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시를 짓고 노래하니 시의 명성이 멀리까지 퍼져 조야를 진동시켰다.
개원 23년(735년) 무렵 태원을 유람하던 기간에 이백은 혜안으로 영웅을 알아보고 당시 병사에 머물러 있던 곽자의(郭子儀)와 친교를 맺었다. 곽자의가 군에서 죄를 짓자 이백은 정의를 쫓아 장관을 설득해 곽자의의 죄를 벗겨주었다. 곽자의는 이에 대해 깊이 감격했고 나중에 이백의 죄를 벗겨주는 보답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 진심을 터놓고 친밀한 사이가 되어 천고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냈다. 안사(安史)의 난이 발생한 후 곽자의는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낙양과 장안 두 서울을 수복해 반란을 평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하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대종(代宗) 때는 복고회은(仆固懷恩)의 반란을 평정하고 회흘(回紇 위구르)추장을 설득해 함께 토번(吐番 티베트 왕국)을 공략해 당나라의 강산을 지켜냈다. 곽자의는 이처럼 평생 전투에서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고 당나라는 그로 인해 20여년 이상 편안할 수 있었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에 대해 ‘권력이 천하를 기울였음에도 조정에서 꺼리지 않았고 공이 세상을 뒤덮었음에도 황제가 의심하지 않았다(權傾天下而朝不忌,功蓋一代而主不疑)’고 평가했다. 그가 당나라의 동량이자 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백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당시 유명한 도사 오균(吳筠)과 현종의 누이 옥진공주(玉真公主) 및 하지장이 입을 맞춰 이백을 칭찬했다. 현종이 이백의 시부(詩賦)를 보더니 앙모하는 마음이 생겨 곧장 조칙을 내려 이백을 궁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이백이 궁에 들어가자 황제가 기뻐하면서 연(輦 황제가 타는 수레)에서 내려와 직접 맞이하고는 칠보(七寶)로 된 상을 차려주고 손수 국을 챙겨주었다. “경은 평민의 신분으로 짐이 그 이름을 알 정도이니 이는 평소 쌓인 도의(道義)가 아니라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현종이 또 일부 현안들에 대해 질문하자 이백의 대답은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다. 현종이 크게 칭찬하고는 곧 이백을 공봉한림(供奉翰林)에 임명해 문장의 초안을 작성해 올리게 하고 황제 옆에 머물게 했다.
현종은 매번 연회를 열거나 교외에 놀러갈 때면 늘 이백이 시종하게 했다. 이백이 이렇게 현종의 총애를 받자 동료들이 몹시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질투심을 가진 사람이 생겨났다. 이 기간에 고력사(高力士 현종의 총애를 받던 환관)가 신을 벗기고 양귀비가 먹을 갈아 이태백이 술에 취해 외교문서를 작성했다는 등의 천고의 미담이 전해져온다. 현종은 비록 세 차례나 이백에게 관직을 주고 싶어 했지만 측근 간신들의 비방과 질투 때문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이백의 사명 역시 황궁(皇宮)에 있지 않았다. 이백이 황궁에서 지낸 지 3년이 못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주청하자 현종은 허락과 함께 황금을 하사했다.
황궁에서의 인연을 끝마치자 이백은 계속해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신선을 찾고 도를 닦았다. 아울러 시와 문장 및 그가 만든 시풍(詩風)과 문풍(文風)이 인간세상에 전해져 성당의 시부(詩賦)문화를 중화 오천년 문명에서 정상에 오르게 했다.
천보 3년(744년) 여름 이백은 동도(東都)인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두보(杜甫)를 만났다. 이때 이백은 이미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두보는 출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낙양성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이백이 두보보다 11살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오랜 지기가 되었다. 낙양에 있을 때 그들은 다음에 양송(梁宋 지금의 개봉 상구 일대)에서 다시 만나 신선을 찾아보기로 약속했다.
이해 가을에서 겨울 무렵 두 사람은 만난 후 처음으로 헤어져 각기 도교의 스승을 찾아 진록(真籙 도교의 비밀문서)을 찾아보고 도록(道籙)을 받기로 한다. 이백은 제주(齊州 지금의 산동성 제남 일대)로 가서 자극궁(紫極宮)에 가서 고천사(高天師) 여귀(如貴)로부터 도록을 받고 정식으로 수도의식을 밟고 도사가 되어 수련을 계속했다.
이백은 황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수련을 하고 있었고 또 그더러 수련하라고 부르는 신(神), 불(佛), 도인(道人)이 있었다. 황궁을 떠나 고생스런 수련을 거친 후 이백은 이미 높고 깊은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다른 공간의 수많은 수승한 광경들을 볼 수 있었고 또 뭇신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다양한 선계(仙界)를 원하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는 그가 황궁에 들어가기 전후에 쓴 시와 문장을 통해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 나온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유(儒), 석(釋), 도(道)의 경서를 두루 읽어 삼교구류(三教九流 삼교와 각종 유파)가 모두 그의 마음속에 있어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후세인들은 늘 이백이 대체 부처를 믿는지 아니면 도를 믿는지 아니면 유(儒)를 닦았는지 따지려들지만 이는 보다 높은 법문(法門)이 만법(萬法)의 근원이 됨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백이 인간세상에서 수련할 때 그는 유, 석, 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설명으로는 이백이 수련하고 도를 얻은 법문의 연원을 똑똑히 가려낼 방법이 없다. 이백은 수련 중에서나 수련성취한 후 자신이 보고 만난 것의 많은 내용을 시와 부로 묘사했다. 다만 수많은 세인들과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 특히나 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몽상, 환상 또는 낭만주의라고 하거나 혹은 술에 취해 한 말이라고 부를 뿐이다.
이백은 후세에 고귀한 인품과 의협의 기개와 풍모를 남겨 천고의 상찬을 받았다. “수십 년을 손님으로 있으면서도 단 하루도 안색을 낮추지 않았고”(《잡언기이백(雜言寄李白)》) 부귀하고 권력 있는 사람 앞에서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벗을 위해 정의를 위해 공정한 말을 했으며 이익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해 영웅의 본색이 백세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후세에 대다수 사람들이 이백의 시사(詩詞)를 감상할 때 대부분 일반인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정력을 기울이고 그가 쓴 불(佛), 도(道), 신(神)의 이치와 선계(仙界)의 모습 및 정도(正道)수련이 시(詩), 사(詞), 가(歌), 부(賦)에 가져다준 본의에 대해서는 대부분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당나라 및 인간세상에 가져다준 것은 수련의 바른 이치를 시, 사, 가, 부 창작의 주도로 삼아 이를 이용해 신을 찬양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 자신의 위대한 인격과 신(神)이 전한 정통적인 시풍과 문풍은 진정한 신전문화를 가져다주었다.
천보 14년(755년) 안사(安史 안록산 사사명)의 난이 발발하자 이백은 여산(廬山)에 은거했다. 이때 영왕(永王 현종의 아들) 이린(李磷)이 마침 군사를 내서 동쪽으로 순행하고 있었다. 이때 안사의 난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던 이백은 영왕의 초대로 막료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영왕이 숙종(肅宗)과 보위를 다투다 패배하자 모반으로 몰려 세력을 잃었다. 이백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심양옥(潯陽獄)에 갖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곽자의가 나서 자신의 관직을 버리는 대신 이백을 사면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이백은 사형을 면하고 야랑(夜郎 지금의 귀주성 동재桐梓 일대)으로 유배 가는 것으로 결정 났다. 이백은 고귀한 인품과 평소 지녔던 명성 때문에 유배를 가는 곳마다 지방관들의 요청으로 술연회를 갖곤 했다. 모두들 그를 몹시 존중했고 그 누구도 유배 가는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건원(乾元) 2년(759년) 이백이 무산(巫山)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대사면령을 내려 이백도 석방되었다. 그는 곧장 장강을 따라 달려 내려와 저 유명한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며)》를 지었다. 이 시는 당시 그의 심정을 잘 반영해준다.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며)》
아침에 구름 낀 백제성을 작별하고천 리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가네.강 양쪽엔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고가벼운 배는 이미 첩첩 산을 지났네.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부주)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상원(上元) 2년(761년) 예순이 넘은 이백은 금릉(金陵)으로 돌아왔다. 금릉에서 그는 당도(當塗) 현령으로 있던 친척 아저씨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머물렀다. 상원 3년(762년) 《임종가(臨終歌)》란 부를 지은 후 선서(仙逝 신선의 죽음)하니 이때 향년 62세였다. 숙종이 붕어하고 큰아들인 당 대종(代宗)이 보위에 오른 후 이백에게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내리고 다시 불렀지만 이백은 이미 선서한 후였다.(《신당서》)
《임종가(臨終歌)》
대붕이 날아 천하를 떨치더니중천에서 꺾이니 힘이 부치는구나.남은 바람이야 만세(萬世)를 몰아쳐 불겠지만부상에서 노닐다 왼쪽 소매 걸렸구나.후세 사람 이를 얻어 전할지라도공자가 없으니 그 누가 눈물 흘려주리!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中天摧兮力不濟(중천최혜역부제)餘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遊扶桑兮掛左袂(유부상혜괘좌몌)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역주: 임종가(臨終歌)는 임로가(臨路歌)로 된 판본도 있다.
시선(詩仙)은 대붕으로 처음 이름을 날렸는데 선서(仙逝) 전에는 또 대붕이 부상에서 노날다 중천에서 꺾였다고 노래하며 아름다운 일생을 마쳤다. 하지만 그 남은 바람(餘風)만으로도 만세를 격동시키고 아름다운 명성은 천고에 전해졌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397